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세상의 모든 줄서기, 라인업’입니다. 그동안 텍스트 기사로 전했던 ‘라인업’ 코너가 독자 여러분의 호응에 힘입어 유튜브로도 진출했습니다.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각자 다른 콘텐츠를 만들던 기자와 피디가 좌충우돌 현장을 누비며 사람들이 줄 서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경제·사회 인사이트는 기사로 담아가시고, 핫한 현장 분위기는 유튜브 영상으로 느껴보세요. ☞유튜브 바로가기 [EP.1 원소주가 뭐시여 feat.신문사놈X방송국놈] https://youtu.be/MYf8VFvBf1Y
◇프롤로그: 우리가 라인업에 꽂힌 이유
FOMO(Fear Of Missing Out):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벤처 투자자 패트릭 맥기니스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다니던 2004년 ‘포모’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교내 신문에 기고했다. 포모는 ‘세상 사람들이 나만 빼고 흥미로운 경험을 하거나, 희귀템을 소유한다고 느낄 때 따라오는 상실·불안·압박·소외감’을 일컫는 단어다. 이 개념은 십여 년 뒤 소셜미디어 확산과 함께 큰 주목을 받았고, 요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용어로도 활용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어디 뉴욕뿐일까. 최근 서울 곳곳을 누비며 ‘세상의 모든 줄서기’를 연구 중인 조선일보 라인업 팀은 △천만원 들고 백화점 개구멍에서 잠자는 ‘샤넬 노숙자’ △연차 휴가 내고 아침부터 점심 갈빗집 줄 서는 ‘푸디’(foodie·식도락가) △나이키 조던 골프화 때문에 영하 10도에 풍찬노숙하는 ‘스니커헤드’(sneakerhead·운동화 수집광)를 만나 오픈런의 숨은 의미를 찾아가는 중이다.
‘공산주의 식량 배급제’도 아닌데, 시민들이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자유의지로 가게 앞에 줄을 선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일. 라인업이 줄서기 현상을 쫓기 시작한 건 그래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소비 전쟁’, 문전성시를 이루는 점포 안팎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널려 있다. 몇 가지만 꼽아볼까.
첫째, 줄은 그 자체로 권력이며, 돈이 된다. 둘째, 오픈런은 ‘고립 공포감(포모)’ 만으로는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는 복잡 미묘한 현상이다. 셋째, 줄 세우는 이의 전략과 줄 서는 이의 갈망은 냉소보다 열정이 지배하는 세계다. 그 열기에 한 발짝 다가설수록 우리는 색다른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사설이 길었다. 그래서 이번에 라인업이 찾아간 곳은 뮤지션 박재범이 만들어 화제가 된 전통소주, ‘원소주’ 판매 현장이다.
◇오늘의 줄서기: #박재범 #원소주 #팬덤경제
지난 16일 오전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의 편의점 콘셉트 패션·리빙숍. MZ세대에게 인기 있는 비건 스낵, 캠핑 용품, 스웨트 셔츠 등을 진열해놓은 아기자기한 점포 앞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곳에선 이날 오후 5시부터 뮤지션 박재범이 만든 전통 소주인 ‘원소주’의 2차 판매 행사가 열릴 예정이었다.
앞서 원소주는 지난 2월 25일부터 일주일간 벌인 1차 팝업(임시) 판매에서 소주 2만병을 팔아치우며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여의도 백화점 ‘더현대 서울’ 건물 밖까지 대기 손님이 길게 줄 선 사진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말 그대로 ‘와우 포인트(wow point·감탄사가 나오는 볼거리)’. 여의도를 뒤집은 이 사건으로, 원소주는 일반 소비자들에게 ‘요즘 가장 핫한 술’이라는 인식을 한 방에 심어줬다.
기자는 당초 ‘유명 뮤지션이 나섰으니 잘 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에 큰 관심을 두지 않다가, 뒤늦게 호기심이 발동한 케이스다. 당장 최근 유명인 이름을 달고 나온 F&B(식음료) 상품 중에 ‘박재범 원소주’는 대박치고, ‘이정재 장인라면’은 쪽박을 찬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이날 시작된 2차 행사에서는 5일에 걸쳐 소주 1만병이 풀릴 계획. 현장으로 가 봤다.
◇술 싫어하는데 19시간 기다려 소주 샀다, 왜?
서울 노원구에 사는 편집숍 직원 마형욱(22)씨는 지난 15일 밤 9시30분쯤 가로수길에 도착했다. 박재범의 오랜 팬인 그는 원소주 1차 판매 기간에 현장을 찾았다가 몰려든 인파 탓에 상품을 사지 못했다. 결국 마씨는 2차 행사 전날 밤 낚시 의자를 들고 가로수길로 출동, ‘대기번호 1번’을 차지했다. “Jay Park(박재범의 영어 이름)님이 좋아서 왔어요. 소주는 원래 맛이 없어서 거의 못 마시는데, 원소주는 꼭 마시고 싶었어요.”
16일 오전 9시40분쯤 줄을 선 기자가 받은 대기번호는 24번. 바로 앞에서 줄을 서고 있던 여성 두 명은 ‘1등 마씨’와 비슷한 얘기를 기자에게 전했다. “평소에 술 거의 안 마셔요. 박재범을 좋아해서, 1차 행사 때도 7시간 기다려 구입했죠. 집에서 박재범님 음악 들으면서 한잔 하니 좋았어요.”
그 중 한 팬은 기자에게 “질문에 답을 해줄 테니 음원 사이트에서 Jay Park의 신곡 ‘스밍’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스트리밍(streaming)의 줄임말인 스밍은 좋아하는 뮤지션의 음원 재생 순위를 높이기 위해 노래를 반복적으로 트는 행위를 말한다.
박재범 스밍을 돌리며 줄 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오후 1시가 됐다. 대기 줄은 100명을 훌쩍 넘어섰다. 원소주 측이 이날 판매 물량(800병)을 감안해 인원을 제한했지만, 사람들이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대부분 박재범의 팬이거나 힙합 음악 마니아들이었다. 학교 수업을 빠지고 원소주 오픈런을 선택했다는 한 남자 대학생은 “소주 한 병에 1만4900원(375mL)이란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3만~4만원대였어도 흔쾌히 샀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주회사 영업사원 같았던 열혈팬
이날 줄을 선 팬들은 오래 전부터 소주 사업을 준비했다는 박재범의 행보를 줄줄 꿰고 있었다. 그가 해외 뮤지션과 교류하다 한국 전통 술을 만들기로 다짐한 과정, 외식 사업가 백종원씨와 넷플릭스 소주 다큐멘터리를 찍은 일화, 2018년에 공개한 영어 노래 ‘SOJU (Feat. 2 Chainz)’ 소개부터 이번에 출시한 원소주 브랜드 전략까지 세세하게 알려줬다.
마치 주류업체 영업사원처럼 원소주의 주요 소비 타깃층(30대 직장인), 슬로건(미래를 원하여), 생산 방식(22도 감압식 증류 소주), 즐기는 방식(하루 일과를 마치고 오늘의 작은 성공을 축하하며 미지근하게 마실 것)까지 기자에게 정성껏 홍보했다.
박재범이 좋아서, 박재범이 가치를 쏟아 부은 제품에 많은 돈과 시간을 쓸 준비가 된 열혈팬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는 그들의 자발적 홍보가 박재범과 원소주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원소주=트렌디한 술’이라는 이미지를 남긴 듯했다.
박재범과 함께 상품을 기획한 김희준 원스피리츠 브랜드 매니저는 멀리서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1차 행사에 3만명이 찾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여의도 행사 첫날에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백화점 구석에서 펑펑 눈물을 흘렸죠.”
그는 며칠 뒤 라인업 유튜브 이벤트를 위해 원소주 기획 과정에서 제작했던 ‘습작 라벨’을 조선일보 편집국에 보내왔다. 천 소재로 된 이 라벨 스티커는 포토카드 크기로, 노트북 등에 붙이고 다니기 좋은 ‘레어템’이다. 라인업 팀은 △박재범의 고뇌가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습작 라벨과 △취재 당일 9시간 줄 서서 구입한 원소주를 구독자 이벤트로 증정할 계획이다. ☞자세한 내용은 유튜브 영상 https://youtu.be/MYf8VFvBf1Y
이날 행사에는 DJ 펌킨, 코드 쿤스트, 미노이, 우원재, 기린, 쿠기 같은 뮤지션들이 찾아와 팬들을 즐겁게 했다. 여의도 행사 때처럼 박재범이 현장에 나타나길 기대했던 팬들은 “오히려 좋아”를 연발하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테슬라·애플·스타벅스…팬덤 비즈니스 시대
원소주 오픈런 현장은 요즘 떠오르는 비즈니스 전략인 ‘팬덤 경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 열기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다만 서른 다섯살 뮤지션이 소주 사업가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오랜 기간 다양한 콘텐츠(음원·다큐·소셜미디어·방송 등)로 한국 소주의 가치와 경험을 공유하고, 팬들과 관계 맺어 온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는 출시 직전까지 원소주 병나발 부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올리거나, 칵테일 만드는 방법을 공개하며 팬들과 소통했다.
앞서 언급했던 ‘이정재 장인라면’은 기업이 거액의 모델료를 지급한 스타 연예인을 앞세워 상품 가치를 일방 홍보하는 전통적 마케팅을 벌인 사례다. 지난해 10월 하림그룹은 5년 연구 끝에 출시한 프리미엄 라면 모델로 당시 가장 뜨거웠던 오징어게임 히어로를 발탁했지만, 팬덤 효과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스토리와 맥락이 없는 연예인 마케팅은 좀 더 깊은 교감을 원하는 소비자들을 납득시키지 못한다. ‘The 미식 장인라면’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하림그룹에선 최고위 임원이 물러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요즘 테슬라·애플·스타벅스의 마케팅 성공 사례를 논할 때 따라붙는 용어도 바로 ‘패노크라시(Fanocracy·팬덤이 통치하는 문화)’다. 합리적인 가격에 적당한 품질의 물건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 파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던 시대를 지나, 브랜드로 대동단결하는 팬덤 비즈니스의 세계가 활짝 열리고 있다. 언제든 다른 선택지를 찾아 떠나갈 다수 대신, 소수의 강력한 열성팬을 확보하는 것이 그 출발선이다. 2022년 봄, 여의도와 가로수길을 흔든 ‘원소주 대박 사건’은 그런 팬덤 경제의 한 단면이었다.
#STORY 조선일보 한경진 기자
#VIDEO 스튜디오광화문 송지현 CP·이예은 PD
#유튜브 바로가기 [EP.1 원소주가 뭐시여 feat.신문사놈X방송국놈] https://youtu.be/MYf8VFvBf1Y
[세상의 모든 줄서기, 라인업!]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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