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 버튼을 누른 뒤, 읽어보세요.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큰 인기를 끌면서 음악감독을 맡은 정재일도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정재일은 영화 ‘기생충’의 음악도 맡았기 때문이다. 두 작품이 짧은 기간 내에 연달아 세계적 호평을 받은 것은 정재일의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런 작품을 만든 감독들이 정재일을 택했기 때문이다.
천재는 때로 원심력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해 궤도를 벗어나 버린다. 정재일은 음악적 재능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일찌감치 대중에게서 멀어졌다. 초등학교 때 첫 밴드를 결성하고 열여섯살에 서른여덟살 형들과 함께 활동했으며 이후 클래식과 국악 쪽으로 옮겨가면서 대중과의 접점을 비켜나가 다른 궤도를 돌기 시작했다.
▼정재일 - Way Back Then
‘오징어 게임’의 상징적 음악인 ‘Way Back Then’을 들어보면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리듬은 단순하고 리코더 소리는 매우 거칠게 시작한다. 곡 중반에 다시 나오는 리코더를 들으면 초반부에 일부러 거칠게 분 것임을 알 수 있다. 단순한 리듬은 3·3·7 박수에서 따온 것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온갖 옛 놀이들에서 초등학교 운동회를 연상해 내고,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3·3·7 박수를 치며 응원하던 모습을 떠올려 곡의 모티브로 삼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 살 때 처음 피아노에 앉은 정재일은 아홉살에 기타를 잡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음악잡지에 구인 광고를 냈다. “영국 헤비메탈 밴드 카르카스 같은 음악을 하려고 한다. 베이스·드럼·보컬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보고 전화한 사람들은 정재일이 초등학생인 것을 알고는 “장난하지 말라”며 화를 냈다. 할 수 없이 정재일은 중3이라고 속여 멤버들을 구해 밴드를 시작했다. 카르카스의 음악을 들어보면 초등학교 6학년 때 정재일의 기타 솜씨가 어느 수준이었을지 가늠할 수 있다.
▼CARCASS - Unfit For Human Consumption
1998년 한국의 수퍼밴드로 불렸던 ‘긱스’가 결성됐다. 한상원(기타) 정원영(피아노) 강호정(키보드) 이적(보컬) 이상민(드럼) 같은 말 그대로 쟁쟁한 멤버들이 모인 밴드였다. 이 밴드에서 정재일이 베이스를 쳤다. 한상원·정원영은 정재일보다 스물 두 살 위다. 첫 음반에서 베이스를 연주한 정재일은 2000년 발표된 2집에서는 베이스·기타·피아노·퍼커션·턴테이블·톱 연주·시퀀싱·샘플링·보컬을 맡았다고 라이너 노트에 기록돼 있다. 그는 작곡가들로 넘쳐나는 이 밴드에서조차 몇 곡을 썼는데 1집 첫 트랙 ‘노올자!’(☞듣기: 조선닷컴)가 그가 쓴 곡이다. 이 노래 중간(1:08)에 “신사 숙녀 여러분” 하며 맹한 얼굴로 밴드 소개를 하는 아이가 정재일이다.
2003년 정재일은 자신의 첫 솔로 앨범 ‘눈물꽃’을 냈다. 천재 소년의 데뷔작에 대중음악계 이목이 집중됐고 평단의 호평도 이어졌지만, 이미 정재일은 대중과 한참 멀어져 있었다. 작사·작곡은 물론 오케스트라 편곡까지 해낸 그는 수록된 11곡 가운데 단 한 곡도 빼놓을 수 없는 대단한 작품을 만들었으나 유행가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었다. 대중음악에 쓰이는 악기를 연주할 뿐, 대중음악을 할 생각은 아예 없었던 것이다. 당시 타이틀곡 ‘눈물꽃’은 이 고집 센 천재가 이후 걸어갈 고독한 길에 바치는 송가처럼 들린다.
▼정재일 - 눈물꽃
정재일은 데뷔 전부터 영화음악에 작곡이나 연주로 참여했다. 소규모 영화에 주로 참여하던 정재일은 영화 ‘해무’에서 봉준호 감독의 선택을 받았다. 봉준호가 기획한 이 영화에 이어 ‘옥자’ ‘기생충’의 음악도 정재일이 맡게 됐다.
기생충 O.S.T 가운데 ‘믿음의 벨트’는 오케스트레이션을 사용한 정재일의 원숙한 작법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음악엔 동시에 봉준호의 느낌도 물씬하다. 기존 가정부를 결핵환자로 몰아 내쫓는 이 시퀀스는 봉준호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대목이었다. 음악은 영화 전반부의 피날레 느낌을 줘야 했다. 이 시퀀스는 영화 편집 때도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라고 한다.
▼정재일 - 믿음의 벨트
정재일은 2015년 국악인 한승석과 함께 ‘바리’라는 앨범을 내기도 했고 지난 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헌정하는 앨범 창작을 위촉받아 내면서 제목을 ‘시편(Psalms)’이라고 지었다. 두 앨범 모두 소리를 제대로 내주는 오디오 앞에 앉아 작정하고 감상해야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이다. 그렇기에 지금 그의 앨범을 대중이 접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가 음악을 맡은 영화가 관객을 끌어모으는 방법 밖에 없어보인다.
그의 음악을 듣다 보면 문학과 미술과 무용과 역사가 녹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골방에서 머리를 싸매 지어낸 음악이 아니라 수많은 인문학적 체험을 쌓아 수액처럼 흘러내린 음악이다. 이런 음악가는 굳이 돈과 명예에 연연해하지 않을 것이지만, ‘오징어 게임’이란 블록버스터를 통해 더 넓은 세계로 초청되기를 기대해보는 것이다.
[지난 스밍 List!] ☞조선닷컴(chosun.com/watching)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