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이런 지폐도 있나?’
처음엔 잠시 눈을 의심했습니다. 이달 초 울산광역시 정토마을 자재병원 로비에 들어섰을 때의 일입니다. 로비엔 성탄 트리가 놓여 있었는데, 트리에 ‘오천 만원’짜리 지폐가 붙어 있었거든요. 자세히 보니 5000원짜리 지폐와 1만원짜리 지폐를 접어서 이어붙인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죽음 명상’을 주제로 정토마을 자재병원 이사장 능행 스님을 인터뷰하기 위해 방문한 참이었습니다. 스님은 불교 호스피스의 선구자로 30년 이상 수많은 말기 환자들의 임종을 지키며 마지막 가시는 길에 마음의 평안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3년 설립된 자재병원은 그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방문했지요. 인터뷰를 끝내고 사진 촬영까지 마치고 작별 인사를 드리기 위해 병원 로비에서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스님은 입원 환자들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주변에 물어봤더니 ‘오천만원’ 짜리 지폐는 한 환자분이 걸어놓았다고 했습니다. 그때 스님이 한 환자분과 함께 로비로 내려왔습니다. 바로 오천만원짜리 지폐를 걸어놓은 주인공이었습니다. 환자분은 문병 온 가족들을 배웅하러 나온 길이었는데 스님과 손을 꼭 잡고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연보라색 옷을 입은 것이 눈에 띄었고, 무엇보다 표정이 너무도 편안하게 보였습니다. 그분은 로비에 내려와서도 성탄 트리 옆 의자에 앉아 스님과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환자분은 목에 튜브를 꽂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말은 할 수 없었지요. 주로 스님이 이야기를 하면 환자분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표정이 너무나 환하고 너그럽고 평화로웠습니다.
곁에 계시던 환자분의 가족은 오천만원 지폐에 대해 이야기해줬습니다. 명절이나 가족이 모이는 자리엔 항상 환자분이 오천원짜리와 만원짜리를 테이프로 이어붙여 ‘오천만원’을 만들어서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참석자에게 나눠줬다고 합니다. 참석자들을 생각하며 한 장 한 장 테이프를 붙이는 그분의 모습이 상상됐습니다. 아마도 한 사람씩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며 행복해 하셨겠지요. 오천만원과 별도로 세뱃돈이나 용돈도 듬뿍 주셨다지요.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생분의 얼굴에도 그런 시절의 행복이 스쳐지나는 듯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환자분과 스님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두 분은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서로에게 보내고, 주먹을 부딪히며 서로 웃고 있었지요. 대화는 거의 5분 이상 이어졌습니다. 스님께 어떤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나누셨느냐고 여쭸더니 ‘잘 마무리하자’는 이야기였다고 했습니다. 병원을 떠나며 스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면서 그분께도 인사를 드렸는데 합장하며 배웅하는 표정 역시 너무나 편안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평화롭고 좋아보여서 사진 촬영을 해도 괜찮겠느냐고 여쭸더니 본인과 가족 모두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는 스님과 환자분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나누는 장면을 실었습니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오고 능행 스님 인터뷰 기사도 그 다음주에 신문에 실렸습니다. 기사가 실린 후 스님과 연락을 하다가 뜻밖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로 그 환자분이 제가 방문한 다음 날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머리가 띵했습니다. 그때 표정이나 걸음걸이나 도저히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분처럼 보이지 않았거든요. 삶과 죽음이 들숨과 날숨 사이로 갈린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스님은 “그분은 마지막에 정리를 잘 하시고 참 편안하게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족분들께 드리고 싶다고 사진을 좀 구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사진 기자에게 부탁해 사진을 보내드렸습니다.
스님께 들은 사연은 이렇습니다. 사업을 하셨던 고인은 인두암이 발병해 폐로도 전이가 됐었다고 합니다. 치료가 힘들게 되자 본인이 3개월 동안 검색을 해서 자재병원 호스피스를 자발적으로 찾았다고 하고요. 병원에선 5개월 동안 지냈는데 매일 병원 마당의 지장보살 동상 주변(’지장대불전’이라고 부른답니다)을 하루 21바퀴씩 돌았다고 합니다. 작은 화이트보드를 들고 다니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어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원색을 좋아하셔서 환자복보다는 녹색, 노란색 등의 옷을 좋아하셨다고 하고요. 제가 방문했던 날 나눈 대화는 이랬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정신 바짝 차리고 죽음을 맞아보자. 이제 다시 태어나는 것도 반드시 성공하시길 바란다.” 그분은 마지막 날 오전까지도 혼자 걸어서 화장실도 다녀오시고 오후 1시쯤 가족들이 임종하는 가운데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제가 봤던 편안한 표정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스님은 당시 인터뷰 때에도 “마무리를 잘 하신 분들은 보내드리는 입장에서도 마음이 덜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못한 분들이 더 많기 때문이겠지요. 자재병원은 매년 12월 한 달 동안 성탄 트리를 로비에 세워놓습니다. 그분이 떠나신 후에도 ‘오천만원’짜리 지폐는 성탄 트리에 계속 걸려 있답니다. 그 성탄 트리가 놓인 로비에서 지난 14일 말기 암환자를 위한 송년음악회도 열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삶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분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법정 스님이 이야기한 ‘아름다운 마무리’를 떠올렸습니다. 법정 스님은 저서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기는 것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믿는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삶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재병원 로비의 성탄 트리와 거기 걸려있던 ‘오천만원’짜리 지폐, 그리고 그 환자분의 편안한 미소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다사다난했던 올해도 이제 저물어 갑니다. 올해를 아름답게 잘 마무리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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