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수도권의 한 골프장 레스토랑. 메뉴판의 원산지를 확인한 장승열(34)씨가 “여기도 중국산 김치를 쓴다”며 김치 접시를 슬그머니 밀어내자 함께 아침을 먹던 일행들도 아예 손을 대지 않았다. 장씨는 “최근 비위생적으로 김치를 절이는 중국 김치 공장 동영상을 본 뒤로 식당에 가면 김치 원산지부터 확인한다”며 “중국산 김치라면 아예 젓가락을 못 대겠다”고 말했다.
중국발(發) 김치 파동이 한국 김치 소비 시장을 흔들고 있다. 비위생적인 환경의 중국 김치 공장 영상이 공개되면서 중국산 김치를 쓰는 식당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영상에는 거무튀튀한 물에 절여진 배추가 녹슨 포클레인으로 옮겨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알몸의 인부가 염장통에 들어가 맨손으로 배추를 주무르는 모습도 보인다. 반면 한국산 김치를 제조하는 대기업들은 ‘파오차이(泡菜)’라는 중국식 명칭으로 중국 수출용 제품을 판매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중국산 김치 꺼리는 사람 늘어
국내 일반 음식점들은 중국산 김치를 쓰는 경우가 많다. 국산 김치와 중국산 김치의 가격이 적게는 5배, 많게는 7배 이상 차이 나기 때문이다. 수입량도 꾸준히 늘어 작년 김치 수입액은 1억5242만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수입된 김치의 99%는 중국산으로, 일반 음식점 10곳 중 8곳이 중국산 김치를 쓰는 것으로 업계는 추정한다. 코로나로 매출 타격이 큰 상황에서 중국 김치 공장 영상이 ‘중국산 김치 포비아’까지 부추기면서 김치가 주재료인 김치찌개 등을 파는 식당들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수원에서 김치찌개 전문점을 하는 한 식당 업주는 “하루 20건 정도였던 배달 주문이 5건으로 줄면서 매출이 절반 이상 줄었다”고 말했다. 소상공인·자영업자 68만여명이 활동 중인 인터넷 카페에도 “중국산 김치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손님이 줄었다”는 글들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중국산 김치 포비아가 확산하자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해당 영상에 나오는 배추는 수출용이 아닌 것으로 주중 한국대사관에 확인했다”고 밝혔지만, 논란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는 모양새다.
중국산 김치가 한국 시장을 장악한 것은 대규모 납품이 가능한 업소용 김치 시장에 대기업이 진입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2011년, 김치가 중소기업 적합 업종으로 지정된 데에 이어 2018년 말 생계형 적합 업종으로 지정되면서 대·중견기업의 업소용 김치 시장 진출이 불가능해졌다. 업계에서는 “영세한 중소 김치 업체는 현실적으로 중국산 배추를 쓸 수밖에 없고 가격 경쟁력도 중국산에 밀린다”며 “대량생산 시스템을 갖출 수 있는 대기업이나 중견기업들의 시장 진출을 막은 사이 중국산이 업소용 김치 시장을 장악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외국처럼 반찬도 접시당 비용을 따로 받거나 김치찌개 같은 한식 가격을 현실화하는 방식이라면 식당에서도 국산 김치를 사용할 수 있다”는 대안을 내놓기도 한다.
◇우리 기업들은 속수무책
CJ제일제당(비비고), 대상(종가집·청정원), 풀무원 등 국산 브랜드 김치를 판매하는 대기업들도 홍역을 겪고 있다. 대기업 식품 업체들이 중국에서 판매하는 김치와 김치가 들어간 만두·찌개 등에 김치 대신 중국식 절임 채소를 뜻하는 파오차이로 표기해 판매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각에서 “불매하겠다” “국격과 자존심을 버렸다”는 비난이 일고 있는 것이다. 해당 기업들은 “중국의 식품안전국가표준상 김치 등의 제품은 파오차이로 표기해야만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이 김치 소유권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우리 김치를 중국식으로 표기했다는 사실이 소비자들의 민족 감정을 건드린 것이다. 한 식품 업체 관계자는 “한국 정부도 중국 현지 공장에서 제조한 김치는 ‘한국 김치’ 인증을 해주지 않겠단 입장”이라며 “무조건 업체 탓만 하는 건 억울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