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서 레드우드국립 및 주립공원(Redwoods National and State Parks)까지는 멀었다. 구글링을 해보니 목적지까지 편도 1,200킬로미터. 내가 생각한 대로 보고, 걷고, 찍으려면 최소 4박 5일에 왕복 3,000킬로미터에 달할 터였다.
버거운 여행이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상투적 수사로 들리는 경우도 있겠으나, 산악인들이 자주 써먹는 표현 중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사실에 근거한다. 누가 시키면 하지 않을 일도 스스로 좋으면 등짐 가득 메고 산정을 오른다. 고생을 사서 하는 것 같지만, 신나니까 하는 것이다. 야영장 예약과 허가, 산행 동선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즐거움이 시작된다. 준비를 마치고 정임수 사진가와 101번 고속도로를 따라 캘리포니아 북쪽으로 달렸다. 4월을 맞은 산야는 컴퓨터 운영체제인 윈도 바탕화면처럼 싱그러운 초록빛이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살리나스(Salinas)시(市)에서 내렸다. 포도밭과 야채밭이 전부인 전형적 농촌도시. 구글의 위대함을 실감한다. 검색한 대로 길을 안내해 준 덕분에 초록 물감을 뿌려 놓은 예쁜 공원에 도착했다.
식탁과 바비큐 그릴까지 준비된 훌륭한 시설. 거기에 어울리지 않지만 점심 해결법은 초 간단이다. 라면 끓여 햇반 말아 먹기. 햄버거보다 뜨끈한 국물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살리나스 덕분에 캘리포니아는 ‘그린 스테이트(Green State)’라는 별명을 얻은 적이 있다. ‘세계 샐러드 그릇’이라는 허풍도 있는데, 실제로 미국 내 샐러드용 채소 60%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 증명이라도 하듯 채소밭과 포도밭이 아득하게 지평선을 이룬다.
몇 년 전 이곳에 들른 적이 있었다.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고향이기 때문. 사람들은 상추와 포도밭을 보러 이곳을 방문하지 않는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살리나스는 그저 농촌도시이다. 하지만 매해 스타인벡 축제가 열리는 사흘 동안은 다르다. 내가 찾은 것처럼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과 스타인벡 소설의 독자들이 이곳을 방문한다. 존 스타인벡 덕분이고 문화의 힘이다. 국가가 ‘내셔널 스타인벡 센터’도 만들어 주었다. 스타인벡의 대표작 중 하나가 <분노의 포도>였다. 눈앞 질펀한 포도밭에 달릴 포도가 원수라는 은유.
날것으로는 상큼하고 와인으로 숙성시키면 달달한 천국행 음료의 원료인 포도가 분노한다? 초록 포도밭 새순이 따가운 햇살을 퉁겨내는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제목. 소설은 노동자가 포도를 수확하는 고된 생활이 주제다. 종일 땡볕 속에서 포도를 따는 중노동. 일당을 벌어야 겨우 가족이 먹을 빵을 살 수 있기에 ‘분노의 포도’인 것이다.
책을 통해 저자는 자본의 탐욕과 모순을 고발하는데, 기념관엔 스타인벡 자신의 체험도 한몫했다는 설명이 있다. 레드와인 몇 병 챙긴 게 찔리지만, 야영을 천국으로 만들어 줄 숙성 포도즙을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학살 수준으로 벌목했던 그때 그 시절
‘초록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수다를 떨며 악명 높은 샌프란시스코를 지났다. 악명이라 함은 샌프란시스코의 살인적인 차량 정체를 말한다. 몇 번 당해 봤기에 안다. 각오한 대로 가다 서다를 반복한 끝에 유명한 금문교를 지났다. 교대로 운전하며 달리는 창밖 풍경은 더 싱그러워졌다. 끝없는 포도밭이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와인을 유명하게 만든 소노마 밸리(Sonoma Valley)가 가까워졌다. 소노마 밸리에서 생산된 와인은 맛이 좋다. 원조 유럽 국가들의 전통 있는 제품을 넘어섰다는 말을 믿는다. 왜? 더 비싸게 팔리고 있으니까.
내가 사는 LA와 위도가 다른 만큼 기온과 식생이 다르다. 여기는 한국과 위도가 같다. 하여 LA처럼 사막이 아니라 온대지역. 오리건주와 마주한 레드우드공원 역시 같은 기후대.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왜 레드우드가 없을까. 공룡시대부터 살고 있다는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는 과연 어떤 느낌일까? 왕복 10차선으로 시원하게 뚫렸던 101번 고속도로는 구불구불 산길로 접어들며 2차선으로 좁아진다. 이제 첫 번째 목적지 훔볼트 레드우드(Humboldt Redwoods) 주립공원이 가깝다는 말. 이곳엔 1개의 국립공원과 3개의 주립공원이 엮여 있다. 공통적으로 랜드마크인 레드우드를 이름 앞에 걸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미 레드우드에 포위되어 있다. 학교, 병원, 하다못해 도로까지도 레드우드 하이웨이.
이미 훔볼트공원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곳은 다른 국립공원처럼 공식적인 공원 입구가 없다. 고속도로가 공원을 관통하고 있어 그런지 입장료도 낼 필요가 없다. 드디어 ‘자이언트 도로(Avenue of the Giants)’ 표시판이 나타났다. 이 길은 고속도로에서 분기되어 훔볼트공원을 가로지르는 오래된 풍경도로이다. 50킬로미터가 넘는 이 도로가 유명한 건 학살이라 불릴 벌목에서 살아남은 오리지널 레드우드 숲 때문이다. 자동인 차량 헤드라이트가 갑자기 켜진다. 그만큼 레드우드 숲이 빽빽해 컴컴하다는 방증이다.
레드우드라는 이름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이곳의 나무들을 단지 키가 크다고만 표현할 수 없다. 큰 나무들은 300피트(약 100미터) 높이로 20층 건물보다 높다. 안개 자욱한 해안가에서 자라는 레드우드는 당연히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로 분류된다. 속이 붉고 가벼우면서 단단하고 불에도 강한 나무. 당연히 최고의 목재라는 입소문과 함께 각광을 받았다. 1848년에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일어났다. 미국 차이나타운 원조 격인 중국인을 포함한 전 세계 사람들이 돈 냄새를 따라 신생의 캘리포니아로 모여들었다.
당연히 집이 필요했고, 지금도 지진 때문에 선호하는 목재주택 건설이 붐을 이뤘다. 썩지 않는 장점까지 있어 벌목은 떼돈 벌기 사업이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 ‘묻지 마’ 나무사냥이 경쟁적으로 진행된다. 서부 해안을 따라 고생대부터 번성했던 레드우드 숲 면적의 95%가 간단히 사라졌다. 이건 벌목이 아니라 학살 수준이었다.
안개에서 수분을 얻는 최장신 나무
레드우드의 한국 이름은 미국삼나무. 레드우드 한 그루를 자르면 7채 이상의 목조주택과 탁자 2000개를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양의 목재가 나온다. 사람들은 발이 없어 도망도 못 가는 이 노다지 숲을 앞다투어 잘라냈다. 거의 멸종 단계까지 가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미래를 위해 생태적 관점에서 겨우 5%쯤 남은 숲을 지켜야 한다는 걸. 1968년에서야 레드우드국립공원이 지정되고 1980년에 유네스코 자연유산, 1983년에는 지구생태계보존지역이 된다.
예약했던 훔볼트주립공원 벌링턴 캠핑장에 도착했다. 다른 캠핑장은 모두 문을 닫고 유일하게 이곳만 예약을 받았다. 57개의 사이트는 만원이었고, 예약에 성공하지 않았다면 오지 못했을 여행이었다.
캠프파이어 장작을 사고 배정받은 캠프 사이트에 텐트를 세웠다. 공원에는 착한 흑곰이 우글거린다고 식탁 경고문에 쓰여 있다. 그러므로 철제 곰박스에 음식을 모두 넣고 잠그라는 말.
한낮인데도 레드우드가 하늘을 가린 탓에 어둠침침한 느낌이다. 하지만 시설은 국립공원 못지않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세식 화장실과 널찍한 사이트는 하루 35달러(약 4만원)라는 다소 비싼 가격에도 불만은 없다. 어떤 면에서는 요세미티국립공원보다 훨씬 쾌적하다.
거목 세상에 텐트를 세우니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 집처럼 작아 보인다. 나무를 스쳐갈 때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는 게 버릇이 되었다. 더 큰 걸 만나고 싶어서였다. 우리 사이트에도 나무 가운데가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한 레드우드가 있다. 그 속은 어른 대여섯 명은 들어설 정도로 공간이 넓다. 레드우드는 세쿼이아 나무처럼 소나무목(目) 측백나무과(科) 세콰이아속(屬)에 속하는 고생대 나무다. 그런데 어떻게 나무가 100미터 넘게 키를 키울까. 나무 끝까지 물을 올리려면 엄청난 파워의 펌핑이 필요할 텐데.
이 동네에는 어느 나무가 제일 큰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그 비밀을 밝혀냈다. 키가 높아질수록 물관이 전달하는 물의 높이는 제한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분의 25~50%를 안개에서 얻는다는 것.
레드우드 나무는 안개가 많이 발생하는 여름에 약 680킬로그램의 수분을 흡수한다는 수치까지 알아냈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오고, 바다가 지척이고, 아침마다 늘 안개가 피어나는 이곳이, 최대 서식지가 된 것이다. 레드우드가 열매를 맺는 주기는 보통 10년인데, 그때마다 수백만 개의 씨앗을 뿌린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씨앗의 크기다. 거목 레드우드 씨앗이라 해서 큰 게 아니고 토마토 씨 크기라는 것. 그 조그마한 씨앗에 이런 거대한 나무가 숨어 있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석유재벌 록펠러의 친환경적인 취미
새벽에 훔볼트주립공원 안에 존재하는 록펠러숲(Rockefeller Forest) 트레일로 차를 몰았다. 석유재벌 록펠러가 레드우드를 보호하려 이 일대를 왕창 사서 국가에 기증했기에 붙은 이름. 록펠러는 땅 사서 공원 만드는 게 일종의 취미생활이었다. 티톤 국립공원, 아카디아국립공원에도 통 큰 땅 기부를 했다. 한국에도 이런 재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강을 건너 지류인 불 크릭(Bull Creek)을 따라 레드우드가 울창하다. 빅 트리, 큰 나무 지역에 차를 세운 후 플랫 트레일(Flats Trail)에 나섰다. 이름 그대로 정말 황소 등처럼 평평하고 편안한 트레일. 12킬로미터 길이의 트레일 초입에 한때 제일 크다는 평가를 들었다는 톨 트리 레드우드가 보인다.
군더더기 없이 직립한 나무는, 1957년에 키를 잰 높이가 359.3피트(약 109미터)였다. 안내판은 부피와 흉고도 설명하고 있다. 지금은 바뀌었으나 2006년 이전에는 이 코스에 세계 최장신의 나무들이 떼거리로 모여 살았다. 연구에 부지런한 학자들 덕분에 제2위, 4위, 6위, 8위 키다리 나무를 록펠러 숲이 보유하고 있었던 것. 그래서 유명해졌고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높이를 재는 것도 연구고, 이름 짓는 것도, 바뀐 순위도 학자들 연구 결과일 터. 문제는 부지런한 학자들 때문에 앞으로도 등수가 수없이 바뀔 거라는 생각에 미소가 나온다.
광대한 레드우드 밀림에 개체 수가 얼마나 많을까. 한때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로 대접받았다는 톨 트리 안내판을 만나자 또 웃음이 나온다. 이제 이 나무는 등수에도 들지 못한다. 세상 제일의 나무 높이, 덩치, 수령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좋겠다. 숲은 바다처럼 넓고 나무는 모래알처럼 많으니까. 누가 시비도 못 걸게 제도적 장치도 만들어 놓았다. 1등 나무는 그 위치를 절대 비밀에 붙인단다.
2006년 8월이었다. 우리가 걷고 있는 불 크릭 트레일에서 학자들은 또 가장 높은 나무를 발견했다. 112미터 높이의 레드우드. 그 나무에 ‘성층권 거인(Stratosphere Gian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그 1등 자리는 불과 한 달의 영광이었다. 멀리 떨어진 국립공원에서 그해 9월 115미터가 넘는 레드우드가 발견된 것이다. 록펠러 숲의 세계 1등 키다리 레드우드는 그래서 졸지에 4위가 되었다. 새로 발견한 나무에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히페리온(Hyperi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걸 검증하기 위해 훔볼트대학의 과학자 팀이 높이를 측정하러 동원되었다.
레이저 측정을 못 믿는지 이들은 직접 줄자를 가지고 나무를 올랐다. 과학자 팀은 나무가 379.1피트(약 115.5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크다고 선언했다. 그걸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촬영해서 방송했다.
그때 과학자 팀은 보너스처럼 1등나무 외에 2~3등 나무도 발견해 앞서 말한 록펠러 나무를 4등으로 만들었던 것. 물론 히페리온 나무의 정확한 위치도 비밀이다. 호기심 많은 관광객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미공개한다는 것. 이름을 새기거나 등반을 시도하는 등 나무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걸 방지한다는 말. 변명같이 들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무는 발이 없으니 파파라치에게서 도망칠 수 없기는 하다.
숱한 어려움 이겨낸 아름다운 직선
불 크릭 플랫 트레일을 종일 걸으며 웃음이 가셨다. 178센티미터로 키가 큰 편이란 소리를 들었던 나는 갑자기 난쟁이가 되어 버렸다. 눈으로 보고 있어도 상상하기 힘든 거목들의 집합이다. 일직선으로 뻗은 나무 끝을 보려고 고개를 들면 레드우드 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자그맣게 드러날 듯 말 듯하다. 눈으로도 그러한데 카메라가 나무 전체를 잡을 수도 없다.
문득 여기선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 1,000년을 한자리에서 버티며 산불과 태풍 같은 만고풍상을 겪으면서도 불만을 드러낸 적 없는 나무들. 이 나무들이야말로 성자(聖者)가 아닐까. 직선으로 솟은 레드우드 앞에 서면 정치나 철학 혹은 예술 따위는 가볍고 소소한 군더더기 같다.
그러고 보면 레드우드가 빼곡한 숲은 신비로움을 넘어 영험한 기운도 차있는 것 같다. 쓰러진 거대한 나뭇등걸에선 레드우드 새끼들이 자라나고 있다. 그래서 죽은 레드우드는 유모 나무(Nursery Tree)라고 부른다. 살아 번식시킨 새끼들에게 자신이 죽어 짧게는 수십 년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레드우드는 모진 바람을 동반한 태풍을 견디려 뿌리끼리 서로 얽혀 버티는 슬기로 살아남았다. 나훈아의 노래 ‘테스형’처럼 100년도 못 사는 인간사회는 왜 이리 시끄러울까. 서로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레드우드 숲에서 나무에게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적 산불로부터 살아남으려 타닌 성분이 많은 껍질로 진화해 온 나무. 산불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나무이기에 불에 대항하는 슬기를 찾아낸 끈질긴 생명력. 나무마다 검은 숯덩이를 끌어안고 있는 걸 본다. 1,000살 넘은 레드우드 단면을 보면 숱한 불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불이 휩쓸고 지날 때마다 얼마나 아팠을까.
헛웃음이 나온다. 레드우드 걱정은 기실 인간의 설익은 주장이었다. 이 거대한 숲에서 그걸 알았다. 폭풍에 흔들리지 않고서 어떻게 레드우드가 클 수 있을까. 산불과 병충해를 이겨내지 않고서 어떻게 저토록 아름다운 직선으로 솟을 수 있을까. 해거름, 문득 큰 비밀이라도 안 것처럼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