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이 지난 11일부터 문재인 정부 탈(脫)원전 정책 수립 과정의 위법성(違法性) 여부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 이번 감사는 국가 에너지 정책 분야 최상위 계획인 ‘에너지기본계획’을 수정하지 않은 채 탈원전 정책을 공식화한 정부의 정책 추진 과정이 적법했는지를 겨냥한 것으로, 검찰 수사로 이어진 월성 원전 1호기 경제성 조작 의혹 감사와는 별개다.
13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감사원은 지난 11일부터 2주 일정으로 산업부에 대한 감사에 돌입했다. 감사원 관계자는 “산업부로부터 관련 서류를 건네받아 검토하고 있으며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가 완화되면 대면 감사도 벌일 것”이라고 했다.
이번 감사는 2019년 6월 당시 미래통합당 정갑윤 의원이 시민 547명의 동의를 받아 공익감사를 청구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 정 의원은 “탈원전 정책은 대통령 공약 이행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돼 왔다”며 감사를 청구했다. 감사원은 그해 9월 이와 관련한 감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으나, 월성 1호기 관련 감사로 인해 일정이 미뤄져 왔다.
이번 감사 결과, 탈원전 정책 추진 과정이 위법했다는 결론이 나올 경우 막대한 파장이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월성 원전 1호기 경제성 평가가 완전히 조작된 사실이 앞선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난 데 이어 문재인 대통령의 탈원전 공약을 정책화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제대로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결론까지 나올 경우 탈원전 정책의 정당성은 뿌리째 흔들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월성 1호기 조기 폐쇄와 신한울 3·4호기를 포함한 신규 원전 6기 건설 백지화 등 일련의 탈원전 정책에 대해 손해배상 및 배임 여부를 묻는 원전 업계 및 시민단체 등의 민형사 소송이 무더기로 제기될 수 있다.
김기수 변호사는 “법적 근거 없이 탈원전 정책이 집행됐다는 게 감사원 감사 결과라면 탈원전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은 원전 업체 등에 국가가 손해 배상을 해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책순서 뒤집어 탈원전… 위법땐 ‘줄소송’
감사원이 11일 산업통상자원부를 상대로 시작한 감사는 탈(脫)원전 정책 수립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됐는지를 따져보는 것으로, 현 정부 탈원전 정책 자체가 타당한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사원이 탈원전 정책 수립 과정에 위법성이 있다고 판단할 경우 그동안 정부가 밀어붙여온 탈원전 정책의 존립 근거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 이 경우 탈원전의 직격탄을 맞은 원전 업체들이 “탈원전 정책으로 피해를 입었으니 정부가 배상하라”며 소송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는 등 상당한 후폭풍이 일 전망이다.
◇탈원전 정책 수립 적법성 판단
감사원이 들여다보는 것은 탈원전 정책의 수립 과정이다. 정부는 전 정권에서 수립된 2차 에너지기본계획(에너지 분야의 최상위 법정 계획)을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탈원전 정책이 담긴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세웠는데, 이 과정의 적법성 여부를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에너지기본계획(에기본)은 국무회의 의결 사안으로 5년마다 수립한다. 2년 주기의 전력수급기본계획(전력계획)은 산업통상자원부가 확정하는 것으로 에기본에 근거해서 세워야 한다. 원전을 포함한 발전소의 건설·폐쇄도 에기본 틀 안에서 추진돼야 한다. 이 절차대로라면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 확정된 2차 에기본을 수정하거나 2019년 3차 에기본을 수립한 다음 탈원전 계획을 세우는 게 맞는다. 하지만 현 정부는 2차 에기본의 수정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출범 첫해인 2017년 10월 국무회의에서 탈원전 로드맵을 채택하고 그해 12월 탈원전을 공식화한 8차 전력 계획을 확정했다. 이어 2019년 6월 정부는 2040년까지 원전을 크게 줄이고 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을 늘린다는 내용의 3차 에기본을 확정했다. ‘정부 로드맵 수립=>전력계획 확정=>에기본 확정’ 순으로 뒤집혀 진행된 셈이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 상위 계획(에기본)과 하위 계획(전력 계획)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2차 에기본에서는 2035년 원전 비율 29%를 목표치로 내세웠다. 하지만 8차 전력 계획에서는 2030년 원전 비중이 11.7%로 축소됐다.
정범진 경희대 교수는 “정부는 모든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탈원전이란 답을 정해 놓은 채 거기에 에기본과 전력 계획을 끼워 맞췄다”며 “시행령부터 정해놓고 거기에 맞게 법률과 헌법을 제정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감사 어떻게 촉발됐나
2019년 6월 당시 정갑윤 의원 등이 청구한 공익 감사 대상은 청와대와 정부의 직권 남용, 탈원전으로 인한 한전의 적자 경영과 해외 원전 수주 곤란 등 4개 사항이었다. 이에 대해 감사원은 그해 9월 다른 3개 사항은 위법하다고 보기 어렵다며 종결 처리하고, 탈원전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담은 3차 에기본 수립 절차가 적정했는지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정부·여당의 조직적·대대적인 저항으로 월성 1호기 감사가 늦어지면서 이번 건에 대한 감사도 미뤄져 왔다. 지난해 월성 1호기에 대한 감사가 마무리되고,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이제야 감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 감사 결과, 탈원전 정책 추진 과정이 위법했다는 결론이 나오면 탈원전 추진 과정에서 수천억원의 손해를 입은 두산중공업과 도산 위기에 내몰린 원전 부품 협력 업체들이 정부 등을 대상으로 배임과 손해배상 등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있다. 공정률 10%인 신한울 3·4호기 건설엔 부지 매입과 주(主)기기 사전 제작 등에 이미 7900억원 정도가 투입됐다. 이 중 4927억원은 두산중공업이 원자로 설비와 터빈발전기 제작 등에 투입한 돈이다. 경남 소재 270여 원전 협력 업체들은 일감이 끊기면서 매출이 2016년 16조원대에서 2018년 10조원대로 추락했다.
☞에너지 기본계획
향후 20년 동안의 국내 에너지 수요와 공급 전망, 에너지 확보 및 공급 대책, 에너지 관련 기술 개발 계획 등을 망라한 에너지 분야 최상위 법정 계획. 5년마다 수립하며 국무회의에서 심의·확정한다.
☞전력수급기본계획
향후 15년 동안의 국내 전력 수급 전망과 발전 설비 건설 계획 등이 포함된 전력 정책. 2년 주기로 전력정책심의회를 거쳐 산업통상자원부가 확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