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미욱해서(하는 일이나 됨됨이가 어리석다는 뜻) 남의 말을 듣거나 공부를 하지 않았고, 야당 대표는 증오의 정치를 넘어 야수의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정치학자이자 한국 현대사 전문가인 신복룡(82) 전 건국대 석좌교수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때론 독설(毒舌)도 서슴지 않으면서, 동서양의 고전을 넘나들며 현하웅변(懸河雄辯)을 펼쳤다. 그는 “지금 대한민국은 GDP 그래프로만 선진국일 뿐, 국가를 위해 헌신할 동기도 찾기 어려운 허상의 나라로서 해방 직후보다 더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어쩌다 지금 같은 사태에 이르게 된 걸까요.
“동기 유발이 다른 어디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지라도, 그 위기를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한 국가 지도자의 미욱함에 책임이 있습니다. 듣기를 거부하는 지도자에게는 약이 없어요. 충신 열 명이 간신 하나를 못 이깁니다.”
韓 민주주의, 광기의 ‘데모크레이지’
–대통령은 왜 계엄 선포라는 선택을 했던 것이라 보시나요.
“지도자가 정책에 실패하는 이유는 첫째, 공명심, 둘째, 교만으로 무장된 허영, 셋째, 오판, 넷째는 무지한 탓입니다. 공자는 ‘온갖 만 가지 생각을 하면서도 공부하지 않는 무리가 가장 위험하다(思而不學則殆)’고 했어요. 왕양명은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정치하는 인간들이 공부를 안 해서 그렇다(天下不治, 學術不明)’고 했습니다. 세종은 독서 하느라 새벽닭이 울 때서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돼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국민이 뽑은 국회이니만큼 그 결의를 거부할 명분이 없습니다. 지구 상의 모든 국민은 자기의 분수에 가장 알맞은 국회의원을 뽑습니다.”
–앞으로 정국은 어떻게 될까요.
“이재명 대표는 자신의 결심 공판이 끝나기 전에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 생명을 끊기로 작정했고, 윤 대통령은 탄핵으로 번 6개월 안에 이 대표와 동반 자살하기로 결심했을 겁니다. 이제 탄핵은 정해진 시간 안에 대통령만 죽느냐, 아니면 함께 죽느냐를 가릴 검투사의 혈전이 될 텐데 책사(策士)가 없는 대통령에겐 그리 만만치 않을 겁니다. 역사에선 막 나가는 독종의 승률이 더 높았어요. ‘삼국지’로 보자면 지금은 노숙이 아니라 조자룡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어디서부터 어긋난 길을 걸었다고 보십니까.
“인연이란 소중한 것인데, 윤 대통령은 왜 헤어지는 사람마다 모두 척을 지는지 안타깝습니다. 한동훈이 이재명보다 더 미울 수는 없는 건데, 모처럼 불러놓고 책상에 손을 얹은 채 을러대듯이 말하며 콜라 한 잔 먹여 보내다니요? 이 대표는 민중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진 것이 실수였습니다. 민중에 휩쓸리는 정치인은 민중과 함께 죽고, 민중에게 거역하는 정치인은 민중의 손에 죽습니다. 그들의 환호는 언젠가 독이 돼 돌아올 겁니다. 이 대표는 시대정신을 지닌 인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달성한 대한민국이 2024년에 왜 이런 위기를 겪어야 할까요.
“민주정이란 본래 취약한 제도이고, 역사적으로 강력한 민주 정부란 없었습니다. 이미 120년 전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세 가지의 파고를 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노동 계급의 터무니없는 요구, 둘째는 훈련되지 않은 자유 의지의 질주, 셋째는 끝이 없는 자본가의 탐욕입니다. 지금 한국은 기이하리만큼 정확하게 베버의 예언에 함몰돼 있죠. 사회적 갈등 비용이 GDP 대비 27%나 되는 나라가 어떻게 건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종전 이후 후발 국가 중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라고 하지만 그 내실은 허상입니다. 경제 정의가 없는 사회에서 졸부들과 생계형 NGO가 횡행하는 세상은 우리가 꿈꾸던 이상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분열돼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은 해방 직후보다 더 위험합니다. 마치 망국 직전의 로마 제국을 보는 것 같습니다. 로마의 민주주의는 민중주의의 허상 속에서 침몰했습니다. 민주주의는 연륜입니다. 서구에선 적어도 200년의 수련 기간이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고작 경력 80년인 한국의 민주주의(democracy)가 광기의 정치(democrazy)가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입니다. 이젠 그 정도를 넘어 탄핵의 정치(vetocracy), 증오의 정치(hatocracy)를 지나 야수의 정치(brutocracy)의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한국 정치의 진짜 함정은 의회
–‘제왕적 대통령제’를 끝내고, 개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한국 정치의 함정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라 의회입니다. 지금 같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국회의원으로 내각제를 운용하다가는 한 임기 안에 나라가 거덜날 것입니다. 내각제는 민주주의 의회 제도 가운데서도 가장 고난도의 기술이며 의회주의의 꽃입니다. 이 지역 패권의 나라에서 그 꿈은 접는 게 좋습니다. 대통령의 사면권이 중세의 면죄부보다 싸게 팔리고, 대법관이 독직에 연루돼 재판을 지연시키는가 하면, 이 대명천지의 IT 시대에 소쿠리로 개표하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다 된 줄 알았는데 겨우 이 정도였던 거냐’고 탄식하는 사람들 역시 많습니다.
“선진국은 GDP의 그래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애덤 스미스는 선진국, 곧 정의롭고 잘사는 나라가 되려면 세 가지를 갖춰야 한다고 했어요. ‘낮은 세금’ ‘안정된 통치권’ ‘예측 가능한 법’입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한국은 나라도 아닙니다. 한국 현대사의 부모는 파독 간호사와 광부, 중동 노동자, 월남 파병 용사입니다. 모두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이죠. 지금의 통치권은 길거리를 횡행하는 킥보드 하나도 다스릴 수 없고 제복 경찰이 취객에게 매를 맞을 정도로 허약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누가 국가를 위해 헌신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걸까요?
“세 가지가 무너졌습니다. 아버지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교육마저 무너진 것이 우리 비극의 근본 원인입니다. 자식에게 영(令)이 서지 않고 학생에겐 훈육이 없어졌습니다. 모두가 개체가 돼 모래알 같은 삶을 삽니다. 경제권이 사라져 누추한 봉급쟁이로 전락한 아버지의 굽은 뒷모습은 너무 초라해졌습니다. 결혼이란 기본적으로 경제 공동체의 형성인데도 말입니다.”
–외형적인 압축 성장을 하느라 정신과 의식 면에서 뒤처진 걸까요.
“서부 영화를 보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광야를 달리다 문득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 육신이 이렇게 허둥대며 달려오는 동안에 내 영혼은 제대로 따라오나’ 기다리느라고 그러는 겁니다. 나는 1인당 국민소득 50달러의 소년기를 보내다 이제 700배 넘게 늘어난 3만6000달러 시대가 됐으니 인류 역사상 불가사의한 변혁의 시대를 산 것이어서 불편하고 황망합니다.”
–그런 급격한 변화가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는 말씀이군요.
“경쟁과 추월의 사회를 유발했습니다. 대학은 취업 학원으로 전락했고 취업률이 낮다는 이유로 인문학은 폐과되고 있어요. 인생에 대한 고뇌 없이 오로지 취업에 몰두해야 하는 청년들은 이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생각하는 사람)가 아니라 호모 메카니쿠스(homo mechanicus·기능인)일 뿐입니다. AI가 등장했으니 삶은 더 메말라 가겠죠. 관료가 부패하면 정권이 무너지고, 군인이 부패하면 국가가 무너지며, 교육이 무너지면 민족이 사라집니다. 한국은 지금 그 문턱에 와 있어요.”
가정·교육 무너지고 모두 ‘모래알’
–지금의 혼란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치권의 회심이나 회개를 기대하기엔 너무 멀리 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지식인입니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년 역사를 돌아보니, 이 난세에 배운 값 하며 살기 참으로 어렵다’는 조선 말 선비 황현의 유서가 자꾸 눈에 밟히긴 합니다. 그러나 지식인은 일어나 외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지식인은 메이지 시대 일본 학자 니시 아마네(西周)가 외쳤던 것처럼 ‘당대 민중의 열기를 내려줄 해열제가 돼야’ 하며, 영국 역사학자 존 토시가 호소한 것처럼 ‘민중의 백내장을 수술하는 안과 의사가 돼야’ 합니다. 이것이 이 국가와 민족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신복룡 교수
건국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건국대 교수와 대학원장,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교수를 지냈다. 1977~79년 라디오 프로그램 ‘아침의 메아리’를 진행해 전국에 이름을 알렸는데 박정희 대통령도 매일 산책하며 들었다고 한다. 건국대 석좌교수를 끝으로 현직에서 퇴임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을 지냈으며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한국 정치사’ ‘한국 분단사 연구’ ‘한국 정치사상사’ 등 다수 저서를 냈다. 한말 외국인 기록과 해방 정국을 연구했고, ‘삼국지’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번역본도 냈다. 퇴임 후에도 ‘평생 책에서 손을 놓지 않겠다’고 한 ‘정관정요’의 다짐을 되새겨 계속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