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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2월 23일자 A6면에 ‘비상계엄·탄핵소추… 원로 인터뷰’ 기획 시리즈의 제5회로 보도됐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의 인터뷰 전문(全文)을 아래에 싣습니다. 거의 모든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말을 최대한 압축해서 핵심 위주로 싣습니다만, 신 교수의 인터뷰 내용은 아쉽게 신문에 실리지 못한 부분 중 기록해야 할 내용이 매우 많다고 판단됐기에, 분량의 많음을 무릅쓰고 여기에 이례적으로 전문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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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미욱해서(하는 일이나 됨됨이가 어리석다는 뜻) 남의 말을 듣거나 공부를 하지 않았고, 야당 대표는 증오의 정치를 넘어 야수의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정치학자이자 한국 현대사 전문가인 신복룡(申福龍·82) 전 건국대 석좌교수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때론 독설(毒舌)도 서슴지 않으면서, 동서양의 고전을 넘나들며 현하웅변(懸河雄辯)을 펼쳤다. 그는 “지금 대한민국은 GDP 그래프로만 선진국일 뿐, 국가를 위해 헌신할 동기도 찾기 어려운 허상의 나라로서 해방 직후보다 더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또 다시 대통령 탄핵이라는 상황까지 오게 됐습니다. 어쩌다 이런 사태에 이르게 된 걸까요.
“역사를 영웅중심사(英雄中心史)로 보는 것은 시대정신도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위험한 사관이기는 하지만, 돌아보면 한 지도자의 역량과 결심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례는 허다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기 유발이 다른 어디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지라도, 지금의 사태는 그 위기를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한 국가 지도자의 미욱함에 그 책임이 있습니다. 역사는 순간마다 위기였고 격동기였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하는가는 지도자의 판단 사항입니다. 그럴 능력이 없는 경우를 대비해 창조주는 인간의 귀를 늘 열어놓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듣기를 거부하는 지도자에게는 약이 없어요. 충신 열 명이 간신 하나를 못 이깁니다. 십상시(十常侍) 가 나타난 것도 지도자의 책임입니다.”
―대통령은 왜 계엄 선포라는 선택을 했던 것이라 보시나요.
“지도자가 정책에 실패하는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명심이며, 둘째는 교만으로 무장된 허영이며, 셋째는 오판이며, 넷째는 무지한 탓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성현들은 수없이 경고하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공자는 ‘온갖 만 가지 생각을 하면서도 공부하지 않은 무리가 가장 위험하다(思而不學則殆·사이불학즉태·’논어’ 위정)’고 했습니다. ‘따라서 공부하지 않아 미련한 인간은 어찌 도와 줄 길이 없다(下愚不移·하우불이·’논어’ 양화)고도 했죠. 그러면서 ‘열심히 공부했으면 벼슬에 나가 보라(學而優則仕·학이우즉사·’논어’ 자장)고 권고합니다. 공부하지 않았으면 벼슬에 나가지 말았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은 결과라는…
“이 뜻을 가장 잘 받들어 가르친 성현이 왕양명(王陽明)입니다. 그의 말을 따르면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정치하는 인간들이 공부를 안 해서 그렇다(天下不治 學術不明·천하불치 학술불명·’전습록’ 22)’는 것입니다. 세종은 본디 천품(天稟)이 훌륭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내 한평생 살면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리라(手不釋卷·수불석권)’던 당 태종의 정관 시대의 흥륭(정관지치·貞觀之治)을 내 당대에 이룩하겠다는 치열한 독서가 낳은 인재일 뿐입니다. 그는 새벽닭이 울 때서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술 마시고 골프 치는 시간의 절반만이라도 책을 읽었더라면 나라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돼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국회의 결의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에 대한 법리적 다툼이 있지만, 그 결의를 거부할 명분이 없습니다. 국민이 그들을 뽑은 업장(karma)이 그렇게 돌아온 것입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국민은 자기의 분수에 가장 알맞는 국회의원을 뽑습니다.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현찰 25만 원에 영혼을 판 국민에게는 어쩌면 그 정도의 국회의원 수준도 과분합니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그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것이 괴롭지만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었습니다.”
―앞으로 정국은 어떻게 될까요.
“향후의 전망을 말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건 시간 싸움입니다. 이재명 대표는 자신의 결심공판이 끝나기 전에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 생명을 끊기로 작정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으로 번 6개월이라는 시간 안에 이 대표와 동반 자살하기로 결심했을 것입니다. 이제 탄핵은 정해진 시간 안에 대통령만 죽느냐, 아니면 함께 죽느냐를 가릴 검투사의 혈전이 될 텐데, 책사(策士)를 두지 못한 윤석열 대통령에겐 그리 만만치 않을 겁니다. 역사에선 막 나가는 독종의 승률이 더 높았어요. ‘삼국지’로 보자면 지금은 노숙이 아니라 조자룡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유화주의자가 아니라 전사(戰士)가 필요한 때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마을 장례식에 가 보면 노인들이 시신을 붙잡고 ‘나의 명(命)도 가져가십시오’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이제 윤 대통령은 이 시대의 악(惡)을 끌어안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어디서부터 어긋난 길을 걸었다고 보십니까.
“세상살이는 인연입니다. 그리고 그 인연은 숙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 가운데에도 헤어지는 인연이 만나는 인연보다 더 소중합니다. 왜 윤석열 대통령은 헤어지는 사람마다 모두 척(隻)을 지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한동훈 전 대표가 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동훈이 이재명보다 더 미울 수는 없습니다. 모처럼 불러 쪽의자에 앉혀 놓고 책상에 손을 얹은 채 을러대듯이 말하며 콜라 한 잔 먹여 보내는 사진을 보며 우리는 참으로 민망했습니다. 건너편에서 노려보는 경호원 같은 사람의 섬뜩한 눈빛도 역겨웠습니다. 어느 참모가 그렇게 조언 또는 연출을 했는지, 그는 현대판 조고(趙高·'지록위마’의 고사로 유명한 중국 秦나라의 간신)입니다. 한동훈 대표는 물러 나오며 절치부심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되어 언제인가 다시 만날지 모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실수했습니다. 왜 인생을 그렇게 살까요?”
―이재명 대표는요.
“민중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진 것이 실수였습니다. 그가 지닌 정치적 자산이 민중뿐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주의에 기댔다가 말로(末路)가 행복했던 정치인은 일찍이 없습니다. 지금의 세태에서 민중이 가지는 폭발력이 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교훈에 따르면, 민중에 휩쓸리는 정치인은 민중과 함께 죽고, 민중에 거역하는 정치인은 민중의 손에 죽습니다. 그들의 환호는 언제인가 독이 돼 돌아올 것입니다. 이미 한 사람은 민중의 뜻에 거스르다가 그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나머지 사람이 어찌 될지를 보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민중은 변덕스럽고 위험합니다. 그들이 큰 파괴력을 가진 것은 사실이고 몇 푼의 잔돈으로 그들을 동원할 수 있지만, 존 스튜어트 밀이 말했듯이 천 명의 민중이 외치는 가치는 한 명의 현자가 외치는 가치를 따르지 못합니다. 민중은 선체의 기관(汽罐)이지 선장은 아닙니다. 이 대표는 결코 시대정신을 지닌 인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달성한 대한민국이 2024년에 왜 이런 위기를 겪어야 할까요?
“역사적으로 강력한 민주 정부란 없었습니다. 사실상 민주 정치란 매우 취약한 제도입니다. 이미 120년 전인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막스 베버는 이와 같은 위기가 오리라고 예언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쓴 그의 말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세 가지의 파고를 넘어야 하는데, 첫째는 노동 계급의 터무니없는 요구이며, 둘째는 훈련되지 않은 자유 의지의 질주이며, 셋째는 끝이 없는 자본가의 탐욕입니다. 지금 한국은 기이하리만큼 정확하게 베버의 예언에 함몰돼 있죠.”
―베버가 꼭 예언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위의 세 가지 함정 가운데 한 가지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세계 170개국 중에서 158위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나라가 노동자의 천국일지는 몰라도 상대적으로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비(非)노동자’의 박탈감이 심각합니다. 삼성경제연구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사회적 갈등 비용은 GDP 대비 27%입니다. 삼성과 LG의 수익 총계를 합친 것과 같습니다. 5만원권 화폐의 장폐율(藏幣率)이 발행고의 45%를 이미 넘었습니다. 이런 사회를 어찌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어찌 무너지지 않고 국가를 지탱할 수 있을까요? 한국의 산업화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50여 개 후발 국가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라고 하지만 그 내실은 허상입니다. 경제 정의가 없는 사회에서 졸부들과 생계형 NGO가 횡행하는 세상은 우리가 꿈꾸던 이상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분열돼 있다는 지적도 많이 나옵니다.
“내가 보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은 해방 직후보다 더 위험합니다. 마치 망국 직전의 그리스·로마제국을 보는 것 같습니다. 로마의 민주주의는 민중주의의 허상 속에 침몰했습니다. 이를테면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는 아테네의 패각 추방(오스트라키즘·ostracism)의 경우를 보면 70년 동안에 9명이 추방됐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공의롭지 않은 민중의 과욕을 거부하다 겪은 재앙이었습니다. 당시 아테네 시민이 기명 투표를 할 만큼 학력이 높지 않아 대리 투표와 중복 투표가 많았습니다. 한국의 해방 정국에서는 인구가 남한만 1700만명이었는데, 정당의 당원 합계가 7000만명이었습니다. 성인 유권자 1명이 모두 10개 정당에 가입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만약 이것이 민주주의의 실상이라면 민주주의는 추구할 바가 못 됩니다.”
―한국은 민주주의에서 아직 멀었다는 말씀입니까.
“민주주의는 연륜이며, 수련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서유럽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적어도 200년의 수련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주의의 경력은 이제 80년입니다. 한국의 민주주의(democracy)가 광기의 정치(democrazy)가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이제는 그 정도를 넘어 탄핵의 정치(vetocracy)와 증오의 정치(hatocracy)를 지나 야수의 정치(brutocracy)의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지금은 차라리 ‘잡범(雜犯)의 정치’ 단계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느 정치인은 ‘깨끗하게 지는 것보다 더럽게 이기는 길을 가겠다’고 공언했습니다. 로마의 재사였던 정치인 키케로는 죽는 순간까지 ‘돈 봉투 흔들며 막 나가는 정치가 끝내 이긴다’고 장담했고, 존 스튜어트 밀은 그런 정치를 혐오하며 정계를 떠나 ‘자유론’을 쓰면서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자며 계엄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금 정치학자들 사이에는 대놓고 말하지 못하며 서로 속으로만 웅얼거리는 논리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전두환 패러독스’입니다. 그들의 비공식적인 주장에 따르면 해방 이후 80년 동안 서민이 살기에 가장 평안했던 시기는 ‘전두환 대통령의 재임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물가 안정, GDP 급상승, 치안, 수출 증대, 올림픽 유치…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가 1988년도에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사실(교도통신 1988년 3월 3일 보도)을 조심스럽게 거론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설사 살기 편했다고 해도 그런 이유만으로 과거의 독재 정치를 그리워해서야 되겠습니까? 보수가 빗나가면 자칫 반동(反動)의 시대로 들어갈 위험성이 있는 겁니다.”
―1987년 체제와 ‘제왕적 대통령제’의 시대를 끝내고 개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흠결이 표면화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앞날이 막막합니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함정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라 의회입니다. 누구는 내각제를 도입해야 한다지만 지금과 같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국회의원으로 내각제를 운용하다가는 한 임기 안에 나라는 거덜날 것입니다. 한국의 국회의원은 법적으로 186가지의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세비, 차량비, 비서 9명의 인건비, 기차 무료 승차, 늦은 귀가에 대한 보상 등, 합산이 어렵습니다. 조선일보 2023년 3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그들이 누리는 국민소득 대비 특혜의 정도는 세계 3위이며, 효율은 OECD 38국 가운데 37위입니다. 동아일보 2023년 11월 14일 보도를 보면, 한국 국회의원이 제시한 선거 공약의 실천율은 8.5%일 만큼 무책임하고 위약(違約)이 심합니다. 지금 한국의 정치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제보다 자코방적 의회제도의 해악이 더 심각합니다.”
―그래도 내각제를 한다면 달라지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그들이 세종처럼 오직 국민만 바라보고 살기를 바랄 만큼 엄격하지 않습니다. 매튜 조셉슨에 따르면, 전과자가 전체 의원의 33%인 국회는 신판 ‘강도같은 귀족들’입니다. 부패도는 세계 6위입니다. 그들의 선거를 어찌 감당하려고 내각제 판을 깔아 주려는 것인가요? ‘정부가 뉴라이트를 관변 단체의 장으로 임명했다’고 국회의장이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이 참담한 시대에 우리가 국회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향후 100년 안에 이 땅에서의 내각제는 어렵습니다. 당선무효형을 받고서도 재선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끔찍합니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내각제는 어렵다고 보시는 거군요.
“내각중심제는 민주주의 의회제도 가운데에서도 가장 고난도의 기술이며, 의회주의의 꽃입니다. 이 지역 패권의 나라에서는 그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98%의 몰표가 나오는 지역 패권의 정치에서 내각제의 꿈은 접어야 합니다. 대통령의 사면권은 이미 중세의 면죄부보다 싸게 팔려 현행범들은 이번 회기가 끝나기 전에 사면 복권되어 다음 선거에 출마한다고 장담하고 있고, 대법관이 독직에 연루되어 재판을 지연시키는가 하면, 이 대명천지의 IT 시대에 소쿠리로 개표하는 선거 체제에서 민주주의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개헌이 불필요하다는 말씀인 겁니까.
“일부에서 거론되고 있는 개헌 논의는 곧 내각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중임제, 대통령의 임기에 관한 논의, 중선거구제를 포함한 선거제도의 개편, 선거관리위원회나 선거 관계 교수도 모르는 희한한 비례대표제 등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총투표수 5%를 지고 의석의 25%를 잃었다면 지금의 국회의원 선거는 사기극이거나 바보들의 행진입니다. 지금 한국 정치는 의회민주주의가 아니라 ‘복수(復讐) 중심제’입니다. 이념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 100명이 감옥을 가고, 그들의 형량은 통산 200년의 징역형에 이르고, 20명이 자살하거나 의문사를 당하며, 20개의 별이 떨어집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다 된 줄 알았는데 겨우 이 정도였던 거냐’고 탄식하는 사람 역시 많습니다.
“선진국은 GDP의 그래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고전파경제학의 입장을 선호합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펼친 주장에 따르면, 한 나라가 선진국, 곧 정의롭고 잘사는 나라가 되려면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하는데, 첫째는 세금이 낮아야(easy tax) 하고, 둘째로는 통치권이 안정돼 있어야(stable government) 하며, 셋째는 법이 예측 가능해야(predictable law) 합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한국은 나라도 아닙니다. 상속세는 65%로서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약탈 경제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나와 가족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인데, 65%를 상속세로 내야 하는 중세(中世)의 세법 밑에서 누가 재산을 증식하려 하겠습니까?”
―아까 말씀하신 대로 ‘허상(虛像)의 선진국’이란 말씀이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국부를 창출하는 사람이 애국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업가가 애국자입니다. 우리는 재벌의 허물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 산업 발전에 그들보다 더 크게 기여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오로지 국가만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우리는 요구할 권리가 있을까요? 이 나라 현대사의 주역은 서독에 간 간호사와 광부, 중동 노동자, 월남 파병 용사입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이 사람들이 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의 통치권은 길거리를 횡행하는 킥보드 하나도 다스릴 수 없을 만큼 허약하며, 제복 경찰이 취객에게 매를 맞는 취약 국가입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주차장에는 폐차비를 아끼려고 버리고 간 차가 10대입니다. 당국에 호소했지만 그것을 치우려면 대법원 판결까지 받아야 한답니다. 소방관이 불을 끄려고 문짝을 부쉈다고 손해배상 청구서가 날아오는 세상에서 누가 국가를 위해 헌신하겠습니가?”
―그래도 국민의 소득 수준은 높아지지 않았습니까.
“자, 국가의 행복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러면 개인의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요? 다시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했던 말을 들어보면, 첫째는 노동이 가능할 정도로 육신이 건강해야(health) 하고, 둘째는 빚이 없어야(no debt) 하고, 셋째는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no shame in conscience)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초고령 사회에서 출산율이 떨어지고, 성인병이 만연하며, 가계 빚의 총량은 국민총생산고를 넘어 1.5조 달러고, 이미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에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마음먹기에 달려 있지만 인간의 행복은 구름 위에 있지 않고 내 곁에 있습니다. 그러나 산업 사회의 각박함이 그 모든 것을 앗아 갔습니다. 그래서 사람 사는 냄새가 더욱 그립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걸까요?
“세 가지가 무너졌습니다. 아버지가 무너지고, 그래서 가정이 무너지고, 나머지 교육마저 무너진 것이 우리 비극의 근본 원인입니다.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말이 없어졌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도시의 삶이 싫어 시골에 살기에 어린 손주의 빗나간 삶을 꾸짖어 줄 어른이 없는 사회가 됐습니다. 손주를 꾸짖다가는 며느리의 핀잔을 듣습니다. 자식에게 영(令)이 서지 않고, 학생에게 훈육이 없어졌습니다. 매를 든 부모를 자식이 상해죄로 고발하고, 학생은 작은 피해에도 휴대전화를 펴고 112를 불러 교사를 고발합니다. 교장이 제자였던 신임 교사에게 커피를 부탁했다가 교권 유린으로 고발당하고 너무 참혹해 자살했습니다. 이제 사촌이 없고, 당숙이 누군지를 모릅니다. 모두가 개체가 돼 모래알 같은 삶을 삽니다. 부모 자식이나 사제 사이, 또는 직장에서 소통이라는 것을 보기 어렵습니다. 온라인 통장으로 봉급 제도가 바뀐 뒤로 아버지의 재산권이 사라지고, 가장은 이제 누추한 봉급쟁이로 전락했습니다. 아버지의 존엄이 어머니를 압도해야 한다는 법도 없지만, 경제권이 사라진 아버지의 굽은 뒷모습이 너무 가엾고 초라합니다. 그래서 가장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졌습니다. 아르놀드 반 게넵이 말했듯, 결혼은 기본적으로 경제 공동체의 형성이 그 계기였습니다그러나 이제는 그것마저 무너졌습니다.”
―대한민국이 외형적인 압축 성장을 하느라 정신과 의식 면에서 뒤떨어졌던 것일까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광야를 달리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봅니다. 서부 영화에서 많이 보면서도 우리는 무심히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왜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볼까요? ‘내 육신은 이렇게 허둥대며 달려오는 동안에 내 영혼은 제대로 따라오나’ 기다리느라고 말을 멈춘 것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일제 때 태어나, 미군 통치를 받다가, 철들 무렵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으나, 민족의 비극과 함께 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받으며 살았고, 다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됐습니다. 80년 동안에 통치권자가 다섯 번 바뀌었습니다. 아무리 격동기였다 하더라도 이렇게 기구한 인생이 없습니다.”
―인생을 돌아볼 여유나 겨를이 없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낸 글라이스틴은 우리의 세대를 가리켜 남의 나라 같은 세대의 300년을 살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일제 때 1인당 국민소득 150달러의 삶을 살다가 해방과 전쟁 시기에 50~60 달러의 소년기를 보내고 이제 그보다 700배가 늘어난 3만6000 달러의 시대가 됐으니 인류 역사상 불가사의한 변혁의 시대를 산 것이어서 불편하고 황망합니다.”
―그런 급격한 변화가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는 말씀이군요.
“경제상 변화는 경쟁과 추월의 사회를 유발했습니다. ‘보편적 지식(universality)’을 보급하겠다는 뜻으로 시작한 대학(university)은 이제 취업 학원으로 전락했습니다. 취업률이 대학 평가의 주요 지표입니다. 현대의 삶에서 취업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육과정(敎育課程)에서 인문학이 죽었습니다. 문사철(文史哲)은 학과나 취업에 관계없이 교양학부에서 필수로 가르치던 전통이 사라지고 학과마저 폐지됐습니다. 취업율이 낮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예전에는 고전 100선이라 해서 학점과 관계 없이 필수로 수강하던 제도가 있었으나 이제는 그마저 없어졌습니다. 인생에 대한 고뇌가 없이 오로지 취업에 몰두해야 하는 현대의 젊은이들은 이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생각하는 인간)가 아닌 호모 메카니쿠스(homo mechanicus·기계적 인간)일 뿐입니다. 인성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됐습니다. 이제 AI마저 등장했으니 삶은 더 메마를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관료가 부패하면 정권이 무너지는 것으로 끝납니다. 군인이 부패하면 국가가 무너집니다. 그러나 교육이 무너지면 민족이 사라집니다. 지금 한국이 그 문턱에 서 있습니다.”
―지금의 혼란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치권의 회심이나 회개를 기대하기엔 너무 멀리 왔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보호벽은 지식인입니다. 지식인은 일어나 외치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자면 핍박이 많이 따를 것입니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저 들판의 창생을 구하겠는가?’(‘晉書’ 謝安列傳)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 년의 역사를 돌아보니, 이 난세에 배운 값 하며 살기가 참으로 어렵구나(추등엄권회천고 난작인간식자인·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라던 조선 말 선비 황현(黃玹) 선생의 유서가 자꾸 눈에 밟힙니다. 그러나 지식인은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것이 천명이며 국민의 소망입니다. 메이지(明治) 시대 일본의 지식인인 니시 아마네(西周)가 외쳤던 것처럼 지식인은 당대 민중의 열기를 내려줄 해열제가 돼야’ 하며 영국 역사학자 토시가 호소한 것처럼 ‘민중의 백내장을 수술하는 안과의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국가와 민족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이게 나라냐?’는 국민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는데, 우리가 모두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하에서 이 시대 마지막 이상주의자였던 장기표(張琪杓)를 만났을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복룡 교수
건국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건국대 교수와 대학원장,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교수를 지냈다. 1977~79년 라디오 프로그램 ‘아침의 메아리’를 진행해 전국에 이름을 알렸는데 박정희 대통령도 매일 산책할 때 경호원에게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져오게 해 그의 방송을 들었다고 한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을 지냈으며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한국정치사’ ‘한국분단사 연구’ ‘한국정치사상사’ 등 저서를 냈다. 한말 외국인 기록과 해방 정국을 연구했고, ‘삼국지’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번역본도 냈다. 건국대 석좌교수를 끝으로 현직에서 퇴임한 후에도 ‘평생 책에서 손을 놓지 않겠다’고 한 ‘정관정요’의 다짐을 되새겨 계속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제자들에겐 “입시 준비하는 자녀들보다 먼저 잠자리에 들지 말라”는 말도 남겼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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