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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래는 너무 좋아서 영원히 나만 알고 싶다. 그러나 좋은 노래는 물처럼 흘러 결국 많은 사람들 마음에 가 닿는다. 개개의 청자에게 가 닿을 뿐 폭발적으로 확산되지 않는다. 그러기엔 공장에서 찍어내는 음악과 그 음악을 남이 시키는 대로 춤추며 부르는 가수들이 너무 많다. 소음과 발작의 혼돈 속에서 물처럼 흐르는 노래는 끝내 조용히 바다에 다다른다.
소히(Sorri)가 2009년 발표한 노래 ‘산책’은 백예린이 부르기 전까지는 거의 아무도 모르는 노래였다. 유튜브 재생 수만 봐도 소히가 부른 노래는 10년간 9만 몇천 건을 기록했을 뿐인데 재작년 올라온 백예린 버전은 200만건에 육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히의 ‘산책’이 압도적으로 그리고 독보적으로 좋다. 소히는 자신의 본명 최소희와 비슷한 포르투갈어 ‘Sorri’를 찾아내 예명으로 쓴다.
바이올린과 콘트라베이스에 이어 어쿠스틱 기타가 보사노바 전주를 시작하면 리버브가 전혀 없는 소히의 노래가 시작된다. 리버브(reverb)란 노래에 잔향을 입혀 울림을 주는 기술인데, 이것이 어울리는 곡이 있고 오히려 쓰지 않아야 노래 맛이 사는 경우가 있다. ‘산책’은 후자의 경우다.
이 노래는 한국 최고의 발라드 작곡가 중 한 명인 이한철 곡이다. 당시 소히 앨범의 프로듀서였던 이한철은 앨범 전체의 템포나 강도를 봤을 때 보사노바풍 발라드가 한 곡 정도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이한철은 그런 곡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그런 곡을 써내는 작곡가다.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그런 곡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뒤 그런 곡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며 군청색으로 밝아오는 동쪽 하늘에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가사는 소히가 썼다. 이 가사가 노래를 보석으로 만들었다. “한적한 밤/ 산책하다 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얼굴”로 시작한 노래는 “보고싶어라/ 그리운 그 얼굴/ 물로 그린 그림처럼 사라지네”에서 정점을 찍는다. 어떤 얼굴이기에 물로 그린 그림처럼 사라질까. 이 부분을 되풀이해 듣다보면 돌아가신 엄마 생각도 나고 고백하지 못했던 옛사랑도 생각나고 병을 얻어 먼저 떠난 친구도 생각난다. 장조의 노래를 들으며 이렇게 울컥하기는 쉽지 않다.
한적한 밤 홀로 산책하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다. 나 어젯밤 혼자 산책했고 외롭지 않은데,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산책이 아니고 운동이었다. 아니면 저녁을 너무 많이 먹었거나. 노래는 “오늘도 그 사람을 떠올리려/ 산책을 하네”로 끝을 맺는다. 산책을 해야만 그 사람이 생생하니 오늘 밤도 혼자 산책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히가 그리워하는 사람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다. 그러나 이 노래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누구나 “가로등 빛 물든 진달래꽃” 향기를 같이 맡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쏙 들어앉아있던 그 눈동자”를 가진 그 사람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사운드클라우드에서 들을 수 있는 백예린 ‘산책’은 소히보다 키를 반음 올렸는데도 저음에서 불안정하다. 물론 저음을 일부러 악보대로 부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악보대로 부를 때 가장 좋다. 백예린의 프로듀서이자 이한철의 건반주자였던 고형석은 아마 백예린의 버석한 음색과 이 노래가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공을 들여 편곡하고 녹음해 정식 발표하는 것도 좋겠다.
이한철은 4년 전 이 노래를 녹음해 발표했다. 공연 때 불러보니 반응도 좋고 또 부르기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한철의 ‘산책’도 소히의 노래처럼 아는 사람만 알고 있었다. 백예린이 소셜미디어에서 인기를 끌면서 그녀의 ‘산책’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이제 이한철이 이 노래를 부르면 백예린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대중음악의 운명이란 이렇게 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