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의 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지난 달 7일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176명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의 직책을 감안하면 경기도민들의 간절한 목소리가 담겨 있을 것 같지만, 실제 내용은 “대부업 최고금리를 24%에서 10%로 인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공식적인 이력을 보면 이 지사가 직접 금융 관련 일을 해본 적은 없다. 이에 대해 주무 부처 장관인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그렇게 급격하게 (인하)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금융권이 정치 논리에 휘둘리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정치 금융’이나 ‘관치 금융’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거대 여당이 된 민주당이 마음만 먹으면 무리한 법안도 통과시킬 수 있는 힘이 생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설상가상 금융 노조까지 여당 지도부에 합류하면서 국내 금융권에선 “한국 금융경쟁력이 더 악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 “9월이 두렵다” 금융에 연일 목소리 내는 巨與
최근 여당에서는 연이어 금융과 관련한 규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금융사들은 9월 정기국회에서 각종 규제 법안이 통과될까 전전긍긍하는 분위기다.
금융권에서 가장 주목하는 법안은 이른바 ‘삼성생명법’으로 불리는 보험업법 개정안이다. 박용진·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 법안을 냈다. 현행법은 보험사가 보유한 계열사 주식·채권이 총자산의 3%를 넘을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개정안은 이 ‘3%룰’의 기준을 보험사가 자산을 산 가격(취득원가)이 아닌, 현재 시장가격으로 바꾸는 내용이다. 현재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은 취득원가는 얼마 안 되지만, 시장가격은 무려 30조원이 넘는다.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삼성생명은 총자산(309조원)의 3%를 넘는 약 23조원어치의 삼성생명 지분을 강제 매각해야 한다. 삼성화재도 약 3조원어치를 팔아야 한다.
재계와 금융계는 “삼성생명과 화재가 전자 지분을 팔 경우 법인세만 5조원 넘게 내야하고, 삼성그룹 지배구조가 흔들린다”고 우려한다. 시장에서도 “쏟아지는 매물을 누가 받아낼 수 있겠냐”면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회 정무위원회 이용준 수석전문위원은 법안 검토보고서에서 “증시에서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예측하지 못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될 수 있다”고 했다.
이용우 의원은 지난달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 결정을 금융사가 무조건 수용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도 내놨다. 현재 금감원 분쟁조정 결정은 ‘권고’인데 앞으로는 강제하겠다는 것이다. 사실상 금감원이 금융 분쟁에 대해선 ‘판사’가 되는 셈이다. 금융권에서는 즉각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국내 금융 현실과는 맞지 않아 도입이 안 된 ‘노동이사제’도 박주민 의원이 법으로 발의하며 다시 불이 지펴졌다.
최근에는 금융을 소재로 인기 영합적인 발언을 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대부업 금리를 거론한 이재명 지사는 ‘동학 개미’ 사이에서 화두가 된 공매도(空賣渡)와 관련해서도 “공매도 금지를 연장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여러 여당 의원이 맞장구쳤다. 공매도 조건을 까다롭게 하거나, 규정 위반 시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들도 쏟아지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에 이중으로 시달리는 금융권… “더 이상 뭘 해야 하나”
올해 코로나 사태로 경기가 나빠지자 문재인 정부는 선심성 정책을 쏟아내면서 재원 마련을 위해 금융권에 손을 벌렸다. 지난 4월 민간 금융사들은 10조원 규모 채권시장안정펀드에 8조원을 출자하기로 했다. 이어 증권시장안정펀드, 스마트대한민국펀드 등 각종 정책 펀드에도 금융권이 동원됐다.
3월엔 자영업자와 중소기업들을 대상으로 금융권이 대출 만기와 이자 상환을 6개월 연장해줬다. 이 조치는 최근 다시 6개월 더 연장됐다. 이에 대해 한 시중은행 CFO(최고재무책임자)는 “대출 만기 연장은 해줄 수 있다고 해도 이자 납부를 유예하는 것에 대해선 우려하는 목소리가 더 많았다”며 “이자도 내지 못할 정도면 6개월 뒤 금융사나 채무자 서로 상황만 악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작년부터 잇따라 터지고 있는 사모펀드 사고에 대한 책임도 판매사인 은행들에 모두 떠넘기고 있다. 최근 금감원은 판매사들에 라임펀드 투자금 전액을 배상할 것을 권고했다. 배임 문제 등을 감안해 금융사들은 결정을 미루다 결국 권고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국내 금융업이 정치에 휘둘리면서 한국 금융 산업 경쟁력은 후진국 수준을 맴돌고 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에 따르면, 올해 한국 금융경쟁력 순위는 63국 중 34위를 기록했다. 최근 6년간 30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일본은 물론 중국, 태국보다도 낮은 순위다.
◇‘한국판 뉴딜' 청구서도 걱정
현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한국판 뉴딜’도 금융권에는 골칫거리다. 정부 관계자들이 “한국형 뉴딜 사업에 금융권도 적극 동참해달라”며 ‘청구서’를 기정사실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3일에는 5대 금융지주(신한·KB국민·하나·우리·NH농협) 회장 등 주요 금융사 최고경영자(CEO)들이 청와대에 불려가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다. 이 자리는 160조원 규모의 ‘한국판 뉴딜’을 처음 논의하는 자리다. 전체 5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인 가운데, 민간 측 참석 인사는 대부분 금융권인 것으로 전해졌다. 은행권 관계자는 “산업계보다는 금융에 기대하는 게 크다는 뜻 아니겠냐”고 했다.
이미 주요 금융사들은 “한국판 뉴딜을 뒷받침하겠다”면서 자진 납세하는 분위기다. 금융지주사들은 적게는 8조원, 많게는 5년간 75조원을 한국판 뉴딜에 쏟기로 했다. 그러나 “더 내놓으라”고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금융권 우려다. 16조원 규모로 조성될 ‘뉴딜 펀드’도 금융권 부담을 전제로 만들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