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린 눈이 뜨였다. 볕이 잘 드는 너른 들판 뒤로 카리스마 넘치는 바위 산줄기가 뻗어 있었다. 바위 능선의 변주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토록 잘 생긴 산일 줄은 몰랐던 것. 푸근한 벌판 뒤로 불끈 솟은 능선엔 강함과 부드러움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어,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이 들 떠 올랐다. 툭 건드리면 앞뒤 가리지 않고 고백해버릴 것 같은 순진한 사내가 산에 들고 있었다.

명분으로 따지면 3월(음력 1~2월) 산행지로 우두산 만한 산이 없다. 신축년(辛丑年) 흰 소의 해, 산세가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이름 붙은 우두산은 새해 새로운 도전을 위한 산행지로 제격이다. ‘거창 항노화 힐링랜드’를 기점으로 마장재로 올라 정상과 의상봉을 거쳐 원점회귀로 내려올 계획이다.

마장재 부근 억새 지대에서 본 우두산. 가운데 불끈 솟은 암봉이 의상봉이다. 우두산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전망터다. /월간산 주민욱 기자

산 입구가 지나치게 깔끔하다. 지하부터 지상까지 층층이 나눠져 있는 주차장부터 깔끔하게 지은 관리사무소까지. 거창군 관계자임을 알리는 형광색 조끼를 입은 이들이 삼엄하게 입구를 지키고 있다. 행여 산행이 금지되었나 싶어 물어보니, 체온 체크와 명부 작성만 하면 산행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익숙한 손길로 배낭을 메는 청춘남녀는 연세산악회 재학생인 최동혁∙최수연씨다.

최신 휴양림 시설이 눈에 띈다. 거창군에서 큰 예산을 투입해 완성한 ‘항노화 힐링랜드’다. 자연휴양림과 숲치유센터를 결합한 시설이지만 코로나로 인해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데크길을 따라 마장재 방향으로 든다. 해발 500m에서 주능선 850m까지 고도를 높이는 길, 벌떡 선 산세와 달리 산길은 완만하다. 계단이 늘어나자 눈앞에 다가서는 우두산 최고 명물, Y자형 구름다리다. 구름다리 3개를 연결한 알파벳 Y 모양의 출렁다리로 우두산을 대번에 전국적인 명소로 끌어올렸다.

우두산의 명물인 Y자형 구름다리. 코로나 거리두기 단계에 따라 개방과 통제가 반복되고 있다. /월간산 주민욱 기자

기념사진을 부르는 구름다리다. 바위산 지능선을 연결한 붉은 난간의 구름다리는 그 모습 자체로 경이로워 누구든 사진을 찍게 만든다. 40m, 24m, 45m의 구름다리 3개를 연결한 것으로 성인 750명이 동시에 걸어도 끄떡없도록 만들었다. 바위산의 화려한 산세와 독특한 출렁다리의 모습이 어느 산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을 내어준다. 멀리 가조면 들판이 손바닥만 하게 드러나고, 코로나가 가라앉으면 색다른 경치를 즐기려는 이들로 인기를 끌 것 같다.

계곡을 따라 난 산길을 꾸역꾸역 삼키며 오르자, 이윽고 소나무와 억새가 성성한 주능선이다. 경치가 터진 곳이 많아 참고 올랐던 열매가 더욱 달콤하다. 가야할 능선길, 어지간한 국립공원은 명함도 못 내밀 수려한 암릉줄기가 어서오라 손짓한다. 놀이공원에 입장한 듯, 행복한 능선종주의 시작. 능선을 오르내릴 때마다 섭섭잖게 펼쳐지는 새로운 파노라마에 걸음걸음이 즐겁다. 정상이 가까워 올수록 놀라운 바위 거인들이 늘어나고 저마다 한 세상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은밀히 힘을 과시한다.

거친 산세에 비해 산길은 의외로 잘되어 있다. 지나치게 위험한 곳은 세운지 얼마 안 된 데크계단이 차분히 뻗어있고, 바윗길도 시간이 지체될 뿐 등반기술을 요하는 곳은 없다. 다만 걸음이 조심스런 산길이 많고, 넋 놓고 구경할만한 전망바위가 잦아 시간이 한없이 늘어난다. 이름값으로 보면 유명한 척도에 비해 과소평가 받은 산임을 실감한다.

거리두기엔 안성맞춤이라 반나절이 넘도록 사람 한 명 마주칠 수 없었다. 고도를 높일수록 가야산이 옛 왕국의 현신처럼 웅장한 산세로 솟구쳐 오르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평범한 산세의 줄기는 볼 수 없었다. 사소한 능선의 흘러내림 하나하나가 수작(秀作)이었다. 기묘한 바위 곁에는 늘 도인 같은 소나무가 궁합을 맞추고 있었고, 앙상한 철쭉 가지도 흠이 되지 못했다. 봄이 오면 얼마나 화려할지 실로 짐작하기 어려웠다.

국립공원이었으면 저마다 이름 있을 법한 기암이 모두 무명이었다.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평범한 것처럼 위장한 겸손이 풍경 곳곳에 배어 있었다. 아름다움의 척도에 비해 과포장된 관광지가 얼마나 많았던가. 기대 없이 오른 산에서 맞는 풍경의 쾌락에 자주 멈춰 곱씹으며 음미한다.

하늘에서 본 마장재 능선과 너머의 죽전저수지. 산 그림자가 가야면 일대에 깊게 드리웠다./월간산 주민욱 기자

산에서 내려다본 가조 벌판도 시선을 잡아끈다. 날카로운 산세의 능선으로 겹겹이 둘러쌓였으나 홀로 아늑한 벌판을 이루고 있어, 풍수에 관심이 없는 이도 인정할 만한 명당이다. 정상 직전에 만난 너른 터에서 찬물로 부어 먹는 전투식량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산을 오른다. 지나온 암릉줄기에 비해 정상은 의외로 소박하다. 정상 표지석은 듬직하나 정상다운 맛은 1,046m의 높이에 미치지 못한다. 맞은편의 암봉이 오히려 더 걸작이다. 그래서 산행의 정상으로 의상봉을 꼽는 이가 많다.

의상대사가 수련하였다는 거대한 암봉 의상봉으로 향한다. 산행이 어려울 것 같은 거친 바위 사이로 절묘하게 길이 나있거나 우회로가 있다. 의상봉은 ‘실크로드 릿지’라는 릿지등반 코스가 있어 바위꾼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자존심 센 도도한 통바위를 오르는 방법은 계단이다. 고도감 있는 계단으로 수직 상승하면, 폭발하는 호흡과 함께 의상대사가 이름으로 남은 정상 풍경에 이르게 된다.

열반의 경지라 할만한 탁월한 풍경, 지금껏 지나온 풍경도 좋았으나 이곳이 황금비율임을 깨닫게 되는 경치가 펼쳐진다. 멀리 덕유산 줄기가 전설처럼 아득히 범상찮은 실루엣으로 흘러간다. 우두산의 다른 이름은 별유산인데 빼어난 풍광이 유별나게 아름답다 하여 붙은 이름임을 눈으로 실감한다.

올라 온 계단을 다시 내려가 의상봉을 우회하여 고견사로 내려선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마음을 천녀고찰 고견사(古見寺)가 가라앉힌다. 신라 문무왕 7년(667년)에 의상과 원효대사가 세운 절이며, 원효대사가 이곳에 와서 전생에 왔던 곳임을 깨달았다 하여 절 이름이 유래한다. 속인의 눈에도 어렴풋이 그 깊이가 와 닿는다. 거대한 나한처럼 늘어선 전나무와 1,000년을 버틴 은행나무가 벚꽃 피고 지는 얕은 시간의 흐름을 관통하는 묵직한 무언가가 있음을 알려준다.

고도를 올리기는 힘들어도 내리는 건 금방이다. 가물어 물이 졸졸 흐르는 견암폭포를 지나자 소나무향 물씬하다. 언젠가 본 듯한 숲이다. 지나쳤던 숲인데 전생인양 아득하다.

거장 우두산 /월간산 주민욱 기자

<산행 길잡이>

비계산 혹은 가야산과 연계 산행을 하는 장거리코스가 있으나, 5월 14일까지 산불방지 입산통제 기간이라 우두산 산행만 가능하다. 원점회귀 기점인 항노화 힐링랜드(055-940-7930)는 자연휴양림과 숲치유시설을 결합한 형태이며 2월 기준 코로나로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현재는 별도 비용이 없으나 올해 상반기 중 입장료 1,000원과 주차료 1일 5,000원을 받을 예정이다.

힐링랜드에서 고견사 방면이 아닌, 우측 데크길을 따라야 Y자 구름다리를 거쳐 마장재에 닿는다. Y자형 구름다리는 찾는 이가 많아 거리두기 단계에 따라 개방여부를 정하므로, 미리 전화로 확인하는 것이 좋다. 구름다리 출입이 통제되더라도 산행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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