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대 청소년 사이 유행하는 ‘부캐(부캐릭터) 전성시대’란 말이 있다. 지난해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특히 2020년 10대 소비 키워드로 ‘멀티 페르소나(다중 자아)’를 꼽기도 했다. 요즘 10대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학교와 가정 등 다양한 상황에 맞는 자신만의 ‘부캐’를 설정하고, 이를 필요할 때마다 여러 가면(페르소나)처럼 바꿔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런 부캐들이 본캐(본캐릭터)의 말을 듣지 않고 제각각 날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잠든 사이 부캐들이 몸을 차지해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 깨어났을 때 이를 전혀 기억하지 못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어떤 처벌이 내려져야 할까.
놀랍게도 이 같은 고민은 이미 ‘부캐’ 개념이 생기기도 전인 30여 년 전, 미국에서 큰 화제가 됐었다. 바로 1977년 자신의 몸에 24개의 인격이 산다고 주장해 무죄 판결을 받은 연쇄 강간범 ‘빌리 밀리건(본명 윌리엄 빌리 스탠리 밀리건)’ 사건 때문이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이를 전혀 기억하지 못 하는 빌리의 모습과 이를 이유로 면죄부를 줬던 재판부의 판결은 당시 대중의 큰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정작 무죄로 풀려난 이후 빌리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달 초, 무죄 판결을 받은 후 사망하기까지 빌리의 행적을 추적한 다큐멘터리가 ‘빌리 밀리건, 24개의 인격을 가진 남자’란 제목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 과연 빌리는 제대로 다중 인격(현재 병명은 해리성정체장애)을 치료받고 교화된 삶을 살고 있었을까?
◇10개의 인격, 그리고 끔찍한 아동학대 피해자
다큐는 위와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캠퍼스 강간범’, ‘그 안의 괴물들’, ‘빌리의 황금시대’, ‘탈출’이란 총 4편의 영상을 통해 추적해 나간다. 전자의 두 편에서는 어떻게 빌리가 다중 인격이 됐고, 이를 통해 무죄를 선고 받을 수 있었는지를, 후자의 두 편에서는 무죄 선고를 받은 이후에도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던 빌리의 행적을 그린다. 이를 위해 빌리를 수사했던 경찰관, 검사와 그의 정신 감정을 맡았던 심리학자와 의사들, 가족과 친구, 사건 목격자 등 다양한 관계자들의 증언도 영상 속에 촘촘히 담아냈다.
다큐는 특히 빌리를 바라보는 사건 관계자들의 시선이 전환된 계기가 ‘아동학대로 질환을 얻은 피해자’로 그를 보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1977년 오하이오 주립대 인근 주차장에서 여대생 3명을 납치해 금품을 빼앗고 강간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빌리는 체포 당시에만 해도 지역 사회를 두려움에 떨게 한 흉악범으로 여겨졌다. 이 사건 이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의 절도 전과까지 있어 그를 보는 여론의 시선은 당초 싸늘했다고 한다.
이 같은 여론이 서서히 반전되기 시작한 건 수사 과정에서 빌리가 자신의 범행을 기억하지 못 하는 이상 행동을 보이면서였다. 특히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범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 안진증을 앓고 있는 듯 했다’고 증언했지만 정작 체포된 빌리는 이런 증상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진범이 따로 있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결국 심리 검사를 받게 된 빌리에게선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빌리가 어린 시절 계부에게 성폭행과 고문 수준의 아동학대를 당한 탓에 잦은 자살 시도를 했고, 이런 그를 보호하기 위한 10개의 분리된 인격이 생겨났다는 의사 소견이 나온 것이다. 빌리를 검사한 의사들은 특히 이 중 폭력적인 성향의 남성 인격 ‘레이건’과 레즈비언 성향의 여성 인격 ‘에이달라나’가 각각 강도와 강간 사건을 벌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큐는 미국 법조계에서 실력이 좋기로 유명했던 ‘게리’와 ‘주디’라는 두 명의 남녀 국선 변호사가 빌리의 무죄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도 분석했다. 다큐에서 특히 ‘주디’는 당시 의뢰인들을 절대 감옥으로 보내지 않고 그들의 주장을 전적으로 믿어 ‘다정한 주디’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변호사로 설명된다. 그만큼 이 두 변호사는 적극적으로 빌리의 병을 앞세워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여러 심리학자와 정신과 전문의들의 우호적인 소견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덕분에 10년의 치료 감호와 무죄 판결을 받은 후 풀려난 빌리는 기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중 인격 유행, 그리고 추가된 인격들
다큐는 동시에 당시 빌리의 무죄가 ‘다중 인격 유행’에 편승한 여론과 이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를 원한 의학계의 욕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비판도 함께 조명한다. 빌리를 검사했던 의사와 심리학자 대부분이 학계에서는 존재 여부가 의심되던 ‘다중인격’ 연구의 선구자들이었고, 이 분야가 크게 인정받게 된 계기가 빌리의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실제 빌리의 무죄 판결을 받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된 소견서를 써준 ‘윌버 박사’는 빌리 이전에도 ‘시빌’이라는 다중 인격 환자 치료기를 책으로 내서 화제가 됐었지만, 빌리 사건 이후 시빌 출간 때보다 더 잦은 TV출연과 유명세를 얻게 된다.
다큐는 특히 재판부의 치료 감호 명령으로 10년 간 병원에서 지내게 된 빌리가 각종 출판과 영화 제작 제의를 받으면서 재판 이전에는 없던 14명의 인격을 추가로 증언한 데 주목한다. 앞서 연쇄 강간 사건 수사 당시 빌리는 ‘아서’라는 대장격 인격이 빌리에게 해가 되지 않는 10개의 인격만 몸을 차지할 수 있게 관리하며 지내왔다고 증언했었다. 그러나 소설 ‘빌리 밀리건’의 저자 ‘대니얼 키스’가 해당 저서를 집필하기 위해 빌리의 인터뷰를 요청하자 빌리는 그에게 ‘악질’이라고 불리는 범죄 습성을 지닌 13개의 인격과 이들을 전부 통합해 관리하며 서서히 그를 치유해 나가는 ‘교사’라는 인격을 새롭게 보여준다.
다큐 속 증인들은 이때 추가된 인격들이 사실상 여론의 관심에 편승하기 위해 빌리가 추가로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특히 빌리의 가족들조차 “새 인격은 이해할 수 없는 인격”이라고 증언한다. 수사 때 보여준 10개의 인격은 빌리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었지만, 새로 추가된 인격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유고슬라비아어를 할 줄 안다던 빌리의 한 인격이 유독 실제 해당 언어를 할 줄 아는 의사와의 인터뷰 때만 되면 사라지는 등 계속해서 빌리의 다중 인격이 실은 ‘연기된 것’이란 의심이 제기된다.
◇면죄부 뒤 잊혀진 피해자들
결국 빌리는 죽을 때까지 사법부의 손길을 피해 감옥이 아닌 바깥에서 ‘암’으로 사망하게 된다. 이 때문에 수사 관계자들과 일부 심리학자들은 다큐에서 ‘사법부가 빌리에게 지나치게 많은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다큐와 함께 빌리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그가 연쇄 강간 혐의 무죄 판결 이후에도 수차례 ‘다중 인격’을 이유로 감옥에 갈 위기를 넘긴 것이 드러난다. 치료 감호소에 있던 시절 의사 결정권이 없다시피한 여성 환자들을 꾀어내 성관계를 맺었다가 기소될 뻔하고, 이를 이유로 감시가 심한 병원으로 옮겨지자 탈출한다. 특히 탈출 후에는 한 남성의 장애 연금을 착복하다 다툼이 붙어 그를 살해한 혐의까지 받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빌리는 단 한 차례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병원의 인권 유린이 있었다며 재판을 통해 병원이 아닌 자택에서의 통원 치료 명령까지 받아냈을 정도다. 모든 것이 ‘다중 인격’이 벌인 행위라는 이유에서였다.
빌리의 지인들은 그가 특히 스스로를 자주 ‘소시오패스’로 칭했고, “나는 질환 때문에 처벌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증언한다. 이 때문에 빌리를 수사했던 수사관들은 세간이 ‘다중 인격’이란 이유만으로 빌리에게 지나치게 많은 발언권을 줬고, “그 사이 피해자들은 잊혀져 갔다”며 분개한다.
사실 빌리가 정말 다중 인격이었는지는 그 스스로만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진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큐는 사건 관계자들이 이 진위 여부를 가리는 데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는 바람에 정작 더 중요한 것들을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빌리의 범죄로 가장 크게 인생이 망가진 것은 피해자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 사건의 끝에 계속 회자되며 면죄부를 얻은 것은 질환으로 인해 인생이 망가져 괴롭다며 전면으로 나선 빌리의 이야기뿐이었다.
개요 범죄 수사 다큐 l 프랑스, 미국 l 총 4회
등급 15세 관람가
특징 다중 인격은 정말 감형 이유가 될 수 있을까?
평점 IMBD 6.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