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워 오브 도그'./넷플릭스

세상이 혼란해야 영웅이 빛난다. 주인 없는 땅에서 벌어지는 결투극, 즉 서부극은 미국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영웅담이었다.

미국영화협회는 서부극을 ‘개척정신과 그를 둘러싼 갈등, 개척의 종말을 담은 미 서부를 무대로 한 장르’라고 정의한다. 세계 극 영화의 출발점 ‘대열차강도’(1903년)를 시작으로, 1950년대 미국 영화사는 거의 이 서부극이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다.

존 웨인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로 상징되는 ‘웨스턴 맨’은 서부를 떠돌며, 총 한 자루로 더러운 지역을 정화하고 표표히 떠난다. 결혼하지 않거나 아내를 잃지만, 가부장의 온전한 미덕을 구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신화는 깨지는 법. 서부극의 마초이즘, 인종차별에 대한 반성이 시작됐다. 서부극의 사나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스스로 쓴 반성문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 1992)’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른바 수정주의 서부극이다. 요즘 미국에서 나오는 서부극은 거의 대부분 이 ‘수정주의’적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서부극에 대한 회고, 반성, 혁명, 무엇이라 불러도 좋을 움직임을 담은 영화 세 편을 넷플릭스에서 찾았다. 최근 영화 순으로 배열한다.

◇파워 오브 도그 (2021)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한 장면.

1925년, 미국 몬태나에서 수천 마리 소 목장을 운영하는 필(베네딕트 컴버배치)과 조지(제시 플레먼스) 형제. 예일대를 나와 카우보이가 된 필은 지적이면서도 성깔이 있는 남자다. 동생 조지와 동업해 부유한 농장주가 됐다. 둘은 꽤 좋았다. 조지가 아들 있는 식당 주인 로즈(커스틴 던스트)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로즈에 대해 끝 모를 증오를 가진 필은 그녀를 정신적으로 압박한다. 로즈 아들 피터는 의대생이 되고, 방학을 맞아 농장을 찾아온다. 피터 모자를 구박해온 필은 어쩐 일인지 피터에게 접근하기 시작하고, 피터도 그에게 마음을 연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주인공 필(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넷플릭스

베네딕트 컴버배치, 커스틴 던스트의 연기력이 돋보이는 영화. 그러나 가장 강렬한 캐릭터는 로즈의 아들 피터(코디 스미 맥핏)다. 창백한 얼굴에 큰 눈, 깡마른 몸매로 팔을 몸통에 붙이고 걷는 피터를 카우보이들은 ‘미스 로즈’ ‘호모 XX’라고 놀린다. 그러나 피터는 개의치 않는다. 토끼를 잡아 귀여워하다가 바로 토끼 배를 가를 때도 그렇다. 자신과 어머니를 괴롭히던 필이 자신의 소년미에 집착하는 걸 눈치 챈 소년. 놀라운 사건을 꾸민다. 필과 소중한 담배 한 개비를 나누어 피울 때 그의 눈빛은 악마의 천진함 그것이다. 코디 스미 맥핏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티모시 살라메에 버금가는 매력적 비주얼으로 눈길을 잡는다.

제인 캠피온의 근작으로, 그녀의 대표작 ‘피아노’처럼 격정적이다. 마초와 미소년의 다채로운 내면을 사건으로 구체화하는 드라마 작법이 놀랍다. 애정, 애증, 복수에 기반을 둔 이 강력한 드라마를 과연 서부극이라 부르는 게 맞을까. 서부극을 배신해 서부극을 지킨 영화다. 원제 ‘The Power of the Dog’

◇카우보이의 노래 (2018)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 중 한 장면./넷플릭스

1962년 노튼 출판사에서 영문학 작품집이 나왔다. 코넬대 영문과 교수(M H 에이브람스)가 엮은 ‘노턴 앤솔로지(The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다. 중세부터 현대까지 영미권에서 나온 최고의 문학작품의 약 1000편이 직간접적으로 인용된다. 전 세계 영문학도의 ‘단일 교과서’가 있다면 아마 이 책이 될 것이다.

코엔 형제가 감독한 ‘카우보이의 노래’는 ‘서부극의 노튼 앤솔로지’다. 6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는데, 총잡이의 일대일 결투, 은행강도, 골드러쉬 등 서부극의 전형적 소재를 코엔 형제 식으로 풀었다. 정교한 의도가 터무니없는 죽음을 가져오는 아이러니한 상황, 이런 지적인 웃음이 코엔 형제의 특기다. 압도적으로 아름답고 서정적인 에피소드는 세 번째 스토리 ‘밥줄(Meal Ticket)’.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 중 '밥줄' 에피소드. /넷플릭스

극단장(리암 니슨)은 팔다리 없는 배우 해리슨(해리 멜링)을 태우고 마을을 전전한다. 소년은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 영국 시인 셸리의 소네트 오지만디아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같은 고급 문학작품과 명문을 낭송하는 일종의 문학 엔터테이너. 사지 없는 ‘서부의 음유시인’은 머지않아 큰 위기에 봉착한다. 숫자를 계산할 줄 안다는 닭이 나타나면서 밥줄이 끊길 위기. 극단장은 재산을 털어 계산하는 닭을 사들이고, 소년은 불길한 운명을 느끼기 시작한다.

고어로 쓴 작품마저 완벽히 암송하지만 팔 한짝도 없는 소년, 그를 엔터테인먼트로 삼는 서부의 무지렁이 관객, 이런 구도를 연극적으로 묘사했다. 지성만 있는 소년이 ‘계산하는 닭’에게 밥줄 끊기는 상황, 할리우드 쇼비즈니스에 대한 은유로도 보인다. 이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 나오는 첫 문장은 이렇다. ‘자비라는 것은 본디 강요되는 것이 아니오. 그건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고마운 비와 같다.’

영화의 다른 에피소드, ‘금빛 협곡’은 잭 런던, ‘낭패한 처자’는 스튜어드 에드워드 화이트의 단편이 원작이다. 간단치 않은 스토리와 연출이 매력적이다. 코엔 형제 작품 중에서도 평론가 격찬을 받았던 작품이다. 원제 ‘The Ballad of Buster Scruggs’

◇브로크백 마운틴 (2005)

영화 '브로크백마운틴'의 한 장면. /넷플릭스

2001년 ‘와호장룡’ 신드롬을 일으킨 리안 감독의 2005년 선택은 미국 서부의 촌동네 와이오밍의 카우보이였다. 8월에도 만년설로 덮이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방목한 양떼를 지키는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할)’. 일로 만났지만, 곧 깊은 우정을 느끼게 된다. 우정 이상이다. 여름 일이 끝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몇년 후 다시 만난 두 사람, 그게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고 이들의 만남은 20년간 이어진다.

영화 개봉 당시 ‘충격’으로 묘사됐던 두 남자의 텐트 속 동침 장면. 테스토스테론이 분출하는, 숙식을 함께 하는 남성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육체적 관계가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는 그걸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이 장면은 미국인의 약속이었던 ‘이성애자 카우보이’라는 틀을 깨는 ‘역사적’ 순간이었던 셈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두 주인공 히스 레저(왼쪽), 제이크 질렌할. /넷플릭스.

‘1963년부터 20년간 지속된 카우보이의 사랑’이라는 수식이 붙는 영화지만. 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을 현실의 문제로 끌고 온다. “우리 밖엔 아무도 몰라” 했지만 결국 배우자들이 알게 된다.

제이크 질렌할, 히스 레저, 앤 해서웨이, 미셸 윌리암스, 이 보석 같은 4명 배우를 한 영화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다. 참고로,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산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명칭이다. 애니 프루의 소설집 ‘Close Range: Wyoming Stories’가 원작이다. 원제 Brokeback Mount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