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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들국화 최고의 노래인 동시에 들국화 곡이 아니다. 들국화가 해체된 뒤 전인권과 허성욱이 ‘추억 들국화’란 이름으로 낸 앨범 수록곡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3년 들국화 재결성 당시 나온 일종의 베스트 앨범에 실렸으니 들국화가 자신들의 노래로 인정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그것만이 내 세상’이나 ‘행진’ 같은 노래들보다 인정받지 못했다. 창작곡이 아니라 외국곡을 재편곡하고 개사한 번안곡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서양 음악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번안곡은 일종의 장르처럼 쏟아졌다. 쎄시봉 시대 히트곡 상당수가 번안곡이었으며 송창식과 윤형주로 이뤄진 트윈폴리오가 부른 아름다운 노래들도 대부분 번안곡이었다.
들국화 ‘사랑한 후에’는 그러나 원곡을 뛰어넘는 최고의 번안곡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원곡인 알 스튜어트의 ‘The Palace of Versailles’를 들어보면 즉각 알 수 있다. ‘사랑한 후에'는 평범한 영국 포크록을 불멸의 록발라드로 재탄생시켰다. 1985년 데뷔한 들국화는 두 장의 앨범을 내고 1987년 해체됐는데, ‘사랑한 후에’는 바로 그 해 녹음된 노래다. 전인권이 서른 세살 때이니 목청이나 뱃심이 전성기일 때다.
기차가 레일 위를 지나가는 철커덕 소리가 몇 번 난 뒤 키보드 전주가 이어지고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하고 전인권이 노래를 시작한다. 이 첫 소절에서 전인권은 알 스튜어트를 바로 찜쪄먹으며 압도한다. 첫 음 ‘긴’이 가온다에서 2옥타브 솔이다. “긴 하루 지나고”의 음표는 “솔 솔솔 솔솔#솔”이다. 그런 음들을 전인권은 망치로 정 대가리를 여섯번 명중시키듯 부른다. 양궁 선수가 앞서 쏜 화살을 여섯번 연속으로 쪼개며 과녁 한 가운데를 꿰뚫는 격이다.
이런 고음 소절을 저렇게 안정적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몇 명 없다. 음악을 틀고 소리내서 따라 불러보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이 정도 고음의 연속을 안정적으로 소화하는 것은 국립합창단 테너 파트 단원들에게도 버겁다. 아마 전성기의 이승철과 김건모 정도가 낼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소절 마지막 “에”에서 음이 흔들리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것이 전인권 식 비브라토이다. 이 야성의 보컬리스트는 고음에서 일부러 소리를 찌그러뜨려 특유의 탁하면서 애절한 느낌을 만들어 낸다.
전인권은 노래 중반 “이젠 잊어야만 하는” 소절에서 무려 2옥타브 라#까지 올린다. 두 단계만 더 올라가면 ‘하이C’, 즉 파바로티의 경지다. TV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남자 아이돌 가수 중에서 2옥타브 근처만 핥고 내려와도 초고음이 어떻다는 둥 호들갑인데, 가소로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고음도 고음이지만 원곡보다 훨씬 느리게 편곡하면서 가사에 맞게 어둡고 무거운 노래로 만든 것이 이 곡이 원곡을 능가한 이유다. 알 스튜어트는 최고 히트곡 ‘Year of the Cat’에서도 그렇듯이 노래를 코와 목으로 부르는 가수다. 그는 번안을 허락하면서도 한국의 사자머리 가수가 자신의 고양이 같은 노래를 뱅골호랑이로 바꿔놓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들국화가 라이브에서 앙코르로 즐겨 불렀던 ‘He Ain’t Heavy, He’s My Brother’는 원곡 가사와 우리말 가사가 섞인 ‘반 번안곡’이다. 아마도 들국화가 활동을 좀 더 오래 했다면 정규 앨범에 실렸을 것이다. 들국화 유일의 라이브 앨범에 실린 이 노래도 원곡자인 영국 밴드 홀리스의 노래와 사뭇 다르다.
홀리스처럼 들국화도 삼중창 파트를 넣은 걸로 봐서, 일부 개사만 하고 재편곡은 거의 하지 않은 단계인 것으로 보인다. 전인권은 이 노래 시작 부분에서 박자를 놓쳐 처음부터 다시 부르는 과정까지 음반에 넣었다. 원곡에서 엘튼 존이 쳤던 피아노 도입부가 나오자 소녀 팬들이 들국화를 향해 환호성을 지른다. 팝송밖에 들을 게 없었던 소년소녀들이 우리 대중음악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