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냉장고를 열어 보니 엄청난 속도로 진화하는 작은 세계 하나가 생겨났다면? 우연히 길 건너 건물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목격했는데, 그 살인자는 왜 자꾸 내 뒤를 쫓아 오는 걸까. 지능을 갖게 된 요거트가 국가 부채부터 기후 변화까지 인류의 해묵은 숙제를 해결해준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광속 여행 우주선이 표류해 도착한 우주의 끝에서 만난 옛 연인은 정말 수백년을 건너 뛰어 다시 만난 인연일까, 아니면 끔찍한 꿈일 뿐일까.
이 세계에선 무엇을 상상하던 현실이 된다. 2019년 첫 시즌을 공개했을 때 넷플릭스 18금 애니메이션 ‘러브 데스+ 로봇’의 슬로건은 ‘NSFW(Not Suitable For Work)’. 직장에서 보다 들키면 낯뜨겁다는 뜻이니 우리 말로는 ‘후방주의’ 혹은 ‘엄빠주의’ 정도 의미였다. 예사로 등장하는 잔인한 폭력 장면과 노골적 성적 묘사는 이 시리즈가 가진 매력의 일부일 뿐이다.
젊고 신선한 감각, 다채로운 SF장르의 위트, 촘촘하게 짜여진 탄탄한 이야기, 한없이 실사에 가까운 영상으로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가는 표현력…. 각 편이 각자의 독창적 색깔로 빛나는 보석이다. 시즌1이 총 18편, 시즌2가 8편, 지난 20일 공개된 시즌3가 총 9편. 편당 20분 안팎 분량에 단편소설처럼 끝맺음이 확실한 이야기여서 부담없이 보기 딱 좋다.
[시즌1]■아이스 에이지
어느 날 냉장고 안에 하나의 세계가 생겨났다. 눈깜짝할 새 진행되는 생명체와 인류의 진화. 전형적인 중세 도시로 발달하던 냉장고 속 세계는 잠깐 한눈 파는 사이 현대로 넘어오고,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핵전쟁을 벌이는 데 이른다. 이 세계가 인류의 과거를 압축해 보여준다면, 미래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시즌1]■목격자
길 건너 건물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우연한 목격자가 돼 버렸다. 뒤쫓아오는 살인자를 따돌리려 갖은 애를 써보지만, 내가 도망치는 데 필사적인 만큼 살인자도 추적에 필사적이다. 핏빛과 살색이 난무하는 충격적 비주얼, 스릴 넘치는 전개, 시각효과 만큼이나 쇼킹한 마지막 반전까지 거의 완벽에 가까운 12분짜리 단편. 시즌3의 가장 충격적인 마지막 에피소드 ‘히바로(Jibaro)’를 만든 애니메이터 알베르토 미엘고의 작품이다.
시즌1에서는 광속 여행이 일상화된 미래와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를 충격적 반전에 담은 ‘독수리 자리 너머’, 지능을 갖게 된 요거트의 통치를 받게 되는 인간들 이야기 ‘요거트가 세상을 지배할 때’, 일본화처럼 섬세하고 유려한 선과 색채가 인상적인 ‘굿 헌팅’, 현실의 전쟁과 설화적 상상력을 연결한 ‘늑대 인간’, 애니메이션으로 도달 가능한 미적 성취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해저의 밤’ 등도 추천할 만 하다.
[시즌2]■자동 고객 서비스
“사랑합니다 고객님”으로 시작해 끝없이 이어지는 고객센터 자동 응답 메시지에 복장 터지는 경험이 있다면 공감 100%인 에피소드. 먼지와 얼룩 청소, 바퀴벌레부터 쥐까지 해로운 곤충과 동물 제거까지 모두 해결해주는 인공지능 자동 로봇 ‘배큐봇’이 오작동을 시작했다. 고객센터 자동 안내 음성은 속 터지는 소리만 해대고, 로봇은 집 안에 생명체 혹은 생명체 비슷하게 생긴 인형 등까지 하나 하나 확실하게 제거하며 점점 올가미를 조여온다. 가까스로 탈출했는데, 이건 더 큰 반란의 시작이었다.
[시즌3]■어긋난 항해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를 항해하는 상어 사냥 어선. 집채만한 게 모양의 갑각류 괴물 ‘타나팟’이 올라타 거대한 집게발을 휘두르며 선원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갑판 아래에 자리 잡은 이 괴물, 인간들이 사는 섬에 데려다 주는 조건으로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제안한다. 아무도 서로를 믿지 않는 거친 선원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시즌3]■강렬한 기계의 진동을
유황이 누런 사막 모래처럼 우주복 헬멧을 뒤덮는 목성의 위성 ‘이오’ 지표. 불의의 사고를 당했지만 궤도의 모선에 연락이 닿으려면 너무 긴 시간이 남았다. 생존자 탐험대원은 죽은 동료의 시신을 끌고 물과 산소가 있는 착륙선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탈진을 막기 위해 환각 성분이 포함된 약물을 스스로 주입하고,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위성 자체가 말을 걸어 온다. 이것은 가사(假死)상태에서 겪는 환각일까, 미지의 존재와 합일을 통해 도달할 영생의 갈림길일까.
[시즌3]■히바로 (시즌3)
어두운 은색 톤의 화면과 현대무용 같은 안무, 기괴한 음향과 연기가 어우러진 가장 개성 강한 에피소드. 소리로 인간을 유혹해 늪지대로 끌어들이는 죽음의 요정 세이렌이 숲 속에서 모종의 의식을 진행 중이던 기사들을 발견한다. 흑마법의 춤, 저주의 노래. 기사들은 죽고 죽이며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물 속으로 뛰어든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기사 ‘히바로’만이 세이렌의 저주에서 벗어나고 세이렌은 그런 히바로에게 끌리지만, 더 참혹하고 기괴한 비극을 낳을 씨앗일 뿐이다.
총괄 제작자는 영화감독 데이비드 핀처와 팀 밀러. 데이비드 핀처는 ‘세븐’ ‘파이트 클럽’ ‘나를 찾아줘’ 등 골수팬을 양산한 수작 영화들 뿐 아니라 ‘하우스 오브 카드’ ‘마인드 헌터’ 같은 시리즈에서도 크리에이티브 능력을 입증한 역전의 명장이다. 팀 밀러는 영화 ‘데드풀’과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를 만든 시각효과 장인. 두 사람은 넷플릭스의 자본력을 지렛대 삼아 세계의 뛰어난 애니메이터들이 맘껏 재주를 부릴 수 있도록 제약 없는 멍석을 깔았다. 시청자는 즐기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