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해밀턴(1757~1804)은 10달러 지폐의 얼굴이자 미국 금융시스템의 설계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 살아서는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워싱턴의 오른팔’이었고, 부통령 애런 버와 대립하다 결투 끝에 숨졌다. 하지만 그는 교과서에 박제된 역사 속 인물이었다. 천재 음악가 린-마누엘 미란다(42)는 그 해밀턴을 21세기의 무대 위로 소환했다. 2015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 뮤지컬 ‘해밀턴’이다. 디즈니+의 뮤지컬 ‘해밀턴’이 최근 한글 자막을 장착했다.
혁명의 기운으로 끓어오르는 독립전쟁기의 미국, 켜켜이 먼지 쌓인 역사책 속에 갇혀 있던 ‘건국의 아버지’들은 린-마누엘 미란다의 뮤지컬에서 성공을 향한 야심과 독립 열망을 불태우는 청년들로 ‘환생’했다. 힙합 음악과 끊임없는 속사포 랩으로 진행되는 뮤지컬. 한국이라면 1000원권의 퇴계 이황이나 5000원권의 율곡 이이 급인 해밀턴을 변화와 도전의 ‘힙합 정신’을 체현한 인물로 재해석한 셈이다.
자연스럽게 ‘해밀턴’은 과거를 추억하는 중장년층과 관광객에게 의존하던 브로드웨이 극장에 젊은 관객들을 다시 끌어들인 주역이 됐다. 젊은 관객들은 카리브해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 청년이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독립전쟁과 건국의 영웅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에 자신을 투사해 바라봤다. ‘내게 다가올 기회, 그 한 방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노래하는 ‘마이 샷(My Shot)’ 같은 곡은 숨막히는 저성장과 취업난에 발목 잡힌 MZ세대 젊은이들을 향해 다시 꿈꾸고 야망을 가지라고 일으켜 세우는 시대의 송가로 받아들여졌다.
뮤지컬 ‘해밀턴’은 ‘지금도 뉴욕 리처드 로저스 극장에서 공연 중. 시야가 좋은 중앙부 좌석은 평일 저녁 공연 티켓값이 2000달러(한화 250만원)를 넘는다. 이 뮤지컬을 창조한 작곡·작사가이자 배우 린-마누엘 미란다가 직접 해밀턴으로 출연하던 마지막 공연 때는 암표가 2만2000달러(약 2700만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이제 비행기를 타고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까지 날아가지 않아도 이 전설적 공연을 안방에서 볼 수 있다. OTT 시대를 사는 기쁨이자 축복이다.
한창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2016년 브로드웨이 공연 실황의 뜨거운 분위기를 고스란히 안방으로 옮겨왔다. 15세 관람가.
■스포티파이 순위로 본 뮤지컬 ‘해밀턴’의 노래들
▶1위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 1억9400만 회 재생
뮤지컬 오프닝 넘버. 카리브해의 가난하고 더러운 동네에서 아버지 없이 태어나, 갖은 곡절을 겪으며 오직 자신의 두뇌와 열정으로 독립전쟁을 앞둔 미국 뉴욕에 정착하기까지 해밀턴의 삶을 압축해 보여준다. 애절한 음률의 느린 힙합으로 역사속 인물들과의 인연과 악연이 펼쳐진다. “뉴욕에서 당신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In New York you can be a new man)”, “아직 하지 못한 일이 100만 가지나 있는데… 지켜봐, 지켜봐(There’s a million thing I haven’t done…. Just you wait, just you wait)” 같은 대사들이 해밀턴이 맞게 될 역사의 굴곡과 비극적 최후를 예고한다.
▶2위 ‘마이 샷(My Shot)’ → 1억6700만 회
토니상 시상식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축하 영상을 보내며 인용한 유명한 가사 “난 나의 조국처럼 젊고 거칠고 굶주려 있지(Just like my country I’m young scrappy and hungry)”가 등장하는 넘버. 해밀턴은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에서 모두 활약한 프랑스인 혁명가 라파예트를 비롯한 미 건국기의 영웅들과 처음 선술집에서 어울리며 이 노래를 부른다. “내게 주어진 한 방을 절대 그냥 날려버리진 않을 거야(I’m not throwing away my shot)”라는 가사는 이민자들이 세운 미국, 기회로 가득찬 신세계의 비전을 21세기에 되살리며 수많은 젊은 관객을 브로드웨이의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3위 ‘새티스파이드(Satisfied)’ → 1억 6600만 회
스카일러 집안의 맏딸 안젤리카가 동생 일라이자와 해밀턴의 결혼 축하연에서 열매 맺지 못한 해밀턴과의 인연, 집안과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
▶4위 ‘스카일러 시스터스(The Schuyler Sisters)’ → 1억5600만 회
해밀턴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 뉴욕의 부호 스카일러 집안 딸들의 발랄한 등장곡. 신나는 팝 리듬과 경쾌한 멜로디에 귀가 즐거운 노래.
▶5위 ‘유윌 비 백(You’ll Be Back)’ → 1억5200만 회
영국 왕 조지3세가 독립의 기운으로 충만한 식민지 미국을 향해 “너희는 내 충성스런 백성, 결국 내 사랑을 기억하고 내게 돌아오게 될 거야”라고, “안 그러면 너희들이 내 사랑을 기억할 수 있도록 너희 가족과 친구들을 다 죽여주지”라고 노래한다. 수탈 대상인 식민지에 대한 집착과 기괴한 코믹함을 보여주는 이 뮤지컬의 인기 넘버 중 한 곡. 오프 브로드웨이와 브로드웨이 데뷔 공연 시즌에서 조지3세를 맡은 조너선 그로프는 등장부터 관객을 배꼽잡게 하더니, 능청스러운 표정 연기와 노래로 객석을 휘어잡는다. 디즈니의 ‘겨울왕국’에서 순박한 산골 청년 크리스토프의 목소리를 연기했던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