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종우 신부의 '어쩌면, 삶을 견디게 하는 것들'에 수록된 삽화. /일러스트=가울, 라의눈출판사 제공

“나도 힘들다고 하면 당신이 좀 덜 힘들까요.”

오늘은 새해를 시작하기에 함께하면 좋을 책 한 권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가톨릭대 교수인 방종우(42) 신부의 ‘어쩌면, 삶을 견디게 하는 것들’(라의눈 출판사)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펼치게 된 것은 보도자료 가장 윗줄에 적힌 위의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기자의 눈길을 끌었다는 점에서 보도자료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지요. 보통은 신자나 일반인들이 “힘들다”고 하소연하면 종교인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지요. 그런데 이 책은 성직자가 “나도 힘들어”라고 먼저 선수(?)를 치면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사실 방점은 ‘당신이 좀 덜 힘들까요’에 찍혀 있지요.

책은 방 신부가 신학생 시절을 거쳐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교수로 생활을 하는 단상을 담담하게 정리했습니다. 진지하고 따뜻하면서도 재치있는 유머가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책장이 술술 넘어갑니다.

방종우 신부의 '어쩌면, 삶을 견디게 하는 것들'에 수록된 삽화. /일러스트=가울, 라의눈출판사 제공

새해 시작을 함께하기에 좋을 것 같다는 이유는 제목에 있습니다. 방 신부가 추천하는 ‘삶을 견디게 하는 것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방 신부는 “난 군대는 다시 가도 유학은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천주교 사제의 유학은 일반 학생들의 그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유학도 ‘인사 발령’입니다. 천주교는 교구 사정에 따라 신학교 교수 요원을 국가와 학교, 전공까지 정해서 보냅니다. 사제는 ‘순명(順命)’해야 하고요.

물론, 유학생으로 선발된다는 것은 영광이지요. 그렇지만 아무리 공부를 좋아하더라도 ‘나는 이 공부가 하고 싶다’가 아니라 ' 너는 이 공부를 해라’고 하는 건 큰 차이겠지요. 방 신부도 약 10년의 교육 과정을 거쳐 사제가 된 후 성당 사목에 마음을 붙여갈 때 쯤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떠난 이탈리아에서 맞은 어학 수업 첫날이 너무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은 입영 영장을 받거나 훈련소에 들어가는 꿈을 가장 끔찍한 악몽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방 신부는 어학 수업 첫날이 더 힘들었던 기억인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회고합니다. 첫날 이후로는 좋은 추억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가령 선입견 혹은 피해의식 문제를 짚어볼까요? 유럽에서 생활하면 동양인이라는 점 때문에 손해보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요. 이탈리아 유학 중 방 신부는 한국인 동료들과 맥주를 마시러 간 펍에서 비슷한 일을 당했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종업원이 오지 않더랍니다. 일행보다 늦게 온 테이블에는 메뉴도 보여주고 주문도 받는데, 손짓을 해도 알았다는 눈짓만 하더랍니다. 일행 사이에서는 “우리가 동양인이라서 그렇다”고 의견이 모아졌겠지요. 방 신부가 대표로 항의하러 나섰습니다. 그런데 종업원들끼리 주고 받는 이야기는 뜻밖이었습니다. “야, 네가 가서 주문 받아.” “나 영어 못 하는데?” “너는 영어 좀 하냐?” “나 진짜 못 해. 그냥 네가 가라.” “아, 나 진짜 영어 못 한다고!” 종업원들이 주문을 받지 않은 이유는 ‘동양인 차별’이 아니라 ‘영어 공포증’이었던 것이죠. 어떤 일을 앞두고 미리 선입견이나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요.

‘두려움’도 우리를 힘들게 하죠. 방 신부는 이런 일화를 들려줍니다. 유학 시절 첫 구두시험 날. 시험시간보다 4시간 일찍 교수님 연구실 앞으로 갔답니다. 이탈리아어도 자신이 없어서 다른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라도 좀 나눠볼 생각이었다지요. 예상과 달리 다른 학생은 없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교수님이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오더니 대뜸 말합니다. “들어와.” 꼼짝없이 불려들어간 방 신부. 시험 문제가 무엇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 없이 구두시험을 마쳤지요. 그런데 교수님은 인자한 미소로 “내가 한국말로 공부했다면 너만큼 대답할 수 없었을 거야”라고 하셨다네요. 방 신부는 “두려움을 이기게 해주는 것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잘 해내고 있음을 확신시켜주는 따뜻한 미소”라고 적었습니다. 교수가 된 방 신부는 “이제 나는 내 앞에서 두려움의 시선으로 서 있는 학생들에게 백발의 할아버지 교수님이 보여준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알프스 산악 마을에서 부활절 미사를 집전한 일화도 그렇습니다. 유럽에는 사제가 고령화되고 숫자도 부족해 부활절처럼 큰 축일에는 외국인 유학생 신부들을 ‘알바’처럼 시골 성당에 파견하곤 한답니다. 방 신부는 부활절 무렵 7개 성당을 맡아 미사를 드렸답니다. 온전히 이탈리아어로만 미사를 드리느라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데 성당 마당 한 켠에 모인 할머니들이 부르더랍니다. ‘뭘 잘못했나’ 걱정하며 다가갔더니 할머니들은 그의 팔을 쓰다듬으면서 이구동성으로 외쳤답니다. “와아, 젊다!”

방 신부는 “나는 깨달았다. 사제의 인종, 언어, 억양보다 젊음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 사제의 연륜, 경험, 영성의 깊이보다 젊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이라고 적었습니다. 또 이렇게 덧붙였지요. “나는 영원히 내일의 나보다 젊고 누군가는 내 젊음을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볼 것이므로, 지금의 나를 걱정으로 소비해 버리기에 나는 여전히 젊다. 당신도 그렇다.”

방 신부는 ‘불행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이란 제목의 글에서 “신부님은 행복하죠?”라고 묻는 청년에게 망설임 없이 “아니”라고 답했다고 고백합니다. 실망한 청년에게 방 신부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는 행복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아”라면서 사소한 행복을 꼽아봅니다. 10년 과정이 끝나고 사제가 되던 순간, 응원하던 야구팀의 승리를 직관하던 순간, 며칠간 죽만 먹다가 건강 검진이 끝나고 먹는 매운 음식의 첫술, 민방위 훈련이 끝나는 순간 등에 행복했다네요. 공통점은 모두 다 ‘순간’이란 점이죠. 그러면서 불행이 느껴질 때마다 읊조린답니다. “괜찮아질 거야. 이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괜찮아질 거야. 행복한 순간이 또 찾아올 거야. 어차피 완전한 불행은 없으니까.” 행복은 순간 순간이며 ‘완전한 불행은 없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방종우 신부(오른쪽)와 저서 '어쩌면, 삶을 견디게 하는 것들' 표지. /라의눈출판사 제공

신학생 시절 하프 마라톤에 참가한 경험도 이야기합니다. 동기생 10여명이 참가했는데 평소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마라톤 연습도 하지 않던 자신이 2등을 했다네요. 비결은 ‘완주를 목표로 천천히 달리자’ 였답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우리의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은 열정도 의욕도 아닌 ‘꾸준함’이란 사실을.”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군대 다시 가는 것보다 더 괴로웠던 이탈리아어 공부도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익혀 나갔다고 하네요.

새해도 벌써 보름 정도 지났네요. 올해도 많은 난관이 있겠지요. 독자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완주하시길 바랍니다. 사소한 행복의 순간을 놓치지 마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