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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한국 대중음악계 최고의 스타는 20대 아이돌이었던 남진과 나훈아였다. 나훈아는 정통 트로트의 맥을 이어가는 혜성이었고 남진은 엘비스 프레슬리 류의 로큰롤을 내세웠다. 당시 비주류 음악계에서는 ‘세시봉’으로 상징되는 포크 뮤지션들이 새로운 음악을 내놓고 있었다. 송창식·윤형주·김세환과 조영남이 그 대표주자였다면 한대수는 밥 딜런 류의 포크록을 구사하는 이단아였다.
그리고 그 해, 양희은이 ‘아침이슬’을 타이틀곡으로 데뷔 앨범을 냈다. 양희은의 노래는 이전 한국 여가수에게서는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이었다. 비브라토를 완전히 제거한 ‘합창단 창법’이었고, 이미자의 애절한 노래와 패티김의 성악 창법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양희은 데뷔 앨범에는 총 10곡이 실렸는데, 그 중 7곡이 외국곡이었다. 나머지 3곡 중 아침이슬과 그날, 두 곡이 김민기가 써준 곡이었다. 김민기도 그 해 ‘아침이슬’이 실린 데뷔 앨범을 냈으나 양희은이 부른 노래가 훨씬 널리 알려졌다.
김민기 ‘아침이슬’이 50주년을 맞았다. 후배들이 김민기의 노래들을 새로 녹음해 음원으로 발표하고 곧 CD와 LP로도 발매한다고 한다. 이 노래는 김민기가 서울대 미대 재학 시절 쓴 것이다. 도·미·솔이 주 화음인 다 장조 노래인데도 첫 음을 파로 시작한 파격, 도입·전개 파트를 후렴 이후에 다시 쓰지 않고 마치 다른 노래로 이어지는 듯한 마무리가 당시 유행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구성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때부터 김민기는 노래극 또는 뮤지컬 구성의 음악을 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50년이나 애창되는 이 노래의 생명력은 그러나 가사에 있다. 사랑 타령도 아니고 뜬구름 잡는 미사여구도 없다. 딱히 정치적인 메시지는 없지만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나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같은 가사는 얼마든지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그래서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막연한 연대감을 불어넣는다. 김민기는 이 곡은 물론이고 자신의 음악 작업을 한 번도 정치적으로 해석해 말한 적이 없으나, 1987년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노제에서 100만 명이 ‘아침이슬’을 부르는 광경을 보고 ‘이건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미대를 나왔으나 그림을 그리지 않고 수많은 명곡을 썼으나 노래를 부르지 않는 김민기는 젊은 시절을 농부와 광부, 잡역부로 일하며 살았다. 그리고 1990년대부터 ‘학전 소극장’ 대표로 일하며 김광석을 비롯한 가수와 황정민 같은 배우들을 발굴했다.
김민기의 히트곡은 대부분 양희은을 통해 알려졌지만, 김민기가 부른 노래만의 매력은 양희은 이상이다. 그는 자신의 저음을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잘 가오’ 같은 노래는 김민기 저음의 매력을 한껏 들려준다. 한 옥타브 아래 솔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따라 불러보면, 그가 얼마나 탁월한 베이스인지 알 수 있다. “잘 가시오 친구여/ 부디 안녕히”로 끝나는 마무리에서 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가창력도 안정되게 타고 났다.
김민기는 ‘개똥이’ ‘우리는 친구다’ 같은 어린이 뮤지컬을 제작할 만큼 어린이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뮤지컬과 상관 없이 ‘인형’ 같은 동요풍의 노래도 만들었다. 아이와 듀엣으로 부른 이 곡에서 그는 “아가옷을 입힐까/ 색동저고리 입히지/ 치만 뭘로 할까/ 청바지로 하지” 하고 노래하는데, 이런 가사도 우스꽝스러운 권력을 풍자한 것으로 해석되곤 했다.
김민기 곡에 고은이 노랫말을 붙인 ‘가을편지’는 김민기 노래의 서정을 대표한다. 기타 한 대와 사람의 목소리로만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라니, 김민기를 저항음악의 대부로 만들어 정치적으로 활용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옹색하게 만드는 노래다.
김민기의 말대로 그의 노래들은 이미 그의 품을 떠났으므로,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것은 듣는 사람의 몫이다. 그러나 특정 정치세력이 그의 음악을 너무 오랫동안 등록상표처럼 독점해왔다. 김민기는 민예총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정치 집회 연단에 오른 적도 없다. 노래 만든 이는 묵묵히 생활인으로 살아왔는데, 엉뚱한 자들이 그 노래를 이용해 과실을 모두 따먹었다. ‘아침이슬’은 희대의 명곡이고 그 50주년도 의미가 깊다. 그러나 김민기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스밍 List!] ☞조선닷컴(chosun.com/watching)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