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바보’. 연인 간에 쓰인다면 로맨틱한 이 문장이 범죄에 쓰인다면 어떻게 될까. 최근 넷플릭스가 공개한 다큐멘터리 ‘데이트 앱 사기: 당신을 노린다(Tinder Swindler)’는 이 점을 악용한 희대의 사기꾼을 소개한다. 세계 1위 매출의 데이팅 앱 ‘틴더’를 통해 유럽 전역 여성들로부터 119억원을 뜯어낸 전문사기꾼(Swindler) ‘사이먼 레비예프(Simon Leviev)’가 그 주인공이다.
다큐는 그에게 피해를 당한 여성 세 명이 직접 등장해 들려주는 증언을 따라 사건의 과정을 영화처럼 재연해준다. 이들은 모자이크나 음성변조 없이 얼굴은 물론 침대 위 셀카 등 스스로 치부까지 드러내며 사기꾼 고발에 열을 올린다. 그 모습이 워낙 거침없어 대역 배우를 쓴 페이크 다큐 아닐까 싶지만 엄연한 논픽션 다큐다. 2019년 에미상 논픽션 부문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했던 ‘인터넷 킬러 사냥: 고양이는 건드리지 마라’ 제작자 펠리시티 모리스가 연출을 맡았다.
◇사랑꾼과 사기꾼 사이
다큐는 노르웨이 출신으로 영국 런던에 거주한 세실리에(29)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틴더로 진정한 사랑을 찾아헤매던 그녀 앞에 어느날 이상형에 가까운 남성이 나타났다는 것. 바로 자신을 이스라엘 출신 다이아몬드 사업가로 소개한 사이먼이었다.
첫 만남부터 세실리에의 혼을 쏙 빼놓은 사이먼의 사기 수법은 다음과 같았다.
1. 일반 직장인이 평소 가보기 어려운 5성급 고급 호텔에 자신이 묵고 있으니 차를 한 잔 하자고 불러낸다.
2. 훈훈한 외모에 명품 정장을 번듯하게 빼 입고 나타나 자신의 개인사를 줄줄이 읊는다. LLD 다이아몬드 CEO이자 ‘다이아몬드의 왕’으로 불리는 이가 자신의 아버지이며, 이혼을 해 아이는 전 부인이 키우고 있고, 전세계로 출장을 다니느라 외롭다는 이야기 등이다.
3. 자신의 이야기를 뒷받침할 틴더 프로필, 인스타그램 계정과 구글 검색 결과도 그럴싸하게 꾸며놓는다.
4. 재력가인 남성이 나에게만 약한 면모를 드러내다니! 운명적 사랑이라 느낀 여성에게 만난지 수일 만에 ‘전세기 타고 해외 출장 같이 가자’고 권유하고, 여권과 짐가방을 싸오라며 롤스로이드 차량으로 집까지 데려다준다.
결국 사이먼과 연인이 된 세실리에는 고급 식당 데이트, 각종 고가 선물 공세를 받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교제 한달 후, 갑자기 사이먼은 사업상 심각한 ‘보안 문제’가 생겼고, 적들에게 추적당하지 않으려면 세실리에의 카드와 현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누가봐도 수상한 이야기다. 그러나 세실리에는 평소 사이먼이 다이아몬드 업계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해온걸 믿었고, 그가 자신의 경호원이 피투성이가 됐다며 보내온 사진도 믿었으며, 무엇보다 그를 사랑했다. 결국 카드와 현금을 내줬고, 순식간에 25만달러(2억 9000만원)까지 빚이 불어났다.
◇사랑의 돌려막기, 그가 준 선물은 누군가의 눈물
세실리에가 준 카드와 현금의 행방은 또 다른 피해자 여성의 증언으로 밝혀진다. 바로 사이먼이 세실리에와 비슷한 시기 틴더로 만나 썸을 탔던 스웨덴 출신 페르닐라다. 세실리에와 같은 과정으로 사이먼에게 호감과 신뢰를 가졌던 페르닐라는 그와 함께 한 달간 매주 수천 만원을 써대는 고가 휴가 여행을 다녀왔다고 고백한다. 페르닐라가 ‘다이아몬드 왕자’라는 사이먼의 재력 덕분으로 알았던 그 모든 사치는 사실 세실리에의 카드로 긁어댄 것이었다. 이른바 폰지(ponzi scheme) 사기 수법이다.
결국 사이먼은 비슷한 수법으로 뜯어낸 페르닐라의 카드와 현금을 2019년 네덜란드 출신 여성 아일린에게 쓰면서 덜미를 잡혔다. 빚에 허덕이던 세실리에와 페르닐라가 노르웨이 최대 신문사 VG를 찾아 자신의 사생활이 담긴 사이먼과 주고받은 대화 원본, 영상까지 통째 넘기며 사건을 제보한 것이다. 이는 기사를 본 아일린의 경찰 신고로 이어졌다.
이들의 열의로 틴더 바깥으로 나오게 된 사이먼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사이먼이 이스라엘 출신인 것도, LLD 다이아몬드 그룹이 존재하는 것도 맞았지만 세 여성에게 자랑했던 다이아몬드 금수저 가족 사진은 합성 사진이었다. 본명이 사이먼 하유트(Simon hayut)였던 그는 이미 2015년에도 핀란드 여성 3명을 상대로 수만 유로를 사취해 3년형을 받았던 전과도 있었다. 사이먼은 다큐에 등장한 세 여성 말고도 세계 각 지역을 돌며 최소 7명 이상의 여성들로부터 1000만 달러 이상을 수취한 혐의를 받았다.
하지만 VG 기사에는 “속은 여성이 바보”라는 수많은 악플도 달렸다. 다큐는 이런 부분을 인식한 듯 사이먼이 피해 여성들에게 각종 수작을 부리며 한 달 동안 보낸 사랑의 메시지만 300쪽 이상의 분량이었고, 돈을 안 갚는다는 의심이 생길 때면 가짜 수표와 짝퉁 롤렉스 시계를 주며 달랬다고 강조한다. 작정하고 속였는데 안 속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기꾼을 유명하게 만든 사기꾼 스토리
다큐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사이먼과 같이 사랑을 볼모로 돈을 뜯는 사기꾼이 적지 않은게 현실이다. 미 시장 감독 기구인 연방거래위원회(FTC)에 따르면 지난해 온라인 공간에서 연인을 가장해 돈을 뜯는 로맨스 스캠(5만6000건) 신고가 전년(3만3000건) 대비 70% 증가했다고 한다. 피해액도 같은 기간 80% 증가해 5억4700만 달러(6560억원)에 달했다. 2019년 2억달러 규모이던 로맨스 스캠이 팬데믹을 거치며 급증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로맨스 스캠으로 약 16억원을 가로챈 국제 사기 조직 일당 14명이 검거된 바 있다.
“사랑인줄 알았는데…” 美, 로맨스 스캠으로 작년 6500억원 뜯겨
“파병 군인인데 친하게 지내요”… 16억 뜯은 외국인 ‘로맨스 스캠’ 일당
정작 검거 후 처벌은 솜방망이인 경우가 많다. 강제가 아닌 여성들 스스로 현금과 카드를 준 만큼 수취 혐의와 형량이 낮게 적용되서다. 사이먼은 심지어 수감자 사이 코로나 발병을 줄이기 위한 정부의 형기 단축 정책으로 징역 5개월형만 살았고, 현재는 자유인의 몸이 되었다. 풀려난 후 업체의 제재로 더 이상 틴더 계정은 만들 수 없었지만, 대신 1회에 300달러(약 35만원)를 받는 경영컨설팅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다큐 공개 후 이틀 만에 비공개로 전환하기 전까진 페라리 등 외제차를 끌며 호화로운 삶을 즐기는 모습을 매일 소셜미디어에 게시했다. 이스라엘 현지 언론 더타임오브이스라엘에 따르면 지난해 사이먼이 자격이 안 되는데도 의료진이란 거짓말로 백신 조기접종을 받는 영상까지 찍어 올렸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 다큐는 현재 넷플릭스 글로벌 인기 영화 순위 2위(플릭스 패트롤 기준)에 올라 있고, 같은 기간 쇼 부문 1위는 여성 사기꾼의 실화를 다룬 ‘애나 만들기’가 차지했다. 애나 만들기의 주인공 모티브가 된 애나 소르킨은 자신이 사기로 번 27만 5000달러보다 많은 32만 달러를 드라마 제작 대가로 받았다. 미국 대중 매체 버라이어티(Variety)에 따르면 사이먼은 ‘거짓 다큐를 반박하겠다’는 명분으로 헐리우드 업계 매니저와 계약 후 책 집필과 팟캐스트 진출을 검토 중이다. 그리고 이 두 명으로부터 돈을 뜯긴 피해자들은 여전히 빚을 갚고 있다.
개요 미국 l 다큐 l 2022 l 1시간 54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
평점 ⭐IMDB 7.3/10, 🍅로튼토마토지수 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