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스카이다이빙을 즐기다 조수석에 금발 미녀가 탄 컨버터블 스포츠카 운전석으로 빨려 들어가듯 안착한다. 미녀는 첫눈에 반했다는 표정으로 “당신 너무 섹시해요”라고 속삭인다. 남자는 미녀도, 스포츠카도 처음 본 것이지만, 처음부터 제 것인 양 자연스럽게 차를 몰기 시작한다. 신호와 차선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며 무법자처럼 달리는 남자. 남자에게 경찰차들이 따라붙자 그는 갑자기 대형 총기를 꺼내 경찰차들을 박살 내 버린다.
당연히 현실 세계 얘기는 아니다. 작년 8월 개봉한 영화 ‘프리 가이’에 등장하는 가상현실 게임 ‘프리 시티’에서 벌어지는 일상이다. 프리 시티는 글라스 형태의 기기를 통해 인간 모습을 한 아바타로 접속하는 가상 도시다. 영화는 이곳을 실제 현실과 거의 똑같으면서도, 훨씬 더 많은 것들이 가능해지는 메타버스 세계로 묘사한다.
◇싸이월드, 리니지도 메타버스?
그런데 메타버스란 게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페이스북은 메타버스 시장에 집중하겠다며 사명을 ‘메타’로 바꿨고, 마이크로소프트는 메타버스 시대를 준비하겠다며 액티비전블리자드라는 게임사를 82조원이라는 거금에 인수했다. 글로벌 기업들이 차세대 먹거리사업으로 메타버스를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들이다. 국내서도 메타버스를 표방하는 네이버 제페토가 이용자 2억5000만명을 넘겼고, 통신사, 게임사 등 주요 기업들도 줄줄이 메타버스에 뛰어들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메타버스가 정확히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면, 이 영화를 참고해볼 만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프리 시티’가 제법 구색을 잘 갖춘 메타버스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메타버스는 넓은 의미에서 ‘가상 세계’ 정도 의미로 통하지만, 정확한 정의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넓게 보면 리니지 같은 게임이나 싸이월드 같은 커뮤니티도 메타버스에 해당한다. 하지만 미래에 기대되는 이상적인 메타버스의 조건으로는 보통 5C가 꼽힌다. 가상 세계의 기반이 되는 세계관(Canon), 이곳에서 콘텐츠를 생산·소비하는 창작자(Creator), 콘텐츠 거래에 쓰이는 디지털 통화(Currency), 현실과 일상생활이 이어지는 연속성(Continuity), 다양한 메타버스 공간이 서로 호환하는 연결성(Connectivity) 등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프리 시티는 이용자들이 아바타 플레이어로 활동하는 거대한 가상 도시를 구현한다. 이 활동 무대 자체가 세계관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플레이어는 아바타를 통해 현실 세계처럼 차를 몰고, 커피를 마시고, 총기를 난사한다. 리니지에서도 캐릭터를 통해 미션을 수행하지만, 자유도에선 큰 차이가 난다. 메타버스를 표방하는 제페토나 로블록스와 비교해도, 훨씬 더 자유롭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난다.
메타버스의 조건인 상품과 서비스 거래에 이용되는 디지털 화폐도 존재한다. 이 화폐로 현실에 영향을 주는 정보나 동영상 파일을 거래하는 모습이 나온다. 프리시티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뉴스나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된다. 이미 현실과 동떨어진 게임 속 세상이 아니라 일상의 연속선상이라 할만 하다. 프리 시티야말로 앞으로 기대되는 미래 메타버스의 모습인 셈이다.
다만 데이터를 저장한 서버를 부수자 게임 세계 자체가 무너져 내린다는 설정에선 한계를 드러낸다. 온전한 메타버스로 기능하려면, 다른 플랫폼과 자연스럽게 호환되고,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서버 없어진다고 파괴될 구조로 만들어진 가상세계라면 완전한 의미의 메타버스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보다 진화한 메타버스 선보인 작품들도
‘프리 가이’ 이전에도 메타버스를 다룬 작품이 여럿 있었다. ‘프리 시티’보다 한 단계 진화된 형태의 메타버스 공간을 묘사한 작품이 2018년 개봉한 영화 ‘레디플레이어원’이다. 2045년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선 ‘오아시스’라는 가상세계가 등장한다. 고글을 쓰고 접속한 가상세계에선 아바타의 오감까지도 현실로 구현해 낸다. 많은 이들이 현실을 외면하고 아예 메타버스 속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정도다.
궁극의 메타버스를 선보인 작품이 바로 1999년 개봉작 ‘매트릭스’다. 매트릭스는 기계가 인류를 지배하는 세상을 그린다. 기계는 인류를 인큐베이터에서 양육하면서 에너지를 착취한다. 현실에서 인간들이 저항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인간의 무의식을 조작한다. 기계들이 만든 가상세계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끔 조작한 것이다. 가상 세계라는 인식조차 할 수 없는 메타버스를 구현한 것이다.
아직 현실에서 프리시티 수준의 메타버스를 구현하기에는 기술적인 한계가 많다. MR(혼합현실), AI(인공지능), 데이터, 네트워크, 클라우드, 블록체인 등 다양한 기술이 더 발전돼야 하고, 동시에 유기적으로 연동돼야 한다.
하지만 라이언 레이놀즈가 펼치는 탁월한 B급 코미디를 보면서 웃다보면, 머지않은 미래에 메타버스 시대가 도래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23년 전 매트릭스를 보면서 느꼈던 생경함과는 다르다. 속도의 문제일 뿐, 불가능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가 묘사하는 메타버스를 보는 재미에 더해 프로그래밍된 NPC(인간이 아닌 게임속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설정이 참신한 작품이다. 국내 개봉 당시 관객은 31만명에 그쳤다. 하지만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그 10배는 극장으로 불러냈을 것이다.
개요 미국 l 액션·코미디 l 2021 l 1시간 55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
평점 ⭐IMDB 7.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