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인을 소개해주세요.
1999년 다른 신문사에서 처음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2000년 조선일보 공채로 입사해 편집부·사회부를 거쳐 2003년부터 학술과 문화재 분야를 담당했습니다.
주요 특종 기사로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 발견’(2004) ‘일본인들이 명성황후 시해한 장소, 침실이 아니고 마당이었다’(2005) ‘난중일기 빠진 32일치 처음으로 내용 밝혀져’(2008) ‘독도, 일본 섬 아니다 日 법령 발견’(2009) ‘팔만대장경 만든 곳, 강화 아닌 남해’(2013) ‘국립극장 대극장, 전통 전문극장 된다’(2016)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16년 앞선 조선 활자 갑인자 공식 확인’(2021) 등이 있었습니다.
‘건국 60년, 60대 사건’(2006)을 60회, ‘한자 문맹 벗어나자’(2014)를 25회 연재했죠. 지금은 ‘신문은 선생님’ 지면의 ‘뉴스 속의 한국사’를 쓰고 있고 인터넷 기사로는 ‘유석재의 돌발史전’을 비정기적으로 올립니다. 동북공정과 독도 관련 기사는 각 100건 이상씩 지면에 썼는데, 아마 현역 대한민국 기자 중 가장 많이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2. 문화부 학술 담당은 주로 어떤 취재를 하나요?
학술 담당의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는데, 모든 인터뷰에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1~2시간 정도 ‘나만을 위한 특강’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기사를 쓸 때마다 어렵긴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쓰는 게 어렵게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역사학, 철학, 국어학, 고전문학, 심리학 같은 인문 분야부터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사회과학을 주로 취재합니다. 여기에 ‘범 학술’로 볼 수 있는 문화재 분야는 고고학과 미술사학, 민속학이 포함되는데, 지금은 학술과 문화재를 같이 맡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언론의 관심사는 꼭 학계의 학술적 성과와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한국사학이나 국어학 같은 국학 분야를 많이 쓰게 되고, 짧은 제목으로 압축해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를 찾아내야 합니다.
3. 처음 학술 담당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역사학자가 되겠다는 뜻을 지니고 중국 고대사를 전공했었습니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칠 무렵 IMF 사태가 터졌습니다. 현실의 벽 앞에서 인생 처음으로 제대로 좌절을 맛볼 때였죠. 왕가위 감독 영화 ‘동사서독’을 보면 장국영이 이런 대사를 합니다. “내가 무술이랍시고 배웠는데, 이제 와서 농사를 짓겠나 장사를 하겠나.” 그때 제 심정이 꼭 그랬습니다. 이제 와서 뭘 하며 생업을 삼아야 하나 생각하다 ‘그래도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일’을 찾아보니 신문기자였습니다.
처음 취업 시장에 뛰어들 때 역사학 쪽은 다시 돌아보지도 않겠다 생각했었는데, 초년 기자 때 어쩌다 보니 인터넷상의 ‘기자클럽’에서 ‘유석재의 천장지구’란 코너를 맡아 역사 분야 글을 쓰게 됐습니다. 2003년 문화부로 인사가 났을 때 ‘뭘 맡고 싶느냐’는 질문을 받고 “먹여 주고 재워만 주시면 뭐든지 하겠습니다”고 했는데 학술 분야를 맡게 됐습니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게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4. 역사학, 사료 이야기 등, 쉽지만은 않다는 반응도 있어요. 쉽고 재밌게 접근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상당수의 역사책이 외면받는 이유는 어렵고 불친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발견이 하나 있었어요. 역사학을 전공하던 대학원 시절과 수습기자 시절, 제 글을 본 양쪽 선배들의 욕이 똑같았다는 것입니다. “너 지금 소설 쓰냐?”. 뒤집어 생각해 보니 역사와 기사는 모두 자체 내에 스토리와 내러티브를 갖춘 텍스트라는 사실이 되더군요.
결국 역사도 이야기고 기사도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이야기로 풀어 쓰는 스토리텔링이 중요해집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건 불필요하거나 동떨어진 얘기가 아니라 지금 내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얘기’란 생각이 들게끔 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백제 무령왕릉 근처 무덤에서 남경 사람이 만들었다는 글자가 적힌 벽돌이 발견됐다’는 기사의 경우 ‘현대의 어감으로 보면 그건 Made in China였다’는 점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죠.
물론 이렇게 쓰는게 제게도 여전히 늘 어려운 과제긴 합니다. 다만 답답하고 난해하게 쓰인 공문서나 보도자료를 보면 의외로 참고가 됩니다. ‘기사는 이렇게 쓰지 않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반면교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5. MBTI 성향 혹시 어떻게 되시는지요?
인터넷으로 해본 게 정식 MBTI 검사가 아니라는 말이 있어서 불확실하긴 한데 ISTP형이라고 합니다. 논리적이고 뛰어난 상황 적응력을 지닌 유형이라는데, 벼락치기 공부를 잘한다고도 합니다.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늘 마감 시간이 닥치면 ‘초능력’을 발휘하는 대부분의 기자들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 아닐까요? 인간을 16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혈액형 못지않게 편견을 조장하는 행동이라는 생각도 들긴 드네요. 섣불리 자기 유형을 정해 버리고 미리 선을 긋는 행동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6. 넷플릭스나 왓챠, 티빙, 웨이브 같은 OTT에 돈을 지불하고 계시나요?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열심히 지불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처음 비디오테이프를 틀어 봤을 땐 ‘영화를 집에서 볼 수 있다니 새로운 세계가 열렸구나’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술영화에 푹 빠졌던 20대 시절엔 볼 수 없는 영화가 너무 많아 ‘웬만한 세계 영화를 다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진 한 대학의 커뮤니케이션 센터란 곳에 전화로 문의했죠. ‘빌려볼 수 있나요?’ 대답은 간단명료했습니다. “안됩니다. 뚜, 뚜, 뚜”. 여기서 그만뒀어야 하는데. 그만 잘못된 선택을 했어요. “빌릴 수 없다면, 내가 수집해서 소장하면 되지!”
그때부터였습니다. 그 당시 생긴 지 얼마 안 됐던 아마존을 통해 닥치는대로 VHS 테이프를 모았고, 수 차례 우체국에 불려가 통관 세금을 내라는 공무원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다 DVD를 한번 본 뒤엔 테이프를 죄다 처분하고 디지털로 ‘전향’했고, 블루레이 시대가 되자 같은 일이 한번 더 일어났죠. 덕분에 DVD와 블루레이는, 지금은 회사를 떠난 이동진 선배를 비롯해 많은 이들에게 상당수 기증하고 나서도 방 벽 한 면을 다 채울 정도가 됐습니다. 다만 어느 시점부터 ‘덕질’과 ‘지름’을 최대한 자제하고 산 지는 이미 10년이 넘었습니다. 애 학원비 때문에 그만.
그러다 어느덧 OTT 시대가 됐습니다. 넷플릭스에 가입한 순간 또 한번 새로운 세계가 열렸죠. 더 이상 신작 영화는 소장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은 물론,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콘텐츠의 세계가 도래한 것이니까요. 개인적으로 OTT의 질을 좌우하는 건 하드웨어입니다. 폰이나 노트북으로 보는 것과, 빔프로젝터와 스크린을 연결해 4K 화질, 5.1채널로 보는 것은 감동의 격차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 탓에 넷플릭스는 눈물을 머금고 여러 기기에 연결해 볼 수 있는 가장 비싼 요금제로 쓰고 있습니다. 쿠팡플레이는 오직 ‘내일은 국민가수’를 보기 위해 가입했습니다만 싼 맛에 아직 끊지 않고 있네요.
7. 학술 관련 취재를 하시면서 ‘아 이건 영화나 드라마 찍을 스토리야’ 느끼셨던 사건이 있었다면?
2005년 7월 영친왕의 아들 ‘이구’씨가 별세했을 때, 저는 취재 현장인 창덕궁 낙선재에서 조선이라는 한 왕조의 최후의 낙일(落日)을 목격했습니다. 나라의 멸망 이후에도 100년 가까이 존속하고 있던 품계와 법도, 제도와 의례 같은 총체적인 무형의 유산들이 그때 한 번 마지막으로 세상에 빛을 발하고 일거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구씨를 잇는 황손으로 지목된 40대 회사원은 상복을 입은 채 당상(堂上)에서 내려오지 않고 아래에서 질문하는 기자들을 굽어보며 응대했고, 3년 동안 보름에 한 번 제사를 지낸다는 중세 스타일의 제사 ‘삭망전’도 펼쳐졌습니다. 21세기에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 불꽃이란 걸 알리기라도 하는 듯, 돌연 황실 후손들 사이의 고성과 난투극도 벌어졌습니다. 이때 종친 한 사람이 외쳤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기자들 다 밖으로 나가요!” 아무도 나간 사람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분에게 그 순간만큼은 여전히 조선시대였던 모양입니다.
2004년 중국에 동북공정 관련 출장을 갔을 때는 마치 제 자신이 재난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습니다. 며칠째 두만강 북쪽을 헤매며 취재를 할 때였습니다. 강 너머 북한군이 소리를 지르며 협박을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와 사진기자 선배의 몰골이 어느덧 탈북자로 오인 받을 만했을 겁니다. 그래도 꿋꿋하게 북·중 국경 일대 취재를 마치고 주차한 곳으로 황급히 돌아올 때였는데, 갑자기 중국군 중대장으로 보이는 권총을 찬 군인이 부하들을 거느린 채 의심스런 눈빛으로 “당신들 뭐냐”며 다가왔습니다. 사진기자 선배가 작은 소리로 다급하게 속삭였죠. “얼른 (사진 저장) 칩 숨겨!”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뒤로 연길 시내를 지나갈 때 문득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 황급히 건물 뒤로 몸을 숨겼습니다. 아마 미행인 것 같았습니다. 기사가 나간 뒤 중국대사관을 들렀던 한 선배는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기자 녀석이 아직 중국에 있다면 빨리 잡아들여야 하는 거 아니냐!”
이후에는 중국이 역사 왜곡하고 있는 흑룡강성 발해 상경성 발굴 현장으로 취재를 갔는데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 막막한 상황이었는죠. 갑자기 가던 길도 뚝 끊어졌고, 곧 해도 질 것 같았습니다. 가까스로 길이 끝나는 곳에 웬 집 한 채를 발견했는데 거기서 돌연 한국말을 쓰는 노인이 나왔습니다. 조선족 촌장이었습니다. 그는 친절하게 상경성 일대를 안내해 준 것은 물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중국의 역사 왜곡을 마구 성토했습니다. 지금 그때를 회상하면 정말 그 할아버지가 실제 존재했던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네요. 그래도 당시 촬영한 사진에 그 노인의 뒷모습이 찍혀 있어 진짜 만났던 거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습니다.
8. 영화 찍을 만한 인물은요?
역사 인물 두 명을 소개하겠습니다. 하나같이 왜 아직도 이들을 다룬 영화가 제작되지 않았는지 의아한 인물들입니다.
우선 ‘독도 지킴이’이자 ‘국가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의인’으로 알려진 안용복(?~?). 많은 사람들이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많은 점에서 오해받는 인물입니다. 안용복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 분쟁이 일어난 섬은 독도라기보다는 사실 울릉도였습니다. 안용복이 울릉도를 지켜냈다기보다는, 안용복으로 인해 양국 사이에 회담이 시작돼 결국 남구만 등 대신이 중심이 된 조선 조정이 일본의 ‘도해 금지’ 조치를 이뤄냈습니다. 안용복의 진술 중 1693년 ‘일본 관백을 만나고 왔다’는 등 몇몇 부분은 도저히 일정상 맞지 않아 의심스럽고, 1696년 무리를 모아 무단으로 저지른 2차 도일 때 조선 고관인 것처럼 행동한 것은 사기성이 짙습니다. 2차 도일 자체가 이미 양국의 회담이 끝난 뒤여서 불필요했을뿐더러 만용에 가까운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배를 타고 일본까지 쫓아가서 ‘국경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구두 약속을 받아내기까지 멈추지 않고 행동한 그 배짱과 추진력, 저돌성은 현대인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대담했습니다. 안용복이야말로 다층적으로 접근할 만한 흥미롭고 드라마틱한 인물입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주인공 이준(1859~1907)은 국망 직전 통한의 근대사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이준이 주인공인 신상옥 감독 영화가 한 편 있기는 합니다만 한국 영화는 아니고 1984년 북한에서 제작한 ‘돌아오지 않은 밀사’입니다.
시베리아를 횡단해 유럽으로 간 그의 여정은 극한의 처절함이었습니다. 고종이 하사한 활동비는 배달사고가 일어나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의혹이 짙은데, 간신히 헤이그에 도착한 이준 일행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을사늑약으로 정지돼 만국평화회의장에 입장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처음엔 관심을 가졌던 해외 언론도 시간이 흐르자 하나둘씩 떠나갔습니다. 대한제국은 열강들의 체스판에서 철저히 버려진 말이었죠.
밀사들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나자 고종 황제조차도 사실상 그들을 버렸습니다. 최후의 순간 낡은 여관방에서 고립된 이준이 숨을 거둔 날짜는 7월 14일, 바로 프랑스 혁명기념일이었습니다. 혁명의 이념인 자유·평등·박애는 서구 열강들에게만 유효한 것일 뿐, 멸망을 앞둔 극동의 약소국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4개월 전 법부대신 탄핵 사건으로 70대의 태형을 받은 데다 1만㎞가 넘는 여정 끝에 실의와 분노로 건강을 잊은 이준은 며칠 동안 곡기마저 끊은 상태였고, 지는 해가 숙소 서쪽 창가에 가득했을 그날 저녁에 “내 조국을 도와주소서”란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에게는 삶의 끝이었지만 한 민족에게는 거대한 독립운동의 화염을 예고하는 불씨이기도 했죠.
이준이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회의장과 지붕을 맞댄 건물이 바로 베르메르의 유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소장한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입니다. 2007년 헤이그 밀사 100주년 당시 취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TV를 틀었더니, 화면에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모습이 나와 울컥했던 기억이 납니다. 100년 전 만국평화회의에서 거부당했던 한국이 이제 그 만국평화회의의 후신인 유엔의 사무총장을 배출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는 2010년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릴 때 초청해 달라고 한국에 치열한 로비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을 담은 기사를 썼더니 어떤 격분한 독자가 “우리도 네덜란드 대표를 G20 회의장 바깥에 세워 두자”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히딩크를 생각해서라도 조금 참아야겠죠.
9. 현재 보고 있거나 푹 빠져 있는 작품들 있으세요?
어느 순간 장르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로스트’는 지금까지 본 드라마 중 가장 몰입해서 봤던 ‘일상생활 브레이커’였고, 남은 회차가 줄어드는 걸 안타까워하며 보던 ‘왕좌의 게임’은 새로 보려는 사람에게 “관객을 맥빠지게 하는 마지막 한 에피소드만 빼고 보라”고 추천하는 작품입니다.
시즌3까지 방영된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도 현재 보고 있습니다. 얼핏 황당무계해 보이는 이 드라마는 그야말로 1980년대 십대 서브컬처의 종합선물세트라 할 수 있습니다. ‘이티’ ‘구니스’ ‘스탠 바이 미’를 비롯한 당대 영화들에 대한 노골적인 오마주, 보드게임, 2D 아케이드 게임과 초창기의 쇼핑몰, 아이스크림 가게, 심지어 등장인물의 얼굴들로 화면을 채운 옛 스타일의 포스터 같은 아기자기한 요소까지 디테일도 뛰어납니다.
얼핏 보면 실종과 생체 실험, 돌연변이, 다른 차원의 존재 같은 어두운 요소들로 공포와 서스펜스를 끌어올리는 듯한데, 사실 그 바탕에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반대 진영의 존재’에서 발산되는 냉전 시대 특유의 기묘한 진영(陣營) 논리가 존재합니다. 전세계는 ‘우리 편’과 ‘적’으로 분할돼 있다는 전제에서 우러나는 공포죠. 그 시대에 실제로 십대였던 이들만 완전하게 공감할 수 있는 이 드라마의 디테일은 종종 옆길로 새는 내러티브까지도 너그럽게 봐줄 수 있도록 합니다. 특히 여주인공 일레븐 역의 밀리 바비 브라운에게선 어린 나이에도 영국 국립극장 스타일의 정극 연기가 배어 나와 놀라움을 줍니다. 그런데 이미 촬영이 다 끝났을 것 같은 시즌4는 왜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인지? 시베리아 감옥에 끌려간 것으로 보이는 호퍼 경찰서장은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 하나 즐겨보고 있는 프로그램은 교양 장르인 SBS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약칭 꼬꼬무)입니다. 처음엔 지나친 정치적 편향성 때문에 거부감이 들었고 작가마다 정치적 좌표가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역사적 사건의 해석에서 종종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듯한 느낌도 줍니다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매력적입니다. 아주 일상적인 개인의 어느 특정한 순간으로부터 시작해 엄청난 일로 이어지면서 충격의 강도를 높이는 점증법적 스토리텔링 방식입니다. 물론 4공과 5공 때 사건사고에선 ‘당시 정권은 정권 정통성을 위해 어쩌구’ 하면서 꼭 권력자 이야기를 갖다 붙이는 데 비해, 1999년 화성 씨랜드 사건 편에선 정부의 불충분한 사후 대책을 지적하면서도 당시 대통령이 누구였는지 언급도 하지 않는 식의 정치적 불균형은 여전히 불편합니다.
10. 여태껏 보신 영화, 드라마, 다큐 중 가장 인생작이라고 할만한 학술 관련 3편만 꼽아주세요.
예술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별처럼 많고도 많지만, 학자, 특히 실존 인문학자가 주인공인 영화는 정말 드뭅니다. 존 휴스턴 감독, 몽고메리 클리프트 주연 영화 ‘프로이트’(1962)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집장을 지낸 찰스 밴 도런이 나오는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 ‘퀴즈 쇼’(1994) 정도겠죠. 아무래도 역사를 다룬 영화를 골라야 하겠는데, 예전에 소설가 최인호 선생이 ‘모든 소설은 다 역사소설’이라고 했듯이 저도 ‘모든 영화는 다 역사영화’라고 봅니다. 세상 모든 영화는 모두 당대 역사의 산물인 동시에 시공간적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서 산림녹화 사업 이전의 황량한 민둥산을 볼 수 있고, ‘고래사냥2′(1985)에선 가연성 소재 때문에 철거되기 전 지하철 충무로역 에스컬레이터의 동굴 모양 천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선 지금껏 본 많은 영화 중 세계사, 한 세대(世代), 그리고 저 자신의 개인사와 밀접하게 관련된 영화 세 편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참고로 드라마 중에선 미드 ‘로스트’(2004~2010), 다큐멘터리 중에선 영화 ‘우드스탁’(1970)을 인생작으로 꼽습니다.
1)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감독의 ‘워털루(국내 개봉명은 ‘나폴레옹’)’
러닝타임 7시간에 달하는 기념비적 소련 영화 ‘전쟁과 평화’는 지루하기로 악명 높은 영화입니다. 축약판이 국내 개봉했을 때도 학생 단체 관람객들을 집단 수면에 빠뜨렸을 정도죠. 시대적으로 그 후속편이 될 만한 같은 감독의 ‘워털루’ 역시 지루하다는 평이 많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최후의 전투라는 역사적 사건을 연대기적 정공법으로 다룬 이 영화만큼 역사와 전쟁 그 자체를 정면으로 조명한 작품이 또 있을까요?
‘전쟁과 평화’와 마찬가지로 CG 장면 하나 없이 ‘무식한’ 물량공세로 밀어 붙인 장대한 전투 장면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합니다. 특히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그를 잡으러 온 군사들 앞에서 “제군들, 나 나폴레옹이 여기 있다”며 소리치는 장면은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총을 겨눈 병사 한 명이 기절하듯 쓰러지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나폴레옹을 에워쌉니다. 마지막 장면, 영국군이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둔 뒤 말 위에서 벌판에 널린 시체들을 바라보며 웰링턴(크리스토퍼 플러머)이 내뱉는 대사도 순간적으로 정신을 아득하게 하죠. “전투에서 지는 것 다음으로 슬픈 일은…전투에서 이긴다는 거야”. 심지어 이 영화에서 루이 18세 역할을 맡은 배우는 무려 오슨 웰스였습니다.
2) 오우삼 감독 ‘영웅본색’(1986)
1960년대 한국 청년 세대의 시대정신이 투영된 영화가 ‘맨발의 청춘’(1964), 1970년대는 ‘바보들의 행진’(1975)이었다면, 1980년대엔 한국 영화가 아니라 홍콩 영화 ‘영웅본색’을 꼽겠습니다.
이 영화가 당시 청년들의 마음을 흔든 진짜 이유는, 출구 하나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장렬하면서도 비장한 산화(散華)였기 때문입니다. ‘삼국지’나 ‘수호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강호의 도가 땅에 떨어졌다’는 식의 뜬금없지만 고색창연한 대사가 오가는데, 주인공들은 대도시의 빌딩숲 더워 보이는 날씨에도 바바리코트를 입고 잔뜩 폼잡으며 돌아다닙니다.
가장 명장면은 비굴한 자세로 악당이 땅에 뿌린 돈을 주은 주윤발을 뒤쫓아 간 적룡이 울음을 꾹 참으며 이렇게 말할 때입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잖아.” 반가움과 슬픔, 수치심이 뒤범벅된 표정으로 망설이던 주윤발은 일어서서 그와 포옹하는데 적룡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소마… 이곳은 이미 우리 천지가 아니야.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분노한 주윤발이 외칩니다. “싼니엔(3년)! 자네를 3년 동안 기다렸어!”(지금 뭘 보면서 이 대사를 쓰는 게 아닙니다) 이 장면을 보며 침통함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1980년대를 살아갔던 한국 남자가 아닐 겁니다.
또 하나 마법 같은 장면은 ‘풍림각 신’입니다. 타이페이의 한 육교에서 신문을 보던 주윤발은 적룡이 체포됐다는 기사를 보고 손에서 신문을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대만 측 보스를 만난 뒤 적룡을 배신한 자가 그의 조카임을 알고 그자가 회식을 하고 있는 풍림각으로 찾아갑니다. 여기서부터 펼쳐지는 4분 동안의 그 발레처럼 유려하면서도 빈틈 없는 액션신은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장면을 찍었단 말인가?’란 의문을 지닐 때쯤, 감독 오우삼이 화답이라도 하듯 극중 대만 경찰 역으로 화면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이 4분의 비밀은 여전히 풀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천진한 목소리로 합창한 직후 지독하게 펼쳐지는 마지막 장면 피의 향연은 또 어떻고요.
더 말하자면 끝이 없을 테니 여기서 그만 줄이겠습니다. 다만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의 수필집 ‘섬’에 대해 했던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책을 펼쳐 보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한마디로 ‘안본 눈 삽니다’) 저는 ‘영웅본색’을 처음 보게 될 지금의 청년들이 너무나 부럽습니다.
3)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체리 향기’(1997)
이제 이 영화에 대해 얘기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인생작 세 편’을 꼽아보기 전까지만 해도 이 영화를 보던 그 젊은 날의 일을 오랫동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고, 누구에게도 그 일에 대해 말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건 1998년 초였습니다. 바로 몇 달 전 IMF 사태가 터지자마자 떠올랐던 건 두보의 시구였습니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나라는 파탄이 났어도 산하는 그대로구나. 세상은 온통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나라도, 사회도, 모두 미래가 보이지 않던 그때, 학업을 그만둔 저는 사막에 홀로 내던져진 것 같았습니다.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건, 매일 아침 일어나면 이제 과연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득 인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일 아침엔 영영 눈을 뜨지 말았으면’ 같은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은 없어진 대학로의 한 영화관에서 ‘체리 향기’를 상영하고 있는걸 봤습니다. 앞서 키아로스타미 감독 영화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비디오로 본 적이 있었지만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할 의사조차 없어 보이는 어른들의 모습 때문에 고구마를 한가득 먹은 기분만 기억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혼자 영화를 보러 들어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당시만 해도 극장에서 ‘혼영’은 아주 드문 일이었거든요. 캄캄한 영화관에서 저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영화에선 자살을 결심한 한 남자가 자동차로 벌판을 달려가다 차에 동승한 사람에게 ‘내가 죽으면 그 위로 흙을 덮어 달라’고 제의합니다. 여러 사람이 거절한 끝에 한 노인이 그걸 수락하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이런 방법을 쓴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리고 자신이 언젠가 죽으려 했을 때 보잘 것 없는 체리 열매를 먹게 됐고, 먹다 보니 다시 해가 떠올라 결국 삶의 기쁨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은 옳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수가 있어요. 중요한 건 열심히 생각하는 거죠.” 그러자 주인공이 노인에게 말합니다. “내일 아침에 (내가 있을 구덩이 위에) 돌멩이 두 개를 던져 주세요…. 혹시 살아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여기서 저는 저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외쳤습니다. ‘던져 주세요, 제발 던져 주세요!’ 노인이 담담하게 말합니다. “세 개를 던지죠.” 수면제를 먹고 구덩이에 누운 주인공의 얼굴 위로 달빛이 비치고 비가 내리더니 어둠이 깔립니다.
그가 과연 죽었을지 영화는 끝내 말해주지 않습니다. 대신 영화의 막바지 갑자기 화면이 환해지더니 이란 악기로 연주하는 ‘서머타임’이 흐르고, 천진한 표정의 젊은 군인들이 웃으며 꽃을 꺾었습니다. 그때까지 다른 영화를 보면서는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던 저는 이 장면에서 그만 고개를 푹 숙이고 폭포처럼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영화가 끝나자 저는 터벅터벅 거리로 걸어나왔습니다. 그리고 2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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