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분명히 설명을 드렸는데 고객님이 잊으신 것 같은데요….”

“무슨 소리요? 나한테는 독일이 망하지 않는 한 안전하다면서, 정기예금보다 금리가 두 배니까 걱정 말고 만기 때 찾으러 오라 하지 않았소?”

2년 전 독일 국채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에 1억원을 투자했다가 8000만원을 날린 김모(70·성남시 수정구)씨는 아직도 가입할 때를 생각하면 혈압이 오른다. 예금 만기가 돌아와 재예치하러 갔다가 안전한 상품이라면서 시키는 대로 서명했다가 낭패를 봤다. 김씨는 “내가 그때 녹음만 해놨어도 나를 속인 은행한테 100% 배상을 받아내는 건데, 녹음한 게 없어서 안타깝다”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씨와 비슷한 사례는 확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3200여 투자자가 투자금 절반 이상을 날린 DLF 사태, 라임·옵티머스 등 각종 사모펀드 불완전판매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금융소비자보호법’(이하 금소법)이 제정돼 올 3월 25일부터 시행되기 때문이다.

7일 서울에 있는 신한은행 한 지점의 투자상품 판매 창구에 녹음장치(오른쪽 아래 검은색)가 설치돼 있다. /신한은행

◇”고객님, 녹음을 시작하겠습니다”… “못 들었다” 안 먹히는 금소법이 온다

금소법 시행에 따라 앞으로 은행, 증권사 등 금융 상품 판매사들은 판매 규제를 어기고 상품을 팔면 전체 판매액 또는 투자액의 최대 50%까지 ‘징벌적 과징금’을 내야 한다. DLF를 8000만원어치 팔았다가 문제가 됐다면 최대 4000만원까지 과징금을 내야 한다는 뜻이다. 또, 판매를 한 직원도 최대 1억원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

은행들이 가장 떨고 있는 조항은 ‘손해배상 입증책임’ 부분이다. 소비자가 상품에 대해 제대로 듣지 못했다며 ‘설명의무 위반’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을 때 금융사가 과실이 없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각 은행은 전국 지점 투자 상품 판매 창구에 녹음 시설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신한은행과 하나은행이 새해부터 녹음 장치를 완비했고, 기존에 일부 투자자에 한해 녹음을 하던 다른 은행들도 모든 고객에게 녹음을 확대할 채비를 하고 있다.

앞으로 은행에서 원금이 보장되는 예·적금 상품이 아닌, 펀드나 주가연계증권(ELS) 같은 원금 비(非)보장형 투자 상품에 가입할 때 소비자들은 “고객님, 금융소비자보호법에 따라 지금부터 상담하는 모든 내용은 녹음·녹화될 수 있으니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와 같은 멘트를 듣게 된다. 이 멘트는 은행원이 직접 할 수도 있고, 녹음된 기계음으로 흘러나올 수도 있다.

우리은행은 그동안 일부 상품이나 일부 고령층 고객에 대해서만 녹음을 해왔는데, 금소법 시행 이후엔 기계가 읽어주는 TTS(Text to Speech) 방식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사람이 직접 읽어주다 보면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까지 완전히 제거하려는 조치”라고 했다.

◇덮어놓고 “네” 하면 큰코다친다

그런데 고객을 보호하기 위한 금소법이 자칫 은행에 면죄부만 주고 오히려 고객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소지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녹음된 것을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저희는 제대로 다 설명했는데 고객이 못 알아들은 것”이라고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절차대로 설명을 다 했지만, 고객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네’ 라고 대답하거나 서명한다면 이제 사후구제를 받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회장은 “이제는 소비자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판매자도 상품을 완전히 숙지해야 하지만, 소비자 자신도 내용을 완전히 알고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분쟁 전문 변호사들도 금소법 시대를 맞아 고객들이 첫째로 명심할 일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를 꼽는다. 법무법인 한누리 구현주 변호사는 “판매사들이 종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금융 상품 위험성에 대해 고객에게 명확히 고지를 했고 고객들이 이해했다'면서 녹음 자료 등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고객들도 ‘가입하려면 대답하셔야 한다’는 식의 재촉을 받고 의례적으로 ‘네'라고 답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DLF 관련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에서도 가입자의 투자 성향에 적합한 상품인지, 설명 의무를 다했는지, 설명을 듣고 이해했는지 등이 손실 배상 비율을 갈랐다. 투자 경험이 없고 귀도 잘 안 들리는 79세 치매 노인에게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상품을 팔면서 “다 이해하셨죠?” 한 경우는 역대 최고인 80% 배상률이 나왔지만, 투자 결정을 은행원에게 맡기거나 “기존에 이런 상품 가입해본 적 있다”면서 설명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은 경우에는 40~55%의 낮은 배상률이 결정됐다.

박기억 변호사는 “보험 텔레마케팅 상품의 경우 너무 빨리 묻거나 알아듣기 어렵게 말한 경우에는 설명의 효력이 없다는 기존 판례가 있다”면서 “은행에서 판매하는 상품의 경우에도 제대로 고지받았는지가 앞으로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