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성이 커질수록 뒤로 웃는 이들이 있다. 무기를 만들어 파는 방위산업체들이다.
지난달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한 이후 연일 상승세를 보이던 세계 주요 방산업체 주가가 1일(현지 시각) 사상 최고치를 뚫었다. 미국 레이시온 테크놀러지스와 록히드마틴, 영국 BAE시스템스, 독일 라인메탈 등 시가총액 상위 방산업체들은 일제히 종전 최고가를 갈아치웠다. 지난달 23일 주당 92.24달러에 마감한 레이시온은 1일 102.73달러로 11.4% 뛰었고, 록히드마틴 주가는 같은 기간 388.9달러에서 456.61달러로 17.4% 올랐다.
이들 방산주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세계 각국에서 막대한 유동성을 풀어도 꿈쩍 않던 ‘무거운 종목’이었다. 최근 몇 년간 세계가 평화로웠기 때문에 비싼 무기를 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록히드마틴 주가의 경우 2019년~2021년 사이 갈짓자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막무가내 도발이 유럽의 지정학적 위기를 촉발하면서 상황이 180도 변했다. 2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이 국방비 증액을 선언하는가 하면, 그간 군사적 비동맹주의 정책에 따라 중립적 입장이었던 핀란드와 스웨덴이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나서는 등 상황은 방산업체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우리나라 방산기업들 역시 전면전 발발 이후 4거래일 만에 8~20% 급등세를 타고 있다.
◇지정학 위기에…방산주, 불붙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이 운용하는 아이셰어스 미국 항공·방산 ETF(상장지수펀드)에는 1일 하루에만 30억달러(약 3조6230억원)가 몰렸다. 이 펀드는 레이시온, 록히드마틴, 노스럽 그루먼, 제너럴 다이내믹스 같은 미국 대형 방산업체 10개에 투자하는 상품이다. 이 펀드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 순항 미사일이 우크라이나 수도 이우(키예프)에 내리꽂힌 후 개장한 24일부터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협상이 별다른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전쟁이 장기화하는 양상을 보이자 1일에는 주가 상승세가 더 거셌다.
특히 독일의 국방비 증액 선언에 방산업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지난달 27일 의회 연설에서 올해 국방비를 GDP(국내총생산)의 2%까지 증액하겠다고 밝혔다. 2020년에는 1.4%였다. 증가분이 우리 돈 약 30조원 규모다. 여기에 추가로 1000억유로(약 130조원)의 국방 기금 조성 계획도 밝혔다. 이 발표로 독일 최대 방산업체인 라인메탈은 4거래일 사이 주가가 62% 폭등했다.
그간 중립 노선을 걷던 스웨덴과 스위스가 러시아 제재에 합류한 데 이어 냉전 시기 소비에트 영향권이었던 ‘완충국’ 핀란드조차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검토에 나섰다. 이처럼 유럽에 지정학적 대전환이 일어나면서 탈냉전 이후 수십년간 별다른 동력을 찾지 못했던 방산업체들에 모처럼 화색이 돌고 있는 것이다. 투자은행 제프리스의 클로에 르마리 애널리스트는 2일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에서 “각국의 군비 지출이 올해 비약적인 증가를 포함해 향후 5년간 50% 증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방산주도 최고 20% 상승
러시아의 공세에 대항하는 우크라이나군의 주력 무기는 미국산 대전차 미사일 ‘재블린’, 터키산 공격용 무인기 ‘바이락타르 TB2′, 영국·스웨덴 합작 단거리 대전차 미사일 ‘엔로’ 등 최근 서방이 지원한 최신 장비들이다. 대전차 미사일인 FGM-148 재블린은 록히드마틴과 레이시온 합작품으로, 약 2.5㎞의 유효사거리를 갖췄다. 발사 후 150m까지 치솟아 비행하다 표적을 향해 내리꽂히듯 떨어지면서 탱크 등의 가장 취약한 포탑 윗부분을 수직 타격하거나 측면을 관통하는 방식으로 파괴한다. 터키 바이카르사(社)의 드론 ‘바이락타르TB2′는 러시아의 지대공 시스템을 타격하는 등 맹활약하고 있다.
국내 방산기업들도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LIG넥스원(20.1%) 한화에어로스페이스(+19.5%) 한국항공우주(+14.4%) 한화시스템(+8.6%) 등 국내 주요 방산 기업들의 주가는 전면전 이후 2일까지 5거래일 사이 큰 폭으로 올랐다.
정동익 KB증권 연구원은 “폴란드, 핀란드, 노르웨이 등 기존 한화디펜스(한화에어로스페이스 자회사)의 K9 자주포를 도입하기로 한 나라들이 추가 도입하고, 미도입 주변국들도 새로 도입을 검토할 가능성이 크다”며 “방산업체들엔 러시아의 영토 확장 정책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