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여(與)와 야(野)는 지향하는 국가의 모습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정치투쟁을 거듭하는 것”이라며 “이미 선진화된 대한민국을 더 좋은 국가로 만들기 위한 발전적 싸움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조인원 기자

“여(與)와 야(野)가 꿈꾸는 나라가 서로 다른 것이었다는 동상이몽(同牀異夢)이 지금의 불행한 사태를 낳은 것입니다.”

미수(米壽)의 노학자는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강의를 하듯 인터뷰를 이어 나갔다. 안병직(88)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한민국이 급속히 선진화되는 과정에서 정치인들의 정쟁과 국민 의식 같은 면에서는 성숙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며 “저개발국 발전의 모델이 된 선진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을 이제라도 제대로 확립해 지금과 같은 소모적 정쟁을 ‘발전적 싸움’으로 바꾸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이번 계엄 선포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고 선을 그었다.

비상계엄 선포에 이어 대통령 탄핵소추 사태까지 이르렀습니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해 선진국으로 진입했습니다만, 2004년부터 지금까지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세 번이나 가결시켰습니다. 이 불행한 사태는 여·야 정치투쟁의 결과입니다. 현재의 여당과 야당은 역사적으로 그 정치적 뿌리가 같지 않습니다. 그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국가상(國家像)이 서로 다릅니다.”

여야의 정치적 뿌리가 어떻게 다른 건가요.

“여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근대화와 선진화를 추진해 왔고, 야당은 민중주의를 바탕으로 민족·민중 해방과 통일을 지향해 왔습니다. 동일한 헌법 체제 아래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것입니다.”

극한 투쟁의 이유가 이념에 기초한다는 말씀인가요.

“역사적인 배경도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역사는 당쟁과 사화로 점철돼 있었고, 일제 식민지 치하라는 엄혹한 상황에서도 조선공산당은 콩가루 같은 파벌 싸움 때문에 코민테른(국제 공산당)으로부터 추방된 일도 있었습니다. 한국인은 아직도 파벌 싸움의 본능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싸우면서 발전하는 게 민주주의 아닐까요.

“사회는 혼란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고, 목숨을 건 정치 투쟁이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결함을 엄청나게 빨리 개선한 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에선 여·야 모두 ‘어떠한 국가의 건설을 지향하는가’에 대해 공개적인 토론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중요한 정치적 결정이 밀실에서 이뤄집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건설적인 논쟁이 있을 수 없고 정치적 소모전만 일어나게 된다고 봅니다. 이제부터는 여는 민주화를, 야는 경제 발전을 서로 인정하고 이미 선진화된 대한민국을 더 좋은 국가로 만들기 위한 발전적 싸움을 해야 합니다.”

12·3 계엄 선포에는 어떤 직접적인 원인이 작용했을까요?

“가장 중요한 점은 윤석열 대통령이 정치인 출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임기 초부터 여러 인사 정책과 국정 수행에서 정책의 효율성을 중시한 나머지 국민적 지지를 너무 소홀히 여겼던 게 아닌가 합니다. 김건희 여사 문제는 야당이 본래 정치적인 문제로 제기한 것인데도 ‘법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다고 이러느냐’란 식으로 대응해 왔습니다. 장관 등에 대한 탄핵이나 비정상적인 예산 삭감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정치 도의적 측면에서 대처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계엄 역시 정치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만 갔습니다. 그 결과 지금처럼 대통령이 권한을 행사할 수조차 없는 처지가 된 것이죠. ‘야당에게 경고하기 위한 통치행위로서 계엄 선포를 했다’는 얘기는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고,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서 한 말로 보입니다. 계엄의 법률적 당부(當否)를 명확히 판가름할 방법은 바로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이었고, 이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맡겨 두는 것이 국정 정상화의 지름길일 겁니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한 대한민국이 왜 지금 이런 위기를 겪는 걸까요.

“위기라고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갈등 속에서 헤매고 있기는 해도 저개발국들의 정치와 비교해 보면 매우 선진적이라고 봐야 합니다. 여·야의 지향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할 수밖에 없다 해도, 한국 민주주의를 뒷받침하고 있는 여건이 워낙 튼튼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여건이란 무엇입니까.

“세계의 글로벌화, 한·미·일 협력, 그리고 한국의 선진화입니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가 뒤범벅돼 있지만, 인민·민중민주주의는 선진화된 한국 사회엔 걸맞지 않습니다. 한국에 종북주의가 많이 있지만, 그것을 받아줘야 할 북한이 멸망 상황에 직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종북주의가 위험 요소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득세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사태는 ‘87년 체제’와 ‘제왕적 대통령제’의 종언을 고하는 신호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당쟁으로 점철됐던 나라에서 산업화와 민주화가 달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박정희 권위주의 체제에 의한 정치 안정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확립되고 경제 발전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여·야 간 정쟁에서 보는 한, 내각책임제를 도입한다면 정치적 혼란을 가져올 것이고 여·야 모두 그런 체제를 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대통령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한국 정치의 파벌 투쟁에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매우 빨리 선진국으로 올라선 줄 알고 있었는데, 거기에 알맞은 깊이가 없었던 건 아닐까요.

“한국이 정치·경제적인 면에서 고도로 선진화된 사회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민의식이나 학술·문화적인 면에선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또한 갑작스러운 고도 성장에 의해 선진국이 됐기 때문에 선진성의 성숙도에 있어서는 여러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죠. 하지만 한국 정치의 정쟁적 측면만 가지고 정치 제도 등 그 장치 발전의 수준을 재단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요.

“허겁지겁 달려왔기 때문에 선진화를 달성한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부족했다고 봅니다. 나라의 정통성과 정당성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이죠. 이런 연구가 깊고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국민적 교육도 수행된다면 한국인의 의식 수준 역시 크게 달라질 것이라 봅니다. 지금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역사 논쟁’은 계속됐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역사 논쟁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둘러싼 두 가지 갈래로 나뉘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갈래의 논쟁에 참여한 연구자들 가운데 과거 내 학문적 동료들도 많은데, 그들의 학문 성향은 명백히 종북적이었습니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뱀과 같은 친일파·친미파’로 보는 데서 이런 사실은 명백하죠. 그들은 민족사의 정체성을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한·미·일 협력을 배경으로 건설해 온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향하는 북한의 현재 모습을 보면 얼마나 공상가들인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죠.”

또 다른 한 갈래는 무엇입니까.

“일제 때 한국인의 호적이 한국이라는 논쟁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역사적 근거는 대한민국 건국을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임정에 호적부라는 것이 있었나요? 나는 임정이 발행한 여권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닙니다.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려다 보니 이런 무리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설됐다고 해서 임정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며, 건국의 정신적 뿌리 중 하나로 봐야 합니다. 역사 논쟁은 매우 중요한데, 그것이 치열해야 결국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밝혀지게 되고 발전하는 길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병직 교수

1936년 경남 함안 출생. 1965년부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했으며 좌파 진영의 대표적 경제학자로 꼽혔었다. ‘한국 자본주의는 붕괴할 것’으로 예측했으나 1980년대에도 한국 경제가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저개발국도 고도성장을 할 수 있고, 한국 같은 신흥 공업 국가들이 자본주의 발전을 선도할 것’이라는 ‘중진 자본주의론’에 도달했다. 이후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을 재평가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세웠고 뉴라이트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