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경남 창원 두산중공업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마산합포구 가포신항 배후공단. 원전 부품 생산 업체 에스에이에스(SAS) 본사 사무동 앞엔 창업주 박현철(55) 대표이사가 세운 비석이 있었다.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기업으로 천년을 이어가자’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천년을 가자던 이 회사 2만평 부지의 공장과 야적장은 텅 비어 있었다. 원전 핵심 부품인 셸(shell·원자로 내부 구조물)을 가공해 두산중공업에 납품해 오던 이 회사는 이 분야 국내 점유율 1위 업체였다.

“장비 다 팔고, 공장도 곧 매각합니다” - 6일 오전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에 있는 원전 부품 업체 에스에이에스(SAS) 공장에서 회사 관계자가 텅 비어있는 내부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이 회사 박현철 대표는“국가에 헌신한다는 사명감으로 일했다”며“지금이라도 다시 원전의 불을 붙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환 기자

이 회사 직원은 2014년 원전 수출 1호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용 부품을 만들 때만 해도 350여 명이나 됐지만 지금은 겨우 12명만 남았다. 현 정부 들어 새 원전 건설이 전면 중단되면서 일감이 끊긴 탓이다. 국내에서 건설 중인 마지막 원전인 신고리 5·6호기 납품이 끝나면서 작년엔 원전 관련 수주가 ‘제로(0)’였다. 반도체·디스플레이 부품 납품 등 부업으로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남아있던 장비를 하나둘 팔고 회사는 2018년 10월 기업 회생 절차에 들어갔다. 결국 이달 중순 부산의 한 선박 부품 회사에 팔린다.

창업 28년 만에 회사 문을 닫게 된 박현철 대표는 “5년짜리 정부가 세계 최고 원전 기술 강국을 만들겠다는 자부심으로 공장을 일궜던 기업인들 눈에서 피눈물 흐르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 세계는 탄소 중립을 위해 다시 원전 붐을 일으키는데 왜 우리만 거꾸로 가는 거냐”라고 말했다.

◇몰락하는 중소 협력 업체

‘한국 원전의 메카’인 창원 지역에서는 중소 협력 업체들이 고사(枯死)하고 있다. 국민의힘 윤한홍 의원이 원전 업계에서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경남 소재 270여 원전 협력 업체의 매출은 2016년 16조원대에서 2018년 10조원대로 추락했다. 같은 기간 고용 인원은 2만3000명에서 1만9700명으로 14% 감소했다. 국내 마지막 건설 원전인 신고리 5·6호기 납품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지난해 매출과 고용 인원은 훨씬 더 심각한 감소세를 보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원자로와 증기 발생기 등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드는 경남 김해의 원전 부품 업체 A사 공장에선 기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중고 가격이 50억원 넘는 금속 절삭기 등 고가 장비가 멈춰 있었다. 일감이 많을 때는 주야간 2교대로 정신없이 일했지만, 원전 일감이 끊긴 작년 하반기부터는 한 달에 보름씩 교대로 일한다. 직원들 급여도 반 토막 났다. 2014~2015년 40억원대였던 매출은 작년 절반 이하로 곤두박질쳤다. A사 대표 김모(66)씨는 “이삭줍기식으로 일감을 찾아서 겨우 운영하고 있다”며 “올해까지 최대한 견뎌보고 안 되면 회사를 접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원전 수출은 희망 고문일 뿐”

“원전 수출을 지원하겠다”는 정부에 대해서도 부품 업계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국내에서는 위험하다면서 다른 나라 가서는 안전하니 우리 제품 사라면 사겠느냐”며 “부품 공급 업체들은 줄도산하고 전문 인력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누가 한국산 원전을 사겠느냐”고 말했다.

창원에서 2대(代)째 원전 부품 공장을 운영 중인 B사의 최모(39) 부장은 “예전엔 신한울 3·4호기 공사 재개나 수출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이젠 그런 기대도 없다”며 “희망 고문만 당해왔다”고 했다. 그는 “신문 배달하면서 돈을 모아 창업한 아버지는 요즘 ‘공장에 투자한 돈으로 부동산이나 주식을 했으면 네게 빚만 잔뜩 남겨주진 않았을 텐데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신다”고 했다.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는 “원전 산업 생태계 붕괴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며 “부품 업체들이 무너지고 전문 인력이 떠나면 수십 년간 공들여 일군 세계 최고 기술이 사장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