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8일 서울 마포구 마포농수산물시장을 찾은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photo 뉴시스

서울 서대문구의 동네 빵집 ‘이화당제과’. 속에 재료가 많이 든 큼지막한 빵도 5000원을 넘기지 않아 ‘착한 가격’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난 4월 11일, 성인 얼굴만 한 맘모스빵이 3000원인 것을 보고 “이 가격에 파셔도 되느냐”는 기자의 말에 사장은 “학생들이 많아서…”라며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빵집은 1979년 이화여대 후문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 근 10년 동안은 가격을 올리지 않고 버텨온 이곳 사장도 요즘은 고민스럽다. “이제는 가격을 좀 올려야 할 것 같다. 아니면 빵 못 판다.” 지난 2~3월 사이 재료값만 20% 이상 올랐다고 한다. 밀가루, 버터, 옥수수 등 빵에 들어가는 원자재만 오른 게 아니다.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마늘이나 소시지 등도 올랐다. 식재료는 죄다 올랐다고 보면 된다. “아직 얼마나 올릴지는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지만, 만약 재료값이 뛴 만큼 가격을 올리면 3000원짜리 빵은 3600원, 5000원짜리 빵은 6000원으로 껑충 뛰어야 한다.

“빵 가격, 이제는 올려야 할 것 같아요”

인플레이션 쓰나미는 이렇듯 우리 주변을 옭아매며 점점 현실이 돼간다. 지난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년 3개월 만에 최고치인 4.1%를 기록했다. 전년 같은 달에 비해서 모든 상품과 서비스 가격이 평균 4%씩 올랐다는 뜻이다. 지난해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0년 만에 3%대로 진입한 지 6개월이 채 안 됐는데 4%대로 진입했다.

물가가 높아진 원인을 하나로 규정할 순 없다. 여러 대내외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동한 결과다. 코로나19 팬데믹 해결을 위해 세계 곳곳에서 돈을 많이 풀었고 물자와 인력의 해외 이동이 줄면서 글로벌 공급 부족 사태가 나타났다. 전쟁은 고물가에 불을 지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세계의 공급은 더 얼어붙었다. 세계 3위의 원유 수출국인 러시아는 제재를 당했고, 세계 5위 밀 수출국인 우크라이나는 파종을 포기했다. 국제 원유 가격도, 곡물 가격도 오르자 가공식품과 공산품 등도 덩달아 오른다. 한국은행은 최소 7~8월까지는 4%대 물가상승률이 유지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고, 그 이후 상승률도 지난 2월의 전망치인 3.1%를 크게 웃돌 것으로 전망한다.

4.1%라는 숫자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체감 물가는 그 숫자보다 훨씬 높게 느껴진다. 통계청에서 지정한 458개 품목의 평균 가격 상승률이 4.1%라는 뜻인데 여기에는 물가가 내린 품목들도 있다. 떨어진 것 이상으로 상승을 견인한 장바구니 물가는 훨씬 비싸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화당제과’도 마찬가지. 일반적인 빵 반죽을 만드는 데 필요한 밀가루, 달걀, 버터 등의 원자재 중에서는 달걀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격이 올랐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발간한 ‘국제 곡물 4월호’에 따르면 특히 밀 가격이 급등했다. 지난 3월 기준 밀 선물가격은 1t에 421달러로 전월 대비 42.1%나 올랐고, 지난해 같은 달과 비교하면 80.2%나 치솟았다. 우유 가격도 소매점 기준 지난해보다 6~8% 올랐고 버터 값도 올랐다. 빵 종류에 따라 추가적으로 드는 옥수수와 마늘 등 농산물, 가공육 값도 만만찮게 올랐다. “빵 한 개 만드는 데 최소 20%씩은 비싸졌다”는 빵집 사장의 말은 자영업자의 흔한 엄살이 아닌 현실이다.

취약계층 먼저 때리는 ‘인플레 쓰나미’

물가가 오를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인플레이션은 위험하다.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너무 넓다. 자영업자, 직장인 등 직업을 가리지 않는다. 청년층부터 노년층까지 세대도 구분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인플레이션은 비싼 가격표를 들이민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경제학)는 “성장이나 실업은 어느 산업군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일부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물가는 모든 세대와 모든 계층에 적용된다. 물가와 금리를 ‘큰 칼’이라고 부르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방어할 수 있는 보호구가 빈약할수록 칼날이 먼저 몸에 닿는다. 그래서 빈곤층은 ‘인플레이션(Inflation)’이 일으키는 ‘I-쓰나미’에 가장 먼저 휩쓸리는 피해자가 된다. 누군가에겐 의미 없는 500원, 1000원이 이들에게는 너무 크게 다가올 수 있어서다.

실제로 최근 취약계층을 위해 제공되는 무료급식소를 찾는 사람은 부쩍 많아졌다. 서울 청량리역 부근에서 무료급식사업 ‘밥퍼나눔운동’을 운영하는 박종범 다일공동체 실장은 현장에서 그런 변화를 느낀다. “최근에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밥을 드시러 오시는 분들이 늘어났다. 원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의탁 노인이나 노숙인이었는데 최근에는 자영업을 하던 사람이나 청년, 중장년층까지 오고 있다.”

고물가는 무료급식소를 찾는 이들만 공격하지 않는다.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는 이들도 고민스럽다. 음식 재료, 도시락 용기 등도 줄줄이 가격이 올랐다. 박 실장은 “음식 재료를 도매로 구매하고 있긴 하지만 이전과 비교해보면 도시락 하나당 1000원 정도씩 올랐다. 언제부터라고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3500원 하던 도시락 단가가 차츰차츰 올라 지금은 하나당 4500원이 든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하루에 제공하는 도시락은 1000개 정도다. 부담은 점점 누적되는데 찾아오는 사람은 늘고, 후원금은 줄어드는 삼중고(三重苦)를 겪고 있다.

위험하다고는 하지만 인플레이션이 누구에게, 얼마나 피해를 줄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2020년 12월, 물가를 다룬 커버스토리 기사에서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에 둔감한 이유로 “세계경제가 1980년대 이후 장기간의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강모씨는 서울 광진구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님’이다. 여느 자영업자들처럼 최근까지 매출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아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는 ‘은퇴 자산 3억원’을 목표로 매달 일정 금액을 적금으로 붓고 있다. “그래야 최소 은퇴 후 20년을 놓고 봤을 때 아내랑 월 125만원씩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강씨의 계획을 일그러지게 한다. 고물가가 지속되면 화폐의 실질가치는 하락한다. 125만원으로 10개 살 수 있던 물건을 20년 뒤에 5개밖에 사지 못하는 경우를 만난다면 당황스럽다. 물가상승률이 3%대로 계속 유지된다고 가정할 경우 강씨의 은퇴 자금 3억원은 불과 5년 뒤 2억5000만여원의 가치밖에 가지지 못한다. 125만원이던 한 달 생활비의 실질 가치는 월 100만원 남짓으로 줄어든다.

지난 4월 14일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 조합원들이 유가 폭등 대책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photo 뉴시스

저소득층일수록 더 비싸게 느끼는 불평등

만약 그가 노인이 돼 인플레이션을 맞는다면 더욱 위협적이다. 고정소득이 없는 노인일 경우 방어수단이 많지 않다. 젊을 때야 근로소득을 얻고 일부를 돌려 투자자산을 보유하지만 노년층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게다가 의료비나 실버타운처럼 노후에 필요한 항목들은 소비자물가지수 파악에 포함되지 않거나 가중치가 고려되지 않는다. 그래서 60대 이상이 겪을 체감 물가상승률을 지금 정확히 파악하는 것부터 어려운 작업이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는 “만약 부동산 없이 노후 현금 자산만을 가지고 노후 계획을 세운다면 물가 상승 시대에 매우 취약한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 당장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다시 노동 현장에 뛰어들거나 담보 대출을 받아야 할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인플레이션이 무서운 건 강씨처럼, 인구 중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는 ‘중산층과 서민’이 타격을 받아서다.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면 생계비용이 늘어나는 대신 소비여력은 줄어든다. 월급쟁이라고 다르지 않다. 물가 상승률 3~4%보다 연봉이 더 오르지 않는다면 사실상 임금이 삭감된 것과 다르지 않다. 실질소득이 낮아지면 저축이나 투자로 운용할 수 있는 자산 규모도 조금씩 줄어든다. 인플레이션을 ‘조용한 도둑’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체감물가는 소득 계층에 따라 차이가 크다. 전체 물가 품목 중 식료품 가격이 눈에 띄게 올랐기 때문에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식비가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물가 상승의 여파도 다르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8~2019년 대비 2020~2021년의 체감물가 변화를 소득분위별로 살펴보니 저소득층이 고소득층보다 1.4배 물가 상승을 더 크게 체감했다.

특히 국내에서는 부동산의 급등이 현재의 물가 상승을 부추긴 측면도 있다. 몇 년 새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면서 ‘부의 효과’가 크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부의 효과’는 부동산이나 주식 등 자산의 가치가 커지면서 소비가 늘어나는 현상이다. 자산이 늘었다고 느껴지면서 지출도 많아지는 구조다. 이 때문에 재화나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물가 상승이 이뤄질 수 있다.

김상봉 교수는 이런 부의 효과에 동의한다. “특히 한국은 집값이 단기간에 확 뛰었기 때문에 부동산으로 인한 파급 효과가 큰 편이다. 부동산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비싼 물가를 지불할 준비를 하거나 기꺼이 지불하는 등 부의 효과가 크게 나타나고 있다.”

치솟는 물가상승률과는 반대로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2%대로 낮아졌다. 이 때문에 인플레와 불황이 동시에 일어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도 나오기 시작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실제로 시작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성장률 전망치와 물가상승률을 비교했을 때 성장이 더딘 것은 확실한 상황이다. 이필상 서울대 특임교수(경제학부)는 “정도가 어떻든 간에 지금 경기가 침체하면서도 물가가 오르는 현상이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는 미국에서부터 스태그플레이션이 시작돼 전 세계로 확장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 4월 14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에 참석한 주상영 금통위 의장 직무대행(가운데). 이날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연 1.25%에서 1.5%로 전격 인상했다. photo 뉴시스

물가와 경기 사이, 어려운 균형점 찾기

장기적인 물가 상승의 마지막 사이클은 1980년대 석유 파동 때였다. 40여년 만에 처음 겪는 인플레이션이 올 수도 있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물론 과거에도 이번처럼 물가상승률 4%대를 기록한 때는 있었다. 다만 그 지속성이 다르다. 이번 물가 상승은 장기적으로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더욱 심각하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경제학과)는 “지금이 1970~1980년대 석유파동 이후 처음으로 찾아온 인플레이션 압력이다. 물가상승률만 놓고 보면 이례적인 일은 아니지만 지금의 물가 상승 압력은 지속적일 것으로 보이고 파급력도 강하다”고 설명했다.

인플레이션의 진단과 해법은 결국 행정의 영역이다. 고물가를 안고 출발하는 새 정부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이미 물가를 포함한 민생안정 대책을 새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세운 바 있다.

일단 기획재정부는 급한 대로 세금 인하에 나섰다. 20% 감면하고 있는 현행 유류세 인하분을 30%로 낮추는 조치가 5월 1일부터 시행된다. 전문가들은 점진적으로 금리도 올리기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채무자 부담 증가 등 부작용을 우려해 선뜻 선택하기 쉽지 않지만 가계·기업 부채를 잡고 유동성을 회수하기 위해서라도 금리 인상은 불가피하다.

성태윤 교수도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인 과제로 ‘점진적 금리 인상’을 꼽는다. “폭이 크지 않으면서도 점진적으로 금리를 올려 이후 급격히 금리를 상승시키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류세 인하 등을 통해 공급 차원의 일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그건 물가를 잡는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다. 기준금리 인상을 통한 유동성 회수가 꼭 필요한 상황이다.” 자칫하면 경기가 위축될 수 있다는 딜레마가 있지만 ‘물가와 경기’는 공존하기 쉽지 않다. 두 과제 앞에서 균형점을 찾아내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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