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와 나오키 차장, 도쿄센트럴증권으로 출향(出向)을 명한다!”

일본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半沢直樹)’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드라마는 지난 2013년 일본에서 40%가 넘는 시청률을 올렸고, 지금까지도 직장 드라마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주인공 한자와 차장은 은행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상사들의 부패와 악행을 밝혀내고 시원한 복수극을 펼친다. 하지만 승진은커녕 ‘출향’을 당하는 결말에 많은 일본인이 충격을 받았다.

출향은 기존 기업의 소속을 유지한 채, 자회사나 다른 회사에 적(籍)을 옮겨 그 회사 직원처럼 일하는 제도다. 한국의 ‘파견’과 비슷하지만, 일본에선 잘못을 저지른 직장인을 내쫓는 일종의 ‘귀양살이’다. 출향되면 승진길이 막힌 채 본사 후배들에게 업무 지시를 받다 정년에 쓸쓸히 물러나는 것이 보통이다. 일본 기업 문화의 보수성과 출세지향적 분위기를 상징하는 인사제도 중 하나다.

일본 기업들의 인사혁신 / 일러스트=김영석

그러나 일본 기업에 인사혁신 바람이 불면서 출향의 의미가 바뀌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 제조업체 도시바(東芝)는 올해부터 이 회사의 경영 간부(임원) 후보를 스타트업과 관공서, 중견기업 등 다른 회사에 1~2년간 출향시키기로 했다. “파견 간 회사에서 얻은 경험과 인맥이 본사에 돌아와 자산이 되고, 향후 실적 개선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유다. 도시바는 자금 조달과 신규 사업 개척 등 본사에선 경험하기 힘든 직무를 중심으로 출향 기회를 만들고, 올해 10명 안팎으로 시작해 향후 수십명으로 늘려가기로 했다. 출향이 ‘벌(罰)’이 아닌 회사 울타리를 넘어 이뤄지는 인재 양성 코스로 바뀐 것이다.

◇낙오자 아닌 엘리트가 파견 간다

세계적 전자전기 부품 업체인 무라타제작소(村田製作所)는 지난해 9월부터 내부 직원 2명을 스타트업에 출향시켰다. “직원들이 (무라타제작소라는) 큰 조직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으면, 일을 배우는 속도가 더디다”는 것이 이 회사의 판단이다. 반면 스타트업에선 직원 개개인이 담당하는 업무 영역이 넓고 의사결정 속도가 빠른 만큼 일을 배우는 속도도 빠르다. 무라타제작소는 이 제도를 ‘조직의 경계를 넘어 배운다’며 ‘월경(越境) 학습’이라 부른다.

파나소닉은 이미 2018년부터 로봇 벤처 회사 등에 10여 명의 직원을 출향 보냈다. 간사이미라이은행은 올해부터 입사한 모든 20대 신입사원이 30대 초반까지 최소 2~3년간 출향 경험을 쌓게 할 계획이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신종 코로나 이후 격변하는 시장 트렌드에 대응할 우수한 직원들을 기르기 위해 이들을 무사수행(타지에서 모험을 통해 경험을 쌓는 것) 보내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고 짚었다.

일본 기업이 시도하는 인사 혁신

실적이 악화된 기업이 직원을 해고하는 대신 다른 기업에 임대하는 방식의 출향도 나타난다. 기업은 인건비를 줄이면서 인재를 유지하고, 직원들은 일자리를 지키는 방법이다. 전자제품 판매 대리점 노지마는 일본 항공사인 전일본공수(ANA)과 일본항공(JAL)으로부터 출향한 직원 300명을 고용했다. 이들은 노지마의 영업점 판매 담당이나 콜센터 업무를 맡는다. 일본 최대 유통업체인 이온(AEON)은 이자카야(일본식 주점) 프랜차이즈 침니로부터 임대받은 직원 45명 가운데 10명을 자사 직원으로 영입했다. 이자카야에서 쌓은 접객과 조리 경험이 수퍼의 생선 판매 코너에서 유용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의 脫연공서열제 선언

지난해 말 별세한 동아시아 전문가 에즈라 보걸(Vogel)이 일본 기업의 고속 성장 비결로 꼽았던 ‘연공서열제’ 역시 줄줄이 퇴출되고 있다. 연공서열제는 근로 연차에 따라 승진시키고, 연봉도 차곡차곡 올려주는 제도다. 한국 기업도 여전히 상당수가 채택하고 있는 제도다. 보걸은 이 제도가 직원들에게 안정적인 미래를 제시해 애사심을 이끌어낸다고 봤다. 하지만 조직원의 혁신과 도전 의식을 약화시키고 자리 보전에만 집착하게 한다는 비판이 커지면서 원조 국가인 일본에서도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올해 도요타(Toyota)가 연공서열에 따른 임금 인상을 폐지키로 했고, 150주년을 맞는 미쓰비시케미컬도 100% 직무 성과로 연봉을 결정하는 성과연봉제를 도입한다. 지난해 7월엔 후지쓰·히타치도 성과 연봉제를 폐지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도요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성과 평가제 도입에 나섰으나, 업무 범위와 평가 기준이 불명확해 자칫 직원 불만을 키우고 팀워크를 해칠 수 있다며 연공서열제를 유지해 왔다.

보수적 금융권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 손보재팬은 지난해 말 연공서열제를 없애며 ’20대 과장’의 등장을 목표로 내걸었다. 일본 금융권에서 과장이 되려면 40세를 넘겨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 위해 승진 심사 과정을 대폭 축소하고 상사 재량으로 ‘특급 승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인사표에 승진까지 재임 연수 기간을 적어놨던 관행도 없애 능력과 실적만으로 승진을 심사토록 했다. ‘특명과장’ ‘업무과장’ ‘부장(副長)’ 등 인사 적체로 인한 자리 부족을 해소하려 만들었던 옥상옥(屋上屋) 자리도 모조리 없애고, 직함도 상하관계가 아닌 직무를 나타낼 수 있게 개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