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농사지으면서 태풍 피해가 이렇게 심한 것은 올해가 처음입니더. 마 농사 접을까 싶습니더.”
지난 15일 부산 강서구 대저동의 엽채(葉菜)류 재배단지에서 만난 채모(61)씨는 연이은 태풍으로 무너진 비닐하우스를 정리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9호 태풍 ‘마이삭’과 10호 태풍 ‘하이선’이 연이어 덮친 이곳에는 배추·상추·시금치 등 엽채류 비닐하우스가 무너진 채 방치돼 있었다. 비닐하우스 지지대는 바람에 구겨져 내려앉았고, 보온을 위한 덮개는 찢어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채씨는 “비닐하우스 한 동 손보는 데 350만원이 든다”면서 “16동 모두 보수하려면 5000만원도 넘게 드는데, 돈 들여서 싹 고쳐봐야 손해만 볼 게 뻔해 막막하다”고 말했다. 안병훈 대저엽채작목반연합회장은 “열무 4kg 한 상자에 600원밖에 안 할 때도 있었다”면서 “코로나로 식당이 장사가 안 되니 채소값도 ‘똥값’이 됐다”고 했다.
◇코로나에 장마, 태풍까지 삼중고…"이렇게 힘든 적은 없었다"
부산에선 엽채류 농가에 피해가 집중됐다면, 경북에선 태풍으로 인한 낙과(落果) 피해가 컸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마이삭·하이선으로 인한 경북 지역 낙과 피해 면적 규모는 2797㏊(잠정치)로 전국 피해 면적(5416㏊)의 절반을 넘는다. 이날 경북 경주시 현곡면의 한 과수원에서 만난 최병조(64)씨는 태풍으로 인한 피해 상황을 묻자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2500평(8264㎡) 규모의 배 농사를 짓는 그는 “최근 3~4년간 해마다 냉해 피해를 입었다”면서 “냉해로 배 꼭지가 약해진 상황에서 태풍이 오니 배가 버틸 재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예년에는 태풍을 맞아 떨어진 배를 배즙 짜는 공장에 보내서 피해를 일부 보전하기도 했지만, 올해엔 마이삭과 하이선이 일주일 간격으로 연이어 오면서 그마저도 힘들어졌다. 최씨는 “보험사에서 낙과 수를 세어가야 보상받을 수 있는데 태풍이 연달아 오면서 땅에 떨어진 배가 많이 썩어버렸다”고 말했다.
같은 날 ‘밀양 얼음골 사과’로 유명한 경남 밀양시 산내면에서 만난 손제범(66)씨는 “코로나에 장마에 태풍까지 왔다”면서 “25년간 사과 농사하면서 이렇게 힘든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밀양얼음골사과발전협의회 회장도 맡은 그는 “예전엔 전국 각지에서 판촉 행사도 하고, 마을의 젊은 사람들은 사과 따기 체험 행사도 운영하면서 손님을 모았지만,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아무것도 못했다”면서 “11월에 열리는 ‘밀양 얼음골 사과축제’도 못 열어 판로가 다 막혔다”고 했다. 손씨는 “예년엔 추석 대목용으로 홍로 300평 정도 심어서 200상자쯤 출하해 1000만원쯤 짭짤하게 벌었다”면서 “올해는 고작 24상자밖에 출하하지 못해 인건비도 못 건질 판”이라고 말했다.
◇재난지원금 농민은 제외…"농민은 국민도 아입니까"
이날 만난 농민들은 4차 추경 재난지원금 대상에서 제외된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최씨는 “농민이 국민의 5%밖에 안 돼서 그런지 농민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통신비 2만원 지원해준다는 것 보고는 웃음이 나오더라”고 말했다. 채씨는 "지자체도 우리한테 별 도움 못줬는데, 중앙정부라고 우리를 도와주겠느냐”면서 “재난지원금 같은 건 이제 기대도 안 한다”고 했다. 손씨는 “소상공인 등 자영업자들의 피해가 크다는 건 잘 알고 있다”면서 “농민도 피해를 많이 봤는데, 누구는 100만, 200만원씩 주고 누구는 안 주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100만, 200만원 받아봐야 피해 본 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됩니더. 우리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정부가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느끼고 싶은 겁니더. 농민은 국민도 아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