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A고시원은 고시생이 줄어든 데다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쳐 방 10개 중 6개가 넉 달째 공실이다. 그나마 사람이 사는 방 4개 중 2개도 월세가 밀린 상태다. 이 고시원 월세로 생활하고 있는 주인 김모(77)씨는 “고시원은 보증금도 없고 언제 나갈지 모르는 사람들 뿐이라 현금으로 월세를 받는데 정부가 이 돈까지 세금을 떼가려 한다. 정부가 그동안 해준 것도 없으면서 옥죄기만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성규

15일 국세청이 내년부터 현금영수증 의무 발행 대상을 고시원⋅미용실 등 소상공인들까지 확대한다는 방침을 밝히자, 코로나발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서울 강남구에서 30년째 미용실을 하는 송모(63)씨는 “안 그래도 연말 대목이 날아가 문 닫기 직전인데 왜 하필 이 어려울 때 소상공인들을 사지로 내모느냐”고 했다. 송씨는 매출이 3분의 1 이하로 떨어져 두 달치 월세 1000만원이 밀린 상황이다. 하루 10명 넘게 손님이 있었는데 요즘은 공치는 날도 많다고 한다. 대한미용사회중앙회에 따르면, 강남구 미용실 700여개 중 200여개가 코로나로 폐업했다고 한다. 코로나 전부터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직원들을 내보내고 나 홀로 운영해오던 가게들이 밀린 월세, 매출 급감 등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10만원 이상 현금 거래 무조건 현금영수증 발행해야

의무 발행 대상으로 지정되면 10만원 이상 현금 거래 시 고객이 요구하지 않더라도 현금영수증을 발급해줘야 한다. 10만원 미만 소액 거래는 고객이 요구할 경우 발급하면 된다. 이를 어기면 금액의 20%에 해당하는 가산세를 부과받을 수 있다.

고객은 현금영수증을 주지 않는 가게를 국세청에 신고할 수 있다. 위반 사실이 확인되면 국세청이 거래 금액(현금영수증 미발행 금액)의 20%에 해당하는 포상금을 준다. 한 건당 최대 한도는 50만원으로 한 사람이 1년에 최대 200만원까지 탈 수 있다.

이번에 추가되는 업종은 구체적으로 미용실(두피 관리 포함), 의류 소매업, 신발 소매업, 통신 기기 소매업, 컴퓨터·주변장치·소프트웨어 소매업, 반려동물·용품 소매업, 독서실, 고시원, 철물·난방용구 소매업이다. 여기에 이 업종들의 온라인 쇼핑몰도 포함된다. 사업자 수로는 70여만명이다.

현재 77개 의무발행 업종의 사업자가 80여만명인데 거의 그만큼을 더 늘리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코로나 사태로 이미 폐업 위기에 놓인 소상공인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지난 8월 코로나 2차 확산으로 매출 타격을 입은 데 이어 최근 3차 확산으로 또다시 위기에 몰린 상황이다. 한국신용데이터에 따르면 12월 첫째주 전국 소상공인의 평균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의 77% 수준으로 떨어졌다. 업계 관계자는 “매출이 100만원에서 77만원으로 떨어졌다는 얘기는 대부분 소상공인이 적자를 보고 있다는 의미”라며 “이미 숨 넘어가기 직전”이라고 말했다.

◇이미 신용카드 사용률 80~90%인데

현금영수증 제도는 2005년부터 시행됐고 국세청은 2010년 변호사, 회계사, 병원, 학원, 골프장 등 32업종을 처음 의무 발급 대상으로 지정했다. 이후 수시로 업종을 추가해왔는데 이제 영세 소상공인이 몰린 업종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의무발행 제도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정원석 소상공인연합회 본부장은 “이미 거래의 80~90%가 신용카드로 이뤄지고 있다”며 “사실상 실효성도 없는데 왜 굳이 이 시점에서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소상공인들 사이에선 “현금영수증을 무조건 발급할 테니 1000원짜리 물건 살 때도 신용카드를 무조건 받아야 하는 ‘카드 의무수납제’를 손봐 달라”는 얘기도 나온다.

국세청 관계자는 “우리도 소상공인의 어려움은 이해하지만 정확하게 세금을 매기는 것이 국세청의 일”이라며 “소비자 입장에선 소득공제율이 높은 현금영수증을 받을 수 있는 가게가 더 늘어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날 통화한 소상공인 중에선 배신감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 영등포구에서 철물점을 하는 김모씨는 “정부가 소상공인·자영업자한테 3차 재난지원금을 앞당겨 지급하겠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는데 배신감마저 느껴진다”며 “소상공인 현장을 좀 들여다봐 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