“미국은 1979년 12·12 사태를 반란으로 규정해 전두환을 예편시키려 했으나, 한국군 내의 지지가 예상 외로 탄탄한 것으로 보고 계획을 바꿨습니다. 바로 전두환 암살이었죠.”
그 직후 미국 측에 포섭된 일부 한국 군인들은 전두환의 집 주변을 감시하며 호시탐탐 저격 기회를 노렸다. 위험을 눈치챈 전두환은 세 차례나 거처를 옮기며 경비를 강화했다. 초조해진 암살조는 자동차 사고로 위장한 암살을 계획하고 여러 차례 현지 답사와 모의 훈련까지 했으나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치학자인 이완범(63·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새 연구서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사 연구’ 4~6권에서 미국 정부의 ‘전두환 제거 구상’을 자세히 서술했다. 개별 내용은 그동안 각종 회고록과 증언 등을 통해 나온 것이 많지만, 이 교수는 미국 애틀랜타의 지미 카터 도서관과 한국 외교부의 문서 등 자료를 모아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이 교수는 “당시 미국은 자기들 입장에서 ‘믿을 만한 군부 지도자’였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12·12로 체포되자 은밀히 전두환 제거 공작에 나섰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이 1980년 1~2월 ①전두환 암살 계획 ②한국군 내 반(反)전두환 세력의 역(逆)쿠데타 지원에 대한 구상으로 동시에 나타났다.
“하지만 전두환보다 더 강한 리더십을 지닌 군부 내 실력자를 확보하지 못했고, 전두환 역시 전면에 나서지 말라는 미국의 요구를 일시 수용하는 노련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 결과 12·12부터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까지 6개월 동안 전두환이 은인자중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서울의 봄’이 짧게나마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두환 제거 계획은 왜 실패했을까? 당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4·19나 5·16 때보다 많이 약화된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이 교수는 “더 중요한 것은, 전두환이 제거될 경우 북한의 침략 가능성이 커지게 되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동북아에서 소련을 막기 위한 ‘안보’를 무엇보다 중시했던 미국은 전두환 제거 계획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완전한 보류는 아니었다. 1981년 1월 대법원이 김대중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자 미국은 서랍 속에 넣어 뒀던 전두환 제거 계획을 다시 꺼내려 했다는 것이다. 감형 조치가 이뤄진 후 김대중이 도미함으로써 이 구상은 다시 중단됐다.
“1986년 11월 전두환은 집권 연장을 위한 친위 쿠데타를 계획했습니다. 이때 미국은 개스턴 시거 국무부 차관보를 한국에 보내 전두환에게 경고함으로써 이것을 막았습니다. 군부의 시위 진압 우려가 있던 1987년 6월에는 제임스 릴리 주한 대사를 통해 다시 경고했고요.” 이 교수는 “크게 보면 미국의 전두환 제거 구상은 1987년 6·29 선언을 통해 우회적으로 달성된 셈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인권과 안보라는 두 가치 사이에서 대단히 현실적으로 대응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교수의 해석이다. 그는 “미국은 천사도 악마도 아닌 현실지상주의자라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친미도 반미도 허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