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삼성물산, 포스코, CJ대한통운과 4대 금융지주사에 사외이사를 추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국민연금이 민간 기업에 사외이사를 추천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국민연금 몫의 사외이사 추천 주장의 핵심은 공룡급 주주인 국민연금이 가입자인 국민을 대신해 청지기처럼 충실하게 국민연금 자산을 운용하는 이른바 ‘스튜어드십'을 제대로 실행한다는 차원에서 각종 문제가 있는 기업에 사외이사를 보내서 감독을 하자는 것이다.

지난달 29일 열린 국민연금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참여연대 소속 위원이 노동계 등 6명 위원의 동의를 얻어 “삼성물산 등에 사외이사를 추천해야 한다”는 안건을 올린 것이 발단이다. 그 뒤로 기금운용위원회 산하 기구인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가 지난 5일, 9일, 16일 세 차례나 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했다. 반대 의견에 막혀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일러스트=김성규

◇”문제 기업에 사외이사 보내자”

1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기금운용위원회 멤버인 참여연대 소속 이찬진 변호사는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등 7개 기업 중 2개 기업에 대해서는 사외이사 선임을 제안해야 한다”는 안건을 제안했다. 삼성물산은 지배구조 문제, 포스코와 CJ대한통운은 산업재해를 이유로 들었다. 신한·KB·우리·하나 등 4대 금융지주사는 지난해 터진 사모펀드 사태를 초래했기 때문에 이사회에 국민연금이 추천한 사외이사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날 기금운용위원장인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이 코로나 확진자의 밀접 접촉자로 분류돼 참석하지 못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고, 경영계 위원 등도 강하게 반발하면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후 기금운용위는 이 사안에 대한 검토를 수탁자책임위에 넘겼는데 “현행 국민연금 내부 규정과 절차상 부적절하다”는 반대가 나오면서 3차례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내지 못했다. ‘국민연금 기금 국내주식 수탁자 책임 활동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지배구조나 사회적 책임 등에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 기업에 대해 비공개 대화를 통해 개선을 요구하고, 1년간 개선되지 않으면 사외이사 선임 등을 추진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주주 제안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외이사 선임 등 주주 제안의 내용을 검토하는 것이 수탁자책임위의 역할을 벗어난다는 지적도 있었다.

마지막 회의였던 지난 16일 회의의 경우는 전날인 15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포스코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포스코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스튜어드십 코드를 제대로 시행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정치적 압박 논란까지 불거졌다. 당시 회의에서 일부 위원들은 “국민연금 투자 방향에 대해 정치권에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부적절하며, 우리가 절대 여기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들 “이런 식으로 압박하면 어쩌나”

증권업계와 산업계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자본 시장과 경영계에서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주주 활동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는 반응도 나온다. 사외이사 선임 등의 주장은 ‘연금 사회주의(연기금을 동원해 기업 경영에 간섭하는 것) ’ 등에 대한 우려만 키우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박래수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국민연금이 필요하다면 의결권 행사 등 주주로서 권한을 행사할 수는 있어야 한다”면서도 “당장 논란이 되는 기업에 대해서 ‘손봐 주겠다’는 식으로 압박하는 모습이 되는 것이나 정치권에서 ‘국민연금이 역할을 하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불필요한 오해만 키울 수 있다”고 했다.

수탁자책임위는 19일 회의를 열어 사외이사 추천 안건에 대한 입장을 최종 정리할 예정이다. 이렇게 정리된 수탁자책임위의 입장은 24일 열리는 기금운용위에 제출된다. 하지만 기금운용위가 24일 사외이사를 추천하자고 결정해도 올해 3월 주주총회에서는 반영되기 어렵다. 상법상 주주총회 6주 전에는 주주 제안 내용이 전달되어야 하는데, 이미 대부분 기업들의 주총이 6주 이내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다만 기금운용위에서 올해 ‘문제가 있는 기업에 사외이사를 추천하자’고 결론이 내려지게 되면 당장 내년 3월 주주총회에서 일부 기업에 대해 사외이사 추천 등이 이뤄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간 ‘기금 운용의 독립성'을 주장해왔던 복지부가 이 사안을 통과시키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어, 24일 회의에서 이 안건이 통과될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