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2034년까지 국내 전력 수급 전망과 발전설비 계획을 담은 9차 전력수급 기본 계획(9차 계획)이 4차 산업혁명과 탄소 중립이라는 전력 소비 증가 요인을 외면한 채 전력 수요를 지나치게 낮춰 잡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탈(脫)원전이라는 정치적인 목표가 수급 전망을 왜곡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4차 산업혁명·탄소중립 고려는 ‘다음에’

정부는 24일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에서 9차 계획에 대한 공청회를 열었다. 9차 계획은 건설이 중단된 신한울 원전 3·4호기를 전력 공급원(源)에서 배제하고, 현재 가동 중인 원전 24기 중 11기를 2034년까지 폐쇄하는 내용이 핵심으로, 탈원전 ‘대못’을 박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전문가들은 9차 계획이 전력 수요 증가세를 지나치게 낮춰 잡았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최근 5년간 국내 전력 소비량 연평균 증가율이 1.7%로 지난 2010~2014년 평균 증가율 3.9%와 비교해 하락 추세라며, 2034년까지 국내 전력 소비량이 연평균 0.6%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글로벌 에너지 컨설팅 기업인 우드매켄지는 2050년까지 한국의 전력 소비량이 연평균 2.9%씩 늘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망 대상 기간이 다르긴 하지만 정부 증가율 전망치가 해외 전문기관이 전망한 수치의 5분의 1 수준으로 낮은 것이다.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도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5G 이동통신에 기반한 4차 산업혁명과 탄소 배출 감축을 위해서는 전력 소비량이 2050년까지 최소 두 배 이상 늘어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수송·건물 등 전 부문에서 석유·가스 등 화석연료 대신 전기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우드매켄지가 지난달 발표한 ‘한·중·일 탄소 중립에 관한 보고서’도 한국이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이루기 위해선 전력 수요량이 현재의 세 배 이상으로 늘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범진 경희대 교수는 “정부가 탈원전을 밀어붙이기 위해 전력 수요를 지나치게 적게 전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정부는 이번 계획에서 “4차 산업혁명이 최대 전력 수요에 미치는 영향은 구체적으로 수치화하지 못했다”며 “그에 따른 전망은 다음 전력수급계획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4차 산업혁명과 탄소 중립에 따른 전력 수급 계획은 아예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여름과 겨울마다 최대 전력 수요가 정부의 수급 계획을 초과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2017년 8차 전력수급계획에서 그해 겨울 피크타임의 최대 전력 수요를 85.2기가와트(GW)로 전망했지만, 실제 수요는 88.2GW까지 치솟았다. 2018년 여름과 지난해에도 여름 실제 전력 수요가 전망치보다 각각 6.4GW, 3.2GW 초과했다. 전력은 수요와 공급이 매순간 일치하지 않으면 대규모 정전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 정전이 일어나면 반도체 등 첨단 산업은 천문학적 피해를 보게 된다.

◇선진국 원전 비율 늘리는 동향은 빼

9차 계획에서는 원전 비율을 오히려 늘리고 있는 선진국의 최신 동향도 누락됐다. 9차 계획은 독일·미국·프랑스·영국·일본을 거론하며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을 위해 석탄 발전 감축, 재생에너지 확대 등 친환경 에너지 전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 중”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전 세계적 탈원전 붐을 일으킨 일본은 원전 발전 비율이 2012년 전체 발전량의 1.5%에서 2017년 3.1%가 돼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미국·영국도 증가 추세다. 프랑스는 같은 기간 다소 줄긴 했지만 여전히 70.9%를 원전이 차지하고 있다. 특히 영국 정부는 백서에서 “진일보한 원전 기술과 청정 수소 기술 개발 등을 위해 10억파운드(약 1조5000억원)를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드매켄지는 “한국이 탄소 중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재 26GW인 원전 설비 용량을 2050년엔 41GW까지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규 원전 10기 이상을 더 지어야 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