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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을 듣다 보면 스무살 때 천재로 통용됐다는 말이 실감날 뿐 아니라 지금도 그 천재성이 녹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최근 몰아치듯이 새로운 사람들과 프로젝트 작업을 하고 새 앨범들을 내놓는 걸 보면 창작의 열의가 전혀 식지 않은 듯하다. 사실 창작열이 뜨겁다고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대중음악의 경우, 돈도 사랑도 인간관계도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 시기, 특히 20~30대에 불 같은 작품이 뿜어져 나온다. 오십줄에 들어선 김현철이 여전히 새로운 멜로디와 가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은, 비트코인에 돈을 댔다가 쫄딱 망하거나 하는 의외의 충격적 사건을 겪은 게 아니라면,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간접 경험을 해온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가 최근 내놓은 11집 ‘City Breeze & Love Song’은 아마도 요 몇 년 새 김현철에게 붙여진 ‘한국 시티팝의 원조’라는 이름에 대한 화답일 터이다. 사실 시티팝이란 장르는 없고 일종의 음악 스타일이 있다. 1970년대 말 일본에서 생겨나 80년대에 인기 끌었다. 소프트록이나 R&B, 펑크(funk) 같은 장르 음악을 차용해 기존 음악 작법과 다른 느낌을 준 세련된 음악을 그렇게 불렀다. 후렴이 딱히 두드러지지 않고 멜로디 진행을 예상하기 쉽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시티팝의 제왕’이라 불린 다츠로 야마시타가 대표적인 뮤지션이다.
여하튼 김현철 타이틀곡 ‘City Breeze & Love Song’은 관악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키보드로 양념을 쳐 만든 곡이다. 도시의 소음으로 시작해 “뭔가 복잡한 도시 속/ 네가 있어 참 다행이야” 하는 가사, 간주에서 등장하는 복고풍의 색소폰 독주, 가성으로 일관하는 코러스까지 마치 ‘시티팝을 원하면 시티팝을 들려줄게’ 하는 듯하다. 이 음반 전체에서 주의 깊게 들어야 할 파트는 드럼이다. 한국 재즈 드럼의 원탑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닌 이상민이 언젠가부터 김현철과 작업을 하고 있는데, 믹싱 과정에서 그 비중을 줄이긴 했으나 이른바 시티팝의 펑키한 느낌을 제대로 살리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김현철 옛 곡들이 느닷없이 시티팝 열풍에 올라탄 것은 2018년 죠지라는 뮤지션이 리메이크한 김현철 데뷔 앨범 수록곡 ‘오랜만에’ 영향이 컸다. 김현철 스무살에 앨범 전체를 작사·작곡하고 프로듀싱까지 한 데뷔작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는 ‘춘천가는 기차’이지만, ‘오랜만에’나 ‘동네’는 퓨전 재즈 영향이 짙게 느껴지는 곡들이다. 원곡 ‘오랜만에’ 중간에 등장하는 기타 솔로만 해도 당시 세련된 음악으로 받아들여지던 퓨전 재즈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죠지의 리메이크작은 이 노래에서 시티팝 요소를 발견해 그 쪽으로 편곡을 극대화한 결과물이다.
김현철은 봄여름가을겨울 만큼이나 퓨전 재즈를 자신의 음악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는데, 그 대표곡이라고 할 연주곡이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이다. 1989년 데뷔앨범에서 춘천행 기차를 탔던 그는 93년 앨범에서 돌연 횡계에서 돌아온다. 이 곡에 참여한 뮤지션은 조동익 김광민 정원영 손진태 김민기 등으로 당시 최고의 세션 연주자들이었다. 지금 들어봐도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손에 꼽힐 만한 연주곡이다. 횡계는 강원도 평창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춘천처럼 대중교통이 좋지 못하지만 스키장이 밀집돼 있다. 이 곡을 듣다 보면 말끔하게 샤워한 뒤 스키 장비를 트렁크에 싣고 자동차를 몰아 서울로 오는 느낌이다. 93년에 스물 네살 김현철은 이런 곡을 썼던 뮤지션이었다.
김현철은 박학기나 이소라 히트곡도 여럿 작곡한 사람 답게 출중한 멜로디 메이커이기도 하다. 재작년 앨범 ‘돛’에 실린 노래 ‘꽃’은 일종의 소품이면서 김현철의 멜로디 센스를 금방 알 수 있는 노래다. “꽃은 절대 알 수 없는 게 있지/ 피어 있을 땐 자신이 꽃이라는 걸” 부분이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다. 이런 멜로디는 작곡 도중에는 절대로 생각나지 않는다. 추측컨대 김현철은 이 부분 멜로디를 먼저 떠올리고 앞뒤 멜로디를 붙였을 것이다.
스무살에 데뷔해서 30년 넘게 여전히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고 프로젝트를 내놓는 뮤지션이 있다는 것은 한 나라의 복이다. 한국처럼 음악 안 들어주고 사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김현철처럼 연예계에 비굴하게 기생하지 않으면서 대중음악이란 무형의 시스템을 지탱해 가는 뮤지션들에게는, 정부 예산을 지원하지 못하겠다면 훈장이라도 줘야 한다. 그것이 문화부라는 정부 기관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세금을 내는 이유다.
[지난 스밍 List!] ☞조선닷컴(chosun.com/watching)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