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전도사’, ‘해결사’. 권영수(65) LG에너지솔루션(약칭 LG엔솔) 대표이사 부회장에 따라붙는 별명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권 부회장은 최근 16년간 LG그룹 4개 핵심 계열사 CEO를 잇따라 맡아 가는 곳마다 발군(拔群)의 실적을 냈다.
2007년 적자이던 LG디스플레이를 4년 연속 영업이익 1조원을 내는 LCD패널 점유율 세계 1위로 바꾸었고, 2012년부터 4년여 LG화학 배터리사업본부장(사장) 시절엔 회사를 차량용 배터리 세계 1위로 키웠다. 작년 11월 신설 법인인 LG엔솔 CEO에 취임한 그는 6년 만에 배터리 업계에 복귀했다. 업무 장악력과 현장 경영, 신바람나는 직장문화 조성 같은 장기(長技)로 그가 LG엔솔을 다시 세계 1등으로 만들지 재계는 주목한다.
◇두 명의 승부사 CEO, ‘외나무 다리’ 격돌
‘43년 LG맨’으로 승승장구해온 권 부회장은 그러나 이번에 생애 가장 까다로운 적수(敵手)를 만났다. 상대방은 11살 아래인 쩡위췬(曾毓群·54) CATL 회장이다. CATL은 쩡 회장이 2011년 자신의 고향인 푸젠(福建)성 닝더(寧德)에 세운 전기차 배터리 기업으로 현재 시장 점유율 세계 1위이다.
상황은 녹록찮다. 한때 세계 1위였던 LG엔솔이 2위로 점점 밀려나고 있어서다. 2017년 세계 1위에 오른 CATL(중국어 표기로는 寧德時代)은 2021년 한 해에 전기차 배터리 판매량을 167.5% 늘렸다. 이는 같은 기간 75.5% 증가에 그친 LG엔솔을 크게 웃도는 성적이다.
이로 인해 2020년 1.2%포인트였던 두 회사의 세계 시장 점유율 격차는 지난해 12.3%포인트로 벌어졌다. 최근 3년간 영업이익률도 CATL은 14~15%이지만, LG는 높은 원가 부담 등으로 4~5%대이다. 2021년 말 기준 배터리 생산 능력도 LG(155 기가와트시·GWh)보다 CATL(162 GWh)이 더 크다.
◇“2~3류로 추락할 수 있는 아찔한 상황”
지금 같은 상태가 지속되면 LG엔솔을 포함한 한국 배터리 기업 3사 모두 2~3류로 밀려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단적으로 CATL의 지난해 세계 시장 점유율(32.6%)은 국내 3개사 합계(30.4%) 보다 더 높다. “한 순간도 방심(放心할 수 없는 아찔한 상황”(선양국 한양대 에너지공학과 교수)이라는 진단이다.
권영수 부회장은 현역 한국인 전문 경영인 가운데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最高) 실력자로 풍부한 경험을 가진 베터랑이다. ‘세계 1위 탈환’ 특명(特命)을 의식한 듯 그는 지난달 10일 기자간담회에서 CATL을 수 차례 언급하며 “시장 경쟁에서 CATL을 반드시 앞서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복수의 전문가들은 기자와의 취재 인터뷰에서 “LG가 전력투구한다면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국내 증시 사상 최대 규모의 주식 공모(公募·IPO)로 10조원이 넘는 실탄(實彈)을 확보한데다, 세계 시장 지배력·수주(受注) 잔고·품질 등 세 가지 측면에서 LG엔솔이 우위에 있다는 근거에서다. LG가 보유한 배터리 특허는 작년 8월 기준 2만5714건으로 CATL(4796건)을 압도한다.
독일 튀링겐주를 빼면 중국 내부에 모든 생산 시설을 둔 CATL과 달리 LG는 한국·미국·중국·폴란드·인도네시아 등 5개국에 공장을 가동 중이다. 작년 말 기준 수주 잔고액(260조원 vs 223조원)도 LG가 37조원 많다. 중국을 제외한 전기차 배터리 세계 시장 점유율만 보면 LG(36.2%)가 CATL(12.5%) 보다 세 배 정도 높다.
이런 강점을 살려 미국·유럽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중국 시장까지 공략할 수 있다면, LG의 승산(勝算)이 높다는 분석이다. 중국 당국은 2016년부터 자국 기업이 만든 전기차 배터리 제품에 대해서만 보조금을 줘오고 있다. 이런 특혜 조치로 LG엔솔의 중국 비즈니스가 사실상 봉쇄돼 있는 게 가장 큰 약점이다.
◇“기술 앞선 LG, 美·유럽 시장 선점”
이런 상황에서 LG엔솔이 미국 1위 자동차 기업 GM과 합작법인 ‘얼티엄 셀즈’(Ultium Cells)를 세워 미국 전역에 4개 공장을 짓는 미국과의 ‘배터리 동맹’은 유력한 ‘돌파 카드’로 꼽힌다. 2025년까지 연평균 58% 성장이 예상되는 미국 시장에 52억달러를 투자해 선점(先占)함으로써 배터리 원료분야에서 높은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공급망 재구축까지 꾀한다는 포석이다.
윤진혁 SK증권 연구원은 “LG엔솔이 미국에 4개 공장을 완공할 경우 3년 후부터 미국에서 판매되는 전기차의 절반에 LG 배터리가 공급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 부회장이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그동안 LG가 무시해온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생산 가능성을 비친 부분도 주목된다. LFP배터리는 CATL의 주력 제품으로 1회 충전시 주행 거리가 짧지만 가격이 저렴해 중저가(中低價) 전기차용으로 인기가 높다. LG가 LFP배터리를 대량 생산할 경우, 가격 경쟁력을 상당부분 만회할 가능성이 높다.
◇“쩡위췬은 베팅의 귀재이자 승부사”
하지만 중국에서 ‘電池 大王’(배터리 대왕)으로 불리는 쩡위췬 회장이 이끄는 CATL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상하이교통대 출신으로 중국과학원 물리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딴 쩡 회장부터 남다르다. 1999년 광둥성 선전(深玔)에서 휴대폰에 들어가는 리튬이온 배터리 회사를 세운 그는 12개의 특허를 가진 기술 전문가이다.
사무실에는 ‘賭性堅强’(도성견강·승부사 기질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뜻) 네 글자를 붙여놓고 있다. 중화권 매체들은 “방향을 정해놓고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뛰어들어 관철시키는 쩡 회장은 ‘베팅의 귀재(鬼才)’이자, 대담한 승부사”라고 전한다.
CATL의 가장 큰 무기는 혁신과 기술개발력이다. 이 회사의 2020년도 사업보고서를 보면 CATL에는 127명의 박사와 1382명의 석사를 포함해 5592명의 기술 연구개발(R&D) 인력이 있다. 이는 3300여명의 LG엔솔을 능가한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매일 오전 6시~밤12시 근무가 일상일 정도로 CATL 연구진의 업무 강도(强度)는 살인적으로 높다. 그러나 성과를 낸 연구자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센티브를 받는다”고 말했다.
작년 7월 자체 개발해 발표한 1세대 나트륨 이온배터리도 그런 혁신 제품이다. 15분만에 배터리의 80%까지 충전이 가능하고 섭씨 영하 20도에서 90% 이상 에너지 밀도를 유지하면서도 LG엔솔의 주력 제품인 삼원계(NCM) 배터리의 반값 수준이다.
◇殺人的 일하는 CATL...기술 진보 이뤄내
배터리 셀(cell) 제조 공정 단축으로 셀을 내장화하는 ‘셀투팩(Cell to Pack)’, 전기차 차체(車體)와 배터리를 일체화하는 ‘셀투샤시(Cell to Chassis)’ 같은 혁신 기술과 인공지능(AI)·정보통신을 접목한 스마트팩토리 공장으로 품질과 생산 효율 향상도 이뤄냈다. 중국 기업 분석가인 도신(湯進) 일본 미즈호은행 주임연구원은 닛케이(日經)비즈니스 최신호에서 “스마트팩토리 공장 도입을 통해 CATL은 100만개당 1개이던 제품 불량률을 10억개당 1개로 낮췄다”고 밝혔다.
홍대순 글로벌전략정책연구원장은 “CATL이 미국 테슬라의 2022년 배터리 물량을 전량(全量) 수주한 것은 정부 보조금이나 싼 인건비 외에 처절한 혁신 노력으로 기술적 진보를 이뤘기 때문”이라고 했다.
CATL은 ‘중국 내수용’ 꼬리표를 떼고 세계로 진군(進軍)하고 있다. 작년 하반기에만 ‘라이트닝 e모터스’ ‘피닉스 모터카즈’ 등 10여개 미국 전기차 기업과 배터리 공급 계약을 맺었다. 중국을 제외한 세계 시장에서 CATL의 위상도 상승하고 있다. 2020년 1~10월 6.2%(세계 5위)이던 CATL의 점유율은 작년 1~10월 12.5%(세계 3위)로 치솟았다. CATL의 독무대인 중국이 전 세계 전기차의 절반 이상이 팔리는 최대 시장이라는 점도 유리하다.
◇배터리는 녹색 에너지 시대의 ‘쌀’
세계 배터리 시장은 앞으로 매년 최대 30%씩 성장해 2030년에는 300조원 규모로 팽창해 현재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 규모(160조원)를 웃돌 것이라고 글로벌 컨설팅 기업 ‘베인앤드컴퍼니’는 전망한다. 산업화 시대의 철(鐵), 정보화 시대의 반도체에 이어 배터리는 그린(green) 시대의 ‘쌀’로 불린다. 그만큼 대한민국이 포기하거나 물러설 수 없는 차세대 핵심 산업이다.
권영수 부회장과 쩡위췬 회장의 대결은 따라서 한·중(韓中)을 대표하는 ‘승부사 CEO’의 격돌 차원을 뛰어 넘는다. LG그룹의 미래 번영은 물론 한국 산업계의 활로 개척 여부를 보여주는 시금석인 것이다.
기자의 취재에 응한 전문가들은 이런 국면에서 LG엔솔의 CATL 추월(追越) 방책으로 3가지를 꼽았다. 첫번째는 초(超)격차 기술 확보이다. 선양국 한양대 에너지공학과 교수는 “LG엔솔이 CATL의 아성(牙城)을 깨지 못하고 패한다면 한국 산업계에 엄청난 파급이 우려된다”며 “LG엔솔 임직원들이 더 절실한 위기의식으로 중국을 확실하게 따돌리는 초(超)격차 기술을 구현해 내는 게 가장 큰 관건”이라고 말했다.
LG가 만드는 삼원계 NCM 배터리는 니켈·코발트·망간 같은 원자재 가격 상승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이런 취약점을 상쇄하기 위해라도 기술 혁신으로 새로운 돌파구 마련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초격차 기술과 고급 인력 양성 절실”
두번째는 고급 기술 인력 양성과 스타트업 육성을 포함한 배터리 산업 생태계 조성이다. 이상영 연세대 화공생명공학과 교수는 “한국 배터리 3사가 세계적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매년 3000명 정도의 기술 인력이 필요한데 지금은 600명 안팎에 그치고 있다”며 “산학연(産學硏)이 더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배터리 관련 고급 기술 인력을 훨씬 더 많이 배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번째는 중국 시장 진입과 범(汎)정부 차원의 지원·협조이다. 중국 삼성경제연구소(SERI China) 소장을 지낸 박기순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는 “LG엔솔이 세계 1위를 탈환하려면 미국·유럽 시장 점유율 확대 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중국 내수 시장 진출이 필수”라며 “다양한 외교적 노력과 경로를 통해 시장 불공정이 해소된 중국 시장에서 CATL 등과 진짜 승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앞장 서 中 배터리 시장 문 열어야”
한국 산업계에는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는데 성공한 업종과 그렇지 못한 분야가 있다. 반도체와 조선 산업이 전자(前者)라면, 디스플레이는 후자(後者)에 속한다.
기업분석 연구소인 ‘CEO 스코어’의 김경준 대표는 “LG엔솔의 CATL 공략은 한 대기업의 비즈니스를 넘어 K-배터리를 위시한 한국 경제 전체의 국력과 사기(士氣)에 큰 영향을 준다”며 “중국은 물불 가리지않고 기업을 밀어주는 마당에, 한국 정부도 미래 핵심 먹거리인 배터리 산업에 더 관심을 갖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