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간 걸렸던 풍력발전기 안전 검사를 무인 비행체 드론으로 15분 만에 끝내는 기술을 개발한 최재혁(33) 니어스랩 대표, 카카오톡 회계 서비스로 전국 66만 소상공인을 고객으로 확보해 ‘데이터 비즈니스’를 하는 김동호(33) 한국신용데이터 대표, 최대 45일이었던 돼지고기 유통 경로를 4일로 줄여 ‘초신선 돼지고기’를 제공하는 김재연(30) 정육각 대표. 사업 분야도, 기술도 제각각이지만, 이 젊은 창업자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국립 한국과학영재학교를 졸업한 수학·과학 영재(英才)라는 것.
“수학·과학 문제 풀 듯 사회·산업 문제를 해결할 때 짜릿한 성취감을 느낀다”는 밀레니얼 세대 영재들이 스타트업에 뛰어들고 있다. 영재들의 창업 전성시대다. 과학영재교, 특수목적고 등 수월성(秀越性) 교육을 받은 영재들은 부모한테 등 떠밀려 의사, 대기업 연구원, 대학교수 등 안정적이면서 돈도 잘 버는 직업을 선택해왔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 영재들은 탄탄대로가 보장된 길을 벗어나 창업이란 ‘위험한 샛길’ 모험을 택했다. 스타트업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나올 만큼 과거와 달라진 창업의 위상, 하나의 주제에 꽂히면 끝장을 보고 마는 남다른 호기심과 끈기 등이 맞물린 결과로 해석된다. 벤처투자사 TBT파트너스의 임정욱 대표는 “최근 영재 출신을 비롯한 똑똑한 이공계 인재들이 안정적인 대기업 대신 스타트업에 합류하고 있다”며 “창업 생태계 확장은 물론 우리 경제·산업 발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최근 스타트업 업계에는 한국과학영재학교 출신 50여명으로 구성된 모임이 생겼다. 2003년 1기생으로 입학한 차승준(33) KTB네트워크 투자팀장은 “1기생 144명 중 창업자를 비롯해 스타트업 종사자가 15명이 넘는다”며 “한 기수에서 10% 넘는 인원이 스타트업에서 일한다는 건 꽤 높은 비율”이라고 했다. 이어 “영재학교 출신은 보통 석사·박사 등 공부 기간이 길어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한 건 3~4기생(2008~2009년 졸업) 정도까지”라며 “점점 더 많은 후배가 스타트업에 합류하고 있다”고 했다.
영재학교뿐만이 아니다. 과거 ‘전국 상위 1%’ 학교로 유명했던 강원도 횡성의 민족사관고 출신들도 창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신선한 식재료로 전국 ‘새벽배송’ 시장을 장악한 김슬아(37) 마켓컬리 대표, 삼성전자에서 분사해 ‘스마트 벨트’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 중인 강성지(34) 웰트 대표가 이 학교를 나왔다. 이들은 각각 억대 연봉을 받는 컨설턴트, 의사로 일하다 돌연 창업에 뛰어들었다.
◇밀레니얼 영재들의 선택
영재들의 창업 이유는 제각각이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한번 꽂히면 끝까지 간다’ ‘문제 풀이는 자신 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것이다.
과학영재학교 1기생인 김동호 한국신용데이터 대표는 연세대 공대 재학 중이던 2011년 모바일 설문 조사기업 ‘오픈서베이’, 2016년 소상공인 데이터 전문기업 ‘한국신용데이터’ 등 두 개의 회사를 연쇄 창업했다. ‘왜 창업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 문제 푸는 원리는 같아요. 기존 방법을 먼저 이해하고, 나는 어떻게 다르게 풀까 고민하고, 가설을 세운 다음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거죠. 이걸 학문 쪽에서 하면 연구자, 실생활에서 풀면 창업자 아닌가요?” 공학적 사고(思考)를 한다는 면에선 공부나 사업의 본질은 같다는 것이다.
김재연 정육각 대표는 영재학교, 카이스트를 나와 미 국무부 장학생에 선발된 ‘수학 영재’다. 하지만 출국을 불과 8개월 앞둔 2015년말 돌연 유학을 포기했다. 창업하기 위해서다. 그것도 스타트업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축산업에 도전했다. ‘소비자에게 진짜 맛있는 돼지고기를 선보이겠다’는 데 꽂혔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유학 포기하고 창업을 선택할 때 단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고 했다. 돼기고기 숙성 및 포장과정에 IT기술을 접목, 공장 운영을 최적화하는 방법으로 기존 최대 45일이었던 도축 후 유통기간을 4일 이내로 줄였다. “수학 문제도 푸는 것 자체가 재밌다기보단 풀었을 때의 짜릿함 때문에 계속하게 되거든요. 지금 창업이 주는 재미나 성취감이 그 어떤 것보다 큽니다.”
강성지 웰트 대표는 민사고 시절 학생발명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발명 영재’다. 연세대 의대에 진학해 보건복지부 소속 공중보건의를 했고, 건강관리 앱을 만들었다가 쫄딱 망했다. 이후 삼성전자에 스카우트돼 사내벤처를 창업했다. 그는 “국가 녹(祿)을 먹으며 봉사한다는 생각에 공무원이 되려 했는데, ‘새로운 물살’을 만들어 사회를 바꾸는 데 한계를 절감했다"고 했다. 강 대표는 삼성에서 입사 제의를 받았을 때 “이병철, 이건희 회장님 같은 분이 우리나라에서 유례없는 산업 기반을 만들었는데 중국 샤오미·화웨이한테 위협받는 게 짜증나서 어떻게든 지켜보겠다고 간 것”이라고 했다. 연봉 협상 때 “내 뜻대로 일할 수 있게, 연봉은 조금만 줘도 되니 직급만 높게 달라. 상무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 삼성은 괴짜 취급 하면서도 28세 청년에게 ‘최연소 과장’을 달아줬다. 강 대표는 삼성에서 허리춤에 차기만 하면 건강을 관리해주는 ‘스마트 벨트’를 만들어 스타트업 대표가 됐다.
◇왜 창업에 강한가
밀레니얼 영재들은 독특한 교육환경이 창업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한다. 영재학교는 획일적인 교육 대신 컴퓨터·물리·생물·지구과학 등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골라 집중적으로 수강하고, 원하면 교수와 함께 공동 연구도 할 수 있다. 김재연 대표는 “뭐든 호기심이 생기면 가설을 세우고 빠르게 검증해볼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이었다”고 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인재들과 기숙사에서 밤낮으로 부대끼며 창업의 제1조건인 훌륭한 인재풀을 가진 것도 장점이 됐다.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 대학원까지 짧게는 3년, 길게는 10여년간 함께 생활한 게 끈끈한 창업 파트너로 이어진 것이다. 실제로 영재 출신은 동기생과 창업이 유독 많다.
일부에선 ‘국가 장학금’ 받고 공부한 영재들의 창업을 불편한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연구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대신 개인 사업을 택했다는 것이다. 최재혁 니어스랩 대표는 “그럼 저희가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라고 반문한다. “내가 가진 기술로 세상을 좀 더 좋게 바꿀 수 있다면, 그것 역시 국가 경제와 국민에 기여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강성지 대표는 발명 영재, 의사, 공무원, ‘삼성맨’을 거쳐 창업에 이른 자신의 좌충우돌 행보를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남들과 조금씩 다른 선택을 해온 것 같아요. ‘똑똑한 모범생’은 많아요. 하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작은 틈을 벌리는 건 ‘똑똑한 똘아이’들이 해야 할 역할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