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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예전 노래를 재조명하는 현상이 늘었다. 그런 종류의 TV 프로그램도 많아졌고 30~40년 된 노래들을 다시 불러 발표하는 일도 잦다. 음악 그 자체보다 스타일이나 트렌드를 유행시키는 것이 2020년대 세계 대중음악의 대세다. 그런 흐름 속에서 자연히 생기는 피로감 같은 것이 음악 그 자체에 몰두했던 예전 뮤지션들을 불러내는 것 같다.
인디 레이블인 루비레코드에서 ‘현이와 덕이’의 싱어송라이터 장덕 트리뷰트 음반을 LP로 내놓는다고 한다. ‘현이와 덕이’는 남매지간인 장현과 장덕의 듀오로, 1978년 첫 음반을 내고 1980년대 중반부터 활발히 활동했던 팀이다. 이 듀오의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는 여동생인 장덕이었다. 그녀는 솔로 뮤지션으로 왕성하게 무대에 서던 1990년 스물아홉 나이에 약물 쇼크로 숨져 음악계에 큰 충격을 줬었다. ‘현이와 덕이’는 1970년대 미국의 인기 남매 듀오 ‘카펜터즈’의 여동생 캐런 카펜터가 33세에 일찍 숨진 것에 비유해 ‘한국의 카펜터즈’라는 별명도 얻었다.
장덕 노래 중 가장 큰 히트곡은 ‘현이와 덕이’로 1985년 발표한 댄스곡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다. 이 노래는 당시 나이트클럽에서 틀어주던 몇 곡 안되는 한국 노래 중 하나였다. 쉬운 멜로디와 리듬 덕분에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나, 베이스와 키보드 사운드를 들어보면 미국에서 음악 유학을 하고 돌아온 장덕의 펑키한 편곡 실력을 엿볼 수 있다. ‘현이와 덕이’를 중단하고 솔로로 활동하다가 슬럼프에 빠졌던 장덕은 이 노래를 오빠와 함께 이중창으로 부르면서 다시 대중음악 정상을 탈환했었다.
장덕은 중학생 때 ‘소녀와 가로등’이란 노래를 작곡했다. 이 노래는 송창식의 중개로 무명가수였던 진미령이 부르게 됐는데, 그녀는 이 노래로 MBC 서울가요제에 나가 입상하게 된다. 이 노래 도입부의 파격적 코드와 멜로디 구성을 보면 장덕의 비상한 창작력을 알 수 있다. 장덕은 10대 때 이미 오빠 장현과 ‘현이와 덕이’를 결성해 영화 사운드트랙을 작곡했고 남긴 곡들만 200여곡에 이른다. 어려서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던 장덕은 1983년 미국 유학길에서 돌아온 뒤로는 음악에 전념했으나, 슬럼프에 빠지자 다른 밴드의 리더로 활동하던 장현이 동생과 재결합해 ‘현이와 덕이’로 다시 활동했다.
재결합 후 장덕 최고의 노래가 탄생하는데, 바로 이은하가 부른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다. 1986년 이은하가 발표한 이 노래는 기타와 키보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전주부터 심상치 않은 노래로, 10년간 톱 가수 자리에 머물렀던 이은하가 마지막으로 히트시킨 곡이다. 발표 당시엔 ‘노래 제목이 무척 길다’는 것으로도 화제를 불렀다. 장덕은 전성기 때 동료 여가수들에게 곡을 많이 줬다. 영결식 당시 영상을 보면 동료 가수들이 “나한테 좋은 곡 준다고 약속했는데…”하며 흐느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89년 장덕은 ‘예정된 시간을 위해’라는 노래를 발표했고 그해 오빠 장현은 설암 판정을 받는다. 오빠 간호를 하며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장덕은 이듬해 2월 4일 서울 마포구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열흘 여 전만 해도 TV 무대에 섰던 그녀였기에 팬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후 ‘예정된 시간을 위해’의 가사 중 “나 이제는/ 나의 길을/ 가야만 하네/ 아직/ 모르는 곳이지만/ 너를 두고/ 가려 하네” 같은 내용 때문에 죽음을 예견했다는 둥, 사고사가 아니라 자살이라는 둥 루머가 나돌았다. 오빠 장현은 장덕이 숨진 6개월 뒤 역시 암으로 별세해 남매 가수의 비극적 운명을 많은 팬들이 애도했다.
장덕은 TV 위주로 활동한 가수였고 ‘우리들의 고교시대’를 비롯한 하이틴 영화에 출연했으며 숨지기 직전에도 TV 드라마에 등장했다. 그런 동시에 한국 대중음악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계보를 이끌었던 출중한 뮤지션이었다. 살아있었다면 그녀는 올해 환갑을 맞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또 어떤 음악을 들려줬을지 무척 궁금하다. 그런 궁금증을 여지껏 품고 있는 팬들이 많기에, 숨진 뒤 3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음악적 헌정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스밍 List!] ☞조선닷컴(chosun.com/watching)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