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베이징모터쇼에 출품된 중국 지리자동차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빈위에. photo AP·뉴시스

중국 최대 민영자동차 회사인 지리(吉利)자동차가 한국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지리차의 전기상용차 자회사인 위안청(遠程)차는 지난 2월 21일 한국의 자동차 부품업체 명신과 협약을 체결하고, 전북 군산의 옛 한국GM 군산공장에서 위안청차의 전기 화물밴 ‘싱샹(星享)’을 생산하기로 합의했다. 지난 2019년 한국GM 군산공장을 인수한 명신은 당초 중국의 신생 전기차 바이톤(拜騰·BYTON)을 군산에서 위탁생산하려 했으나, 바이톤이 2020년 자금난으로 사실상 도산하면서 지리차의 자회사 위안청차로 합작선을 튼 것이다.

앞서 지난 1월 프랑스의 르노자동차도 중국 지리차와 합작으로 한국 시장을 겨냥한 친환경차를 한국에서 생산하기로 합의했다. 한국 시장을 겨냥해 지리차의 소형차(CMA) 플랫폼을 뼈대로 르노가 외관 디자인을 맡은 자동차를 오는 2024년부터 부산 강서구에 있는 르노삼성 부산공장에서 생산키로 한 것. 도미닉 시뇨라 르노삼성 사장은 “합작 모델 생산 결정으로 르노삼성의 차량 라인업이 확대됐고 부산공장의 그룹 내 역할은 더욱 커졌다”며 “새 모델이 국내 자동차산업에 큰 기여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옛 한국GM 군산공장과 르노삼성 부산공장은 고(故)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각각 자사의 자동차 생산거점으로 낙점하고 조성한 국내 자동차 생산거점이다. 한데 대우차와 삼성차의 후신인 한국GM과 르노삼성의 판매량이 줄며 생산물량마저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지자 결국 지리차에 한국 내 생산거점을 내어주는 수순을 밟고 있는 셈이다. 지난 2004년 국내 완성차 생산거점 중 하나인 쌍용차 평택공장을 중국 국영자동차 회사인 상하이자동차가 인수해간 뒤 사실상 중국 자동차 업체의 두 번째 한국 시장 진출이다.

상하이차 이후 두 번째 한국 진출

2004년 쌍용차 평택공장을 인수했다가 5년 만에 다시 토해낸 상하이차와 달리 지리차의 한국 진출은 예사롭지 않다는 지적이다. 중국 4대 국영자동차 회사 중 선두로 중국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성장한 상하이차와 달리 지리차는 리수푸(李書福) 지리그룹 회장이 고향인 저장성에서 창업한 중국 최초 민영자동차 회사로 당초 오토바이를 만들던 곳이다. 자연히 정부보조금으로 덩치를 불린 국영자동차 회사들보다 훨씬 자생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리차는 지난해 중국 자동차 시장에서도 104만대를 판매했다. 전체 완성차 업체 중 판매순위 2위다. 지리차 산하 별도 브랜드인 링크(领克·LYNK) 등의 판매량까지 합산하면 지난해 판매량은 132만대로 중국 독자 브랜드 자동차로는 압도적 1위다. 지리차보다 판매량이 앞서는 곳은 상하이차와 독일 폭스바겐의 합작사인 상치폭스바겐(135만대) 한 곳에 그친다. 중국 베이징차와 현대차의 합작사인 베이징현대의 지난해 판매량(38만대)과 중국 동풍(東風)차와 위에다, 기아의 3자 합작사인 동풍위에다기아의 판매량(15만대)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자연히 지리차의 한국 내 생산거점 구축에 현대차그룹 역시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군산과 부산의 생산거점을 발판으로 국내 자동차 시장 진출을 타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중국 자동차 회사는 비야디(比亚迪·BYD)가 국내 전기버스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를 주력으로 하는 비야디는 지난해 중국에서 72만대를 판매해 지리차(104만대)에 비해 판매량이 떨어진다. 하지만 압도적 가성비를 무기로 국내 전기버스 시장에 진출한 뒤 한국 버스시장을 야금야금 잠식한 바 있다.

지리차는 2010년 볼보를 인수한 이래 해외 유명 자동차 회사를 하나둘 인수하면서 상당한 기술력을 축적한 바 있다. 자연히 해외시장 경험도 비교적 풍부하다는 평가다. 지리는 2010년 18억달러(약 2조1000억원)를 들여 스웨덴 볼보를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2013년에는 영국 런던의 명물 ‘블랙캡’을 생산하는 런던택시회사(LTC)를 인수했다. 2017년에는 영국의 스포츠카 로터스(Lotus)를 인수했고, 이듬해인 2018년에는 독일 메르세데스벤츠의 지분 9.7%를 인수하면서 전 세계 자동차 업계를 경악시킨 바 있다.

한국 시장에서 통할지는 의문

다만 지리차가 한국 시장에서도 통할지는 의문이다. 가성비를 앞세운 지리차는 중국 시장에서도 2~3선 도시에서나 타는 자동차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선전 등 1선 도시에서는 2류차 취급을 당하는 것이 현실이다. 소득수준이 높은 1선 도시들은 폭스바겐, 도요타, 혼다, 현대 등 해외업체와 합작한 베이징차, 상하이차, 광저우차 등 국영자동차 기업들이 이미 움켜쥐고 있는 상황. 이에 지리차는 본사와 생산공장이 있는 저장성을 중심으로 무주공산인 2~3선 지방도시들을 주로 공략해 왔다.

이에 벤츠, BMW 등 독일 명차들의 판매량이 국내 완성차 마이너 3사(르노삼성·쌍용차·한국GM)를 넘어설 정도로 눈높이가 높은 한국 소비자들의 수준을 맞출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벤츠와 BMW는 한국 시장에서 각각 7만6152대와 6만5669대를 판매해 마이너 3사를 모두 제쳤다. 지난해 내수판매 기준으로 르노삼성은 6만1096대, 쌍용차는 5만6363대, 한국GM은 5만4292대를 파는 데 그쳤다.

르노가 지리차와 합작하면서 차량 생산거점으로 르노삼성 부산공장을 택한 것도 2020년 중국 시장에서 퇴출된 탓이다. 2013년 중국의 국영차인 동풍차와 합작해 ‘동풍르노’ 브랜드로 중국에서 차량을 팔던 르노는 중국에서 판매량이 신통치 않아 2020년 지분 전부를 동풍차에 넘기고 중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동풍르노의 중국 시장 퇴출 직전 해인 2019년 판매량은 1만8607대에 불과했다. 이에 새로운 대안으로 지리차를 합작 파트너로 선정해 르노삼성 부산공장을 기반으로 생산하려는 것이다.

지리차도 수년 전부터 브랜드 고급화와 전기차로의 전환에 전사적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 2016년에는 볼보와 합작으로 ‘링크’라는 별도 고급 브랜드를 출범시켰고, 2019년에는 전기차 브랜드 ‘지허(几何·Geometry)’를 새로 선보였다. 또 2021년에는 ‘지커(极氪·ZEEKR)’란 새로운 전기차 브랜드를 연이어 선보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중 링크만 지난해 21만대가량을 팔았을 뿐, 신생 브랜드 지허와 지커는 각각 3만여대와 5500대가량을 판매하는 데 그쳤다. 자동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아무리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도 가성비를 앞세운 저렴한 자동차라는 꼬리표를 떼기가 쉽지 않은 것이 지리차의 최대 고민”이라고 지적했다.

▷더 많은 기사는 주간조선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