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조차 못 했던 대범한 강도 스케일에 입이 떡 벌어진다. 몇 수 앞을 내다보며 빠르게 회전하는 주모자의 두뇌, 그가 펼쳐놓은 체스판 위에서 예측불허로 움직이는 강도들, 범인 손바닥 위에서 속수무책 놀아나는 경찰까지. 통쾌하고 속 시원한 범죄극이 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는 드라마, 넷플릭스 오리지널 ‘종이의집’이다.
어디서 이런 강도들을 훑어왔나. 대부분 강도·절도·살인 전과자에 범죄 말곤 다른 돌파구가 없는 막장 인생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다 같이 모아두면 어찌나 매력적인지. 첫 공개 당시 전체 넷플릭스 콘텐츠 중 ‘기묘한 이야기’에 이어 시청자 수 최고 2위까지 올랐고, 지난해 방영된 ‘시즌4’는 공개 28일 만에 전 세계에서 6500만명이 시청했다. 올해 스페인판 마지막 시즌이 예정돼 있고, ‘종이의집 한국판’ 리메이크도 공개된다.
◇3조원을 직접 찍어서 턴다, 역대급 강도 스케일
보통 영화 속 은행 강도들은 빠르게 현장을 장악하고 돈을 훔쳐 현장을 빠져나온다. 그러나 ‘종이의 집’ 강도들은 반대다. 도망치는 척 다시 들어와 조폐국 문을 걸어 잠근다. 이들의 목표는 최대한 오랫동안, 유혈사태 없이 조폐국을 점거하는 것. 돈을 찍어낼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조폐국 직원들과 강도들이 1초도 쉬지 않고 24시간 돈을 찍어내는 동안, 나머지 강도들은 인질을 관리하고 땅굴을 파 미리 준비해둔 은신처와 연결한다.
총 24억 유로, 우리 돈으로 3조원이 모이면 땅굴을 통해 조폐국을 빠져나와 공소시효가 끝날 때까지 호화롭게 버틴다. 누구도 피를 보지 않고, 누구의 돈도 뺏지 않고, 그저 돈을 새로 찍어 나눠 갖자는 계획. 그러면서 100여명 인질의 지지와 대중의 호감까지 원한다. 스페인의 영웅이 되어 위풍당당하게 탈출하겠단 목표를 세운다.
놀랍도록 치밀한 이 계획은 ‘교수(professor)’로 불리는 천재적인 리더가 세웠다. 그는 조폐국 안이 아닌 외부 모처에서 모든 범행 과정을 감독한다. 스페인의 행정 시스템 자동화가 이뤄지던 시기 신상정보를 갱신하지 않아 지문조회조차 안 되는 유령 같은 인간. 그는 최소 20년 간 계획을 세우고 다듬어오다, 때가 되자 강도들을 섭외해 모은다.
강도들은 서로 신분을 모른 채 도시 이름으로 불린다. 강도 15건에 사람을 죽인 주인공 ‘도쿄’, 파리 샹젤리제에서 다이아 434점을 훔쳐 수배 중인 현장대장 ‘베를린’, 광부 출신으로 굴 파기와 삽질 전문가인 ‘모스크바’, 타고난 양아치 싸움꾼 ‘덴버’, 6살부터 코딩을 시작한 해킹 천재 ‘리우’, 13살 때부터 화폐를 위조한 화폐 전문가 ‘나이로비’ 등 8명이 이 완벽한 계획에 뛰어든다.
◇그러나… ‘완벽한’ 계획은 없다
일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이 드라마의 매력은 말 안 듣는 팀원들 때문에 교수의 완벽한 계획이 조금씩 틀어지는 데서 나온다. 경찰과 언론은 교수가 미리 예측한 대로 움직이지만, 문제는 내부에 있다. 심리적 궁지에 몰린 강도들의 어이없는 반항으로 계획에 균열이 생긴다. 사실 교수도 할 말은 없는 것이, 자신들 사건을 담당하는 라켈 무리요 경감과 계획에 없던 사랑에 빠져 일을 그르친다.
보는 사람 입장에선 시즌 당 8~13회짜리 대작이지만, 극 중에선 시즌 1,2를 합쳐 고작 5일 간 벌어지는 일이다. 시간이 실제 강도 속도의 2배 정도로 흐르는 셈이다. 그런데도 전혀 지루하거나 늘어지지 않게 작품을 끌고 가는 힘은 정교한 대본과 구성에서 나온다.
시즌 1·2엔 조폐국에서 유로를 훔치는 과정을 담았고, 시즌 3·4에선 저항군이 되어 스페인 국립 준비은행의 금 95톤을 훔친다. 첫 두 시즌에서 정부가 속수무책 당했다면, 마지막 두 시즌의 정부와 경찰은 이를 갈고 임한다. 서로의 약점을 파고드는 심리전과 두뇌싸움이 본격화된다.
◇'혁명의 상징' 된 종이의 집
드라마의 상징은 붉은 색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캐릭터 ‘도쿄’의 첫 등장부터 화면은 붉은 빛으로 가득 찬다. 100여 명의 인질들이 강도들과 똑같이 붉은색 옷을 입고 조폐국을 가득 채운 장면이 시청자들 뇌리에 깊게 박혔다.
주인공들이 힘의 상징이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던 조폐국을 점거할 때, 시청자들은 그들과 함께 쾌감과 해방감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강도들이 입었던 붉은색 유니폼과 살바도르 달리 얼굴 가면이 현실에서도 혁명과 저항의 상징이 됐다.
지난해 스페인에선 수백명의 닛산(Nissan) 공장 직원들이 공장 폐쇄 항의 시위를 벌이며 ‘종이의집’ 강도들로 분장했다. 그 전엔 유럽·미국· 아시아 등 곳곳에서 살바도르 달리 가면과 붉은 옷 행렬이 이어졌다. 레바논·이라크·터키·프랑스·칠레 등의 인권 시위에도 이 가면이 등장했고, 푸에르토리코의 정치 시위에도 활용됐다.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와 환경보호, 페미니즘 등을 외치며 이 복장을 입는다.
드라마의 또다른 상징은 노래 ‘벨라 챠오(bella ciao)’다. 조폐국 바닥을 파다가 처음으로 흙이 보이고 탈출의 길이 열리는 순간 강도들은 이 노래를 부른다. 원래 이탈리아 반(反) 파시즘 저항군 파르티잔이 제 2차 세계대전 때 부른 노래인데, 75년이 지난 지금 전세계에서 저항의 상징이 됐다. 넷플릭스 인도 계정에서 올린 공식 영상은 조회수 4327만 회를 돌파했다.
◇사람들은 왜 이 강도들에 열광하나
주인공 교수는 지금껏 드라마에 등장한 적 없던 캐릭터다. 체스 선수처럼 머리가 비상하고 치밀해 모두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굴리지만. 내성적이고 사회성이 부족해 여자와는 말도 잘 못 섞는다. 누가 봐도 평범하고 선한 인상 덕에 그는 오래도록 잡히지 않고 범죄 시나리오를 성공시킨다.
그러나 사실 그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 패배감으로 가득찬 인간. 간혹 소시오패스 같은 면모도 보인다. 시청자들은 그의 이중성과 약한 고리에 공감한다. 완벽한 범죄자인 그가 인간적으로 두려움과 절망감을 느낄 때 시청자들도 그 감정에 함께 녹아든다.
교수뿐 아니라 드라마 속 모든 캐릭터가 입체적이다. 머뭇거리거나 망설이는 일 없이 솔직하고 강렬하게 분출한다. 강도들끼리 인간적인 관계를 맺지 말란 교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목숨을 건 사랑에 빠진다. 인질에게도 인간미와 허술함을 한껏 드러내며 친밀감을 쌓는다. 마음껏 이입할 수 있는 살아있는 캐릭터들이야말로 드라마 성공의 비결이다.
최근 공개된 드라마 한국판 캐스팅에서 주인공 ‘교수’ 역은 배우 유지태가 맡는 것으로 전해졌다. 리더 베를린 역엔 배우 박해수가 물망에 올랐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주인공 도쿄 역엔 배우 전종서, 경찰 라켈 무리요 역에 배우 김윤진 이름이 오르내린다. 이대로만 된다면 누구 하나 부족함 없는 초호화 캐스팅인데, 최근 배우 겸 모델 장윤주가 ‘나이로비’ 역에 캐스팅됐단 소문이 들려온다.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이자 극 후반부로 갈수록 강렬한 감정 연기가 필요한 역이라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캐스팅은 악역에 가까운 인질, 조폐국 국장 ‘아르투로’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어떤 캐릭터보다 찌질하고 한심하다. 외모는 국내 배우 최민식 닮은꼴로 유명하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반영된 추악한 인물인데, 누구든 연기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벨라챠오’ 대신 무슨 노래가 등장할지도 관심사다. ‘아리랑’만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개요 드라마 l 스페인 l 시즌3, 회당 8~13회
등급 19세 이상 관람가
출연 우르술라 코르베로, 알바로 모르테, 페드로 알론소 등
특징 긴장감, 박진감, 범죄
평점 로튼토마토 시즌 1~3 100% ㅣ 시즌 4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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