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투자한 해외 부동산 펀드가 50조원을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불과 7년 사이에 9배로 급증한 것이다. 예금 금리가 연 2%도 안 되는 초저금리 현상 속에서 해외 부동산이 대안 투자처로 주목받자, 국내 금융사들이 제대로 된 검증 없이 경쟁적으로 해외 부동산을 사들이면서 나타난 결과다.
금융 당국은 해외 부동산 펀드가 사모펀드 사태에 이어 또 ‘시한폭탄’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오피스 빌딩 같은 글로벌 상업용 부동산 시장이 직격탄을 맞으며 해외 부동산 펀드의 부실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부동산 펀드는 임차료·이자가 밀리는 등 코로나 사태 충격이 나타나고 있다고 당국은 밝혔다.
◇50조 넘은 해외 부동산 펀드, 코로나 쇼크 가능성
금융감독원은 지난 4월 말 기준 전체 해외 부동산 펀드가 56조5000억원 규모로 집계됐다고 16일 밝혔다. 금융 당국이 해외 부동산 펀드 현황을 집계해 발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해외 부동산 투자가 부실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자 당국 차원에서 점검에 나선 결과다.
해외 부동산 펀드 설정액은 2013년만 하더라도 6조4000억원에 그쳤다. 그러나 해가 다르게 몸집이 붇더니 2018년 40조원, 2019년 50조원대를 넘어섰다.
규모가 늘어난 만큼 리스크도 커지고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해외 부동산 펀드 대부분은 오피스 빌딩(53.2%), 호텔·리조트(11%) 같은 상업용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의 직격탄을 맞을 수 있는 곳들이다.
이미 일부 펀드에서는 임차료·이자가 연체되거나, 매각 여건이 악화돼 만기를 연장하는 등 코로나로 인한 부정적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펀드가 건물 주인이 되는 ‘임대형’ 부동산 펀드(21조원) 가운데 임대율이 90% 이하로 떨어진 펀드는 약 1조4000억원 정도다. 비교적 양호하지만, 일부 펀드에서는 임차료 연체가 나타나고 있다. 부동산 개발 사업(PF) 등에 돈을 빌려주는 ‘대출형’ 부동산 펀드 17조8000억원 가운데 중·후순위 대출 비율이 60%에 달한다. 일부 펀드에서는 대출금이 연체되거나 대출 상환 유예 신청이 들어오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해외 부동산 펀드의 평균 만기가 7.6년 남아 단기적으로 리스크가 불거질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면서도 “향후 경기 회복이 지연되면 펀드 수익성이 떨어지고 투자금 회수 리스크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고, 특히 대출형 펀드는 중·후순위 비율이 커 신용 위험 우려도 있다”고 했다.
◇검증 역량 부족에 ‘깜깜이’ 투자
해외 부동산 펀드가 빠르게 커진 것은 일차적으로 저금리 때문이다. 주식·채권 같은 전통적 자산으로는 안정적 수익을 내기 어려워지자 부동산 등 대체 투자 시장이 급성장했다. 해외 부동산을 기초 자산으로 삼은 금융 상품이 중위험·중수익 상품으로 포장돼 불티나게 팔렸다. 해외 빌딩을 놓고 우리나라 금융사들끼리 서로 먼저 사려 경쟁을 벌이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곤 했다.
문제는 국내 금융사들이 해외 부동산 펀드를 안정적으로 운용할 역량이 있느냐 여부다. 주식·채권 같은 금융 상품에는 가격표가 달려 있다. 그러나 부동산 등 대체 자산에는 미리 정해진 가격이 없다. 제값 주고 사는 게 맞는지 꼼꼼히 따질 역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제대로 검증하려면 회계·법무 전문가 등 수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금융사들은 제대로 된 실사를 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평가가 많다. 그렇다 보니 해외 현지 운용사나 브로커 말만 믿고 투자하는 사례가 수두룩했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현지 금융사가 손도 안 댈 물건을 비싼 값에 사들이거나, 현지 브로커 말에 속아 엉뚱한 데 투자하는 사례가 빈번했다”고 말했다. 한국 금융사들이 ‘글로벌 호갱’이 됐다는 조롱까지 나왔다.
예컨대 KB증권에서 주로 판매된 호주 부동산 사모펀드는 원래 현지 장애인 임대아파트에 투자하겠다며 투자자를 모은 상품이다. 그러나 현지 사업자인 LBA캐피털은 전혀 엉뚱한 토지를 사들이는 데 이 돈을 썼다. 그 과정에서 대출 서류가 위조된 사실도 뒤늦게 확인됐다.
신한금융투자 등에서 팔린 독일 헤리티지 DLS(파생결합증권) 역시 비슷한 사례다. 이 상품은 독일의 문화적 가치가 있는 오래된 건물을 사들인 뒤 고급 주거 시설로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상품이다. 그러나 독일 정부 인가가 나지 않는 바람에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펀드 환매가 늦춰졌다. 현지 시행사는 파산 신청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외 부동산 투자의 부실은 국내 증권사나 보험사의 건전성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국내 주요 증권사·보험사의 해외 부동산 투자 규모는 지난 2017년 7조2000억원에서 작년 상반기 14조1000억원으로 배 가까이 늘었다. 특히 지분 투자나 중·후순위 대출 등 고위험 투자가 70~80%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다.
김현태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증권사·보험사의 해외 부동산 투자는 2016년 세계 부동산 가격 고평가 시기에 집중돼 손실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다”면서 “특히 투자 대상도 코로나 충격에 취약한 상업용 부동산에 집중돼 있다”고 했다. 한국은행은 지난 9월 ‘금융 안정 상황 보고서’에서 “해외 부동산은 유동성이 낮고 자산 매각을 통한 빠른 대처가 어려워 부실이 누적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