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촌(北村) 한복판에 ‘건명원(建明苑)’이란 현판이 걸린 단아한 기역자 구조의 한옥이 있다. ‘빛을 세운다’라는 뜻의 이름이 걸린 이곳은 ‘세상에 없던 미래 인재 육성’ ‘인문 고등교육 기관’을 표방하며 두양문화재단(이사장 오황택)이 2015년 3월 세운 곳이다. 어느새 10년을 맞았다.

10주년을 맞는 서울 종로구의 인문·예술·과학 교육 기관 '건명원'의 한옥 뜰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학생 정민정(9기)씨, 김개천 교수, 학생 주호준(10기)씨, 정하웅 교수. /박상훈 기자

“고대로부터 문명은 ‘인문’ ‘예술’ ‘과학’이라는 세 가지 바퀴로 전진해 왔죠. 이 바퀴를 움직이는 추동력은 늘 젊은이들에게서 나왔습니다.” 건명원 상임 교수인 김개천 국민대 교수(예술건축 전공)가 말했다. 서유럽이 산업혁명 이후 세계를 이끌 수 있었던 추동력인 ‘지적(知的) 혁명’의 근본 요소를 제대로 가르쳐 보자는 취지였다. 건명원에서 물리학을 맡은 정하웅 카이스트 교수는 “복잡계(complex system)나 창발(emergence)을 비롯한 과학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생각하는 힘을 키우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상은 19세에서 29세까지 청년들이다. 1년 과정으로, 매년 30~40명 정도를 면접을 통해 선발한다. 수업료는 없다. 학생들의 ‘본업’은 대학생부터 취업 준비생, 직장인까지 다양하다. 먹고사는 일에 다급해 보이는 한국 청년들이 과연 건명원에 들어가려 할까 우려할 만도 한데, 뽑을 때마다 높게는 10대1 경쟁률을 보인다고 한다.

그들은 왜 여기에 들어오려 하는 것일까? 건명원 10기 학생 주호준(28)씨는 “솔직히 취업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되는 곳이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았던 질문들을 던지는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경지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고 했다. 자동차 운전으로 치면 상향등을 켜서 더 넓게 먼 곳까지 보게 된 셈이라고 했다.

9기 정민정(31)씨는 “학점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의 힘을 키우다 보니, 내가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는 중요한 가치가 과연 뭔지 생각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취업 준비 때문에 제쳐놨던 전공의 꿈을 되살려 다시 대학원에 다닐 마음을 먹게 됐다는 것이다.

교수진은 화려하다. 서동욱(서강대·철학) 원장과 주경철(서울대·서양사학) 상임 교수, 김도균(서울대·법학), 박훈(서울대·일본사학), 유화종(서울대·수학), 장대익(가천대·진화론), 박슬기(서강대·국문학) 등 각계의 유명 교수들이 강의와 토론을 맡고 있다.

김개천 교수는 “당초 ‘우리 사회가 인문적이지 못해 잘못 나가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건명원이 창립됐다”고 설명했다. 인문학이란 ‘삶의 방식을 키워주고, 다르게 바라보고 생각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성세대라면 흔히 짐작할 만한 ‘사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자아를 찾는다’는 개념이 아니라고 했다. “그건 20세기적인 교육이죠. 거기엔 정작 자신의 삶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질적인 자아(自我)’ ‘표류하는 자아’를 통해 고정되지 않고 열려 있는 자기 자신의 삶과 행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한옥 건물에 수요일과 토요일 청년 수십 명이 모여 주 8~10시간 교육을 받는데, 2시간 강의가 끝난 뒤 이어지는 토론만 3시간까지 가는 일이 허다하다고 한다. 최근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시야를 넓게 봐야 한다’는 강의 내용을 걸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이어졌다.

주호준씨는 박훈 교수에게 일본사 강의를 들었을 때, 과거엔 답이 미리 정해진 듯한 편향적 교육을 적잖게 받았었음을 느꼈다고 했다. 특히 박 교수가 ‘나는 조선의 마지막 세대고, 너희는 한국의 첫 세대’라는 말을 했을 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건명원은 곧 올해 수업을 들은 10기까지 모두 22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같은 인문·예술·과학의 성찰이 북촌 한옥의 담장을 넘어 사회로 퍼지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