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시절 체벌 때문에 국가대표팀을 뛰쳐나갔던 광수(왼쪽)는 코치가 돼 자신이 키우는 선수를 때리면서 지도하고 있다. /영화 '4등'

논란 속에 시작한 올림픽이지만, 스포츠의 힘은 위대했다. 도쿄 올림픽을 통해 전 국민이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 몰입하는 재미에 푹 빠져들고 있다. 접전 끝에 한일전 승리를 이끈 여자 배구,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준 한국 양궁은 코로나로 지친 일상에 단비 같은 재미를 선사했다. 메달은 따지 못했어도, 세계 무대에서 대단한 활약을 보여준 수영선수 황선우나 높이뛰기선수 우상혁도 인상적이었다. 메달을 떠나 활약 그 자체에 열광하는 국민이 많아졌다는 것도 실감했다.

하지만 여전히 금메달을 따지 못했을 때는 ‘실패’라고 치부하는 분위기도 심심찮게 보인다. 우리나라 안창림 선수가 유도 동메달을 땄을 때 한 방송사 캐스터 입에서 “우리가 원하던 메달 색은 아니지만”이라는 말이 무심코 나왔던 것처럼 말이다. 비단 스포츠뿐만이 아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은연 중에 퍼져 있다. 그런 1등주의에 대해 묵직한 경각심을 울리는 작품이 바로 영화 ‘4등’이다.

지난달 29일 열린 수영 100m 결승에서 황선우(왼쪽)는 47초82로 5위를 기록했다. 금메달은 미국 케일럽 드레슬에게 넘겨줬지만, 기록으로는 1952년 이후 아시아 최고 성적을 냈다. /스포츠조선

◇”엄마는 정말 내가 맞아서라도 1등만 하면 좋겠어?”

12살 준호(유재상)는 수영을 좋아하고 재능도 있지만, 성적은 만년 4등이다. 준호를 수영으로 대학 보낼 생각인 극성엄마(이항나)에겐 턱없이 부족한 성적이다. 엄마는 결국 ‘때리긴 하지만 성적은 확실히 올려주는’ 문제적 코치 광수(박해준)에게 준호를 맡기게 된다. 광수는 한때 아시안게임 금메달 유망주였지만, 제멋대로 굴다가 코치진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대표팀을 뛰쳐나갔던 비운의 인물이다. 폭력을 못 견디고 뛰쳐나갔으면서 정작 자신이 폭력을 휘두르는 코치가 된 것이다.

광수는 준호를 때린다. 그러면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때로는 간절함을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때로는 승부욕을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엄마는 이를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준호의 성적이 눈에 띄게 올라가는 게 보였기 때문. 엄마는 준호 몸에 멍이 드는 것보다 4등으로 ‘노메달’에 그치는 걸 더 무서워한다. 준호가 수영 대회에서 0.02초 차이로 2등을 차지하자, “거의 1등이야! 거의 1등”이라며 기뻐한다. 준호도 내심 메달을 얻고 기뻐한다.

수영코치 광수(왼쪽)는 선수 시절 코치에게 체벌을 당하다가 국가대표팀을 제 발로 뛰쳐나간다. /영화 '4등'

하지만 매 맞는 아이의 심정이 어찌 괜찮을 수 있을까. 준호는 ‘수영을 하려면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준호가 폭행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문기자 아빠가 개입해 보지만, 아빠도 아들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자신의 욕망을 강요하는 듯한 엄마는 준호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맞고 싶지 않아서 수영을 그만두겠다고 어렵게 고백하는 준호에게 엄마는 “네가 무슨 권리로 수영을 그만두느냐. 엄마가 너보다 더 열심히 했는데 무슨 권리로”라며 울부짖는다. “엄마는 정말 내가 맞아서라도 1등만 하면 좋겠어? 내가 1등만 하면 상관없어?”라는 물음에는 끝내 대답하지 못한다.

문제는 준호도 수영을 하고 싶어한다는 거다. 좋아하는 데다 재능까지 있는데, 이대로 수영을 그만둔다면 후회는 없을까. “수영이 너무 좋은데, 수영을 하려면 1등을 해야 하니까”라고 말하는 12살 아이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렇다고 좋아하는 수영을 다시 하려면 자신을 때리는 폭력 코치에게 돌아가는 게 답일까. 영화는 계속해서 무거운 질문들을 던진다.

수영 대회 금메달을 향해 선수들이 치열하게 헤엄치고 있다. /영화 '4등'

◇깨알 디테일이 살린 영화의 맛

‘4등’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인권 영화다. 영화 ‘은교’(2012), ‘유열의 음악앨범’(2019) 등을 연출한 정지우 감독이 연출했다. 그는 이 영화를 상업성 부담 없이 ‘마음껏’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의 소재는 수영이지만, 정 감독은 국가대표를 지낸 여러 종목 체육인들을 인터뷰해 시나리오에 반영했다고 한다. 엘리트 스포츠 교육의 강압적인 분위기나 폭력을 선수를 위하는 애정으로 합리화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해 냈다. 비록 훈련 때는 실컷 때리지만, 끝나고 핫도그를 사주거나 직접 마사지를 해주며 이런저런 인생 얘기를 들려주는 코치의 모습에서, 혼란을 느끼지 않을 선수가 어디 있을까.

준호는 사실 수영장 밑바닥에 비친 불빛이 예뻐서 수영을 좋아하게 됐다. /영화 '4등'

극성 엄마와 형제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도 일품이다. “왜 내 옷을 입느냐”는 형의 으름장에, 투덜대면서도 그 자리에서 옷을 훌렁 벗어버리는 동생이나, 아들들이 몰래 컴퓨터 했는지 확인하려고 컴퓨터 본체에 손을 올려 온기를 확인하는 엄마의 모습은 ‘깨알 디테일’로 유명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떠올리게 했다. 영상미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수영 레이스에 몰입하는 모습을 마치 물 속에서 경기 따윈 상관 없다는 듯 유유히 흘러다니는 모습으로 묘사한 장면은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었다.

자녀를 미래의 올림픽 스타로 키우고 싶은 부모에게 이 작품을 추천한다. 어떻게든 자녀가 반에서 1등 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은 부모에게도 추천한다. 혹은 자녀가 있든 없든,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목적지향적인 가치관이나 1등 만능주의에 염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준호가 출전한 수영 대회를 지켜보고 있는 준호 엄마와 동생. /영화 '4등'

개요 스포츠 l 한국 l 2015년 l 1시간56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특징 우리는 꼭 1등에만 집착해야 할까

평점 IMDB ⭐ 7.2/10 네이버 관람객 평점 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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