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에 있는 문수봉 인근 산자락엔 중소기업 인력개발원이 있다. 매년 전국의 중소·벤처, 소상공인들이 찾아 교육받는 연수 시설이다. 대규모 건물과 잔디 구장까지 갖췄다. 연수원 입구에는 ‘중소기업인의 열망과 이건희 회장의 뜻이 함께하여’라는 비석이 서 있다. 1997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지시로 만들어진 연수원이다. 삼성 비서실 출신으로 벤처기업협회 부회장을 지낸 ‘벤처 1세대’ 이금룡 코글로닷컴 회장은 25일 소셜미디어에 “(이건희 회장은) 중소기업인들 교육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경기도 용인에 연수원을 건설해 중소기업중앙회에 기증했다”고 했다.
25일 별세한 이건희 회장은 치열한 글로벌 생존 경쟁 속에서 세계 일류를 지향한 냉철한 ‘승부사’로 평가받는다. 이에 못지않게 고인이 생전(生前)에 협력사와 지역사회를 생각했던 ‘상생(相生)경영’도 재조명되고 있다. 중소기업계는 많은 대기업이 중소기업과의 ‘상생’ ‘동반성장’을 말하지만, 이 회장은 ‘진짜 중소기업이 잘돼야 한다’는 진정성을 갖고 이들을 대했다고 평가한다.
◇"삼성 연수원과 똑같이 지어라"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은 26일 “중소기업 연수원을 ‘삼성 연수원과 똑같은 규모에 똑같은 시설로 지어주라’는 것이 당시 이건희 회장의 지시였다”면서 “대기업 것은 크게 짓고 중소기업 것은 작게 지을 법도 한데, 전혀 가식 없이 창문 틀부터 칠판 하나까지 같은 것으로 꼼꼼하게 챙기셨다”고 했다. 당시 개원식에 직접 참석한 이 회장에게는 공교롭게도 ‘의전 실수’가 일어났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인력개발원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께 가위가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테이프 커팅식이 진행됐는데, 화는커녕 오히려 환하게 웃으시며 손가락으로 가위 모양을 하고 커팅하는 재치를 보여줬다”고 했다. 2002년에 중기중앙회가 이 회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자 “중소기업 지원했다고 중소기업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25일 360만 중소기업을 대표하는 법정단체인 중소기업중앙회는 “중소기업을 진정한 동반자로 생각하며 애정을 베풀어주신 회장님께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한다”는 논평을 냈다. 중견기업연합회도 “거성(巨星)의 타계를 애도하며”란 글에서 “많은 중견기업인의 무릎을 지탱하고 어깨를 나누어 준 소중한 친구이자 선배였다”고 이 회장을 기억했다.
◇ “협력사가 세계 일류 돼야”
이 회장은 삼성그룹 회장 취임 이듬해인 1988년, 중소기업과 공존공생(共存共生)을 선언했다. 삼성이 자체 생산하던 제품·부품 중 중소기업으로 생산 이전이 가능한 352개 품목을 선정, 단계적으로 중소기업에 넘겨준다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대기업이 일류가 되기 위해선 중소기업이 먼저 일류가 되어야 한다”는 이 회장의 평소 철학 때문이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에도 이 회장은 “삼성그룹의 대부분이 양산 조립을 하고 있는데 이 업(業)의 개념은 협력업체를 키우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삼성에서 ‘거래처, 납품업체, 하청업체’란 말을 없앤 것도 이 회장이었다. 그는 삼성 계열사들에 “신뢰에 기반해 수평적이고 전략적인 파트너 관계를 맺으라”고 주문했고, 이후 삼성에선 ‘협력업체’란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협력업체도 삼성 가족”(1989년 신년사), “협력업체는 같은 배를 탄 동반자”(1996년 신년사), “협력사가 세계 일류 경쟁력을 갖추도록 정성을 쏟자”(2012년 신년사) 등 기회가 될 때마다 이를 강조했다. “협력회사의 경쟁력을 키워 성장을 지원하고 지식과 노하우를 중소기업들과 나눠 국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2013년 신년사)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김기문 회장은 “(이 회장은) 상생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고, 항상 중소기업에 애정과 진정성을 갖고 가깝게 접근하던 분”이라고 했다.
◇ 탁아소·문고리 “삼성이 개선하자”
이건희 회장은 글로벌 삼성을 이끌면서도, 저소득층 어린이의 육아 문제부터 삼성병원 환자들의 문고리 하나까지 ‘삼성이 개선해보자’고 할 정도로 위아래를 두루 살폈다고 한다. 이금룡 회장은 “(삼성의료원 건설 시) 받은 지시 사항 중에는 6인 입원실 어느 위치에 TV를 놓아야 환자들이 모두 편안하게 시청할 수 있는지, 입원실 문을 도어록·슬라이드 등 어떤 방식으로 해야 가장 편할지 검토하라는 것이 있었다”고 했다.
1987년 회장 취임 직후, 호텔신라에서 오찬을 하다 창밖으로 낙후된 집이 밀집된 곳을 보고 “저기 사는 사람들이 제대로 근무하려면 아이들을 편안하게 맡겨야 할 텐데, 좋은 곳에 맡길 수 없을 것 아니냐”며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한다”고 어린이집 건립을 지시하기도 했다. 노조 문제에 대해서도 “'3만달러 시대엔 용인해도 되지 않을까' 자주 반문했었다”고 회장 비서팀장을 지낸 정준명 전 삼성전자 일본본사 사장은 언론 기고를 통해 회고했다.
고인이 가장 좋아한 것은 ‘단빹팡’이었다고 한다. 일본 와세대 대학 동기인 니이무라씨는 “회장님이 단팥빵을 좋아해서, 우리는 엄청나게 비싼 음식을 대접받아도 답례로 단팥빵을 드렸다”면서 “회장님 건강을 염려한 홍라희 여사께 단팥빵을 빼앗기기도 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