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새벽, 영업 끝난 쇼핑몰 공터 앞에 후드티 청년들이 서성이고 있다. 벚꽃 지고 푸른잎 우거진 봄밤이지만, 새벽 공기가 여전히 싸늘하다.캠핑 의자, 담요, 종이 박스를 펼쳐 만든 돗자리…. 집도 절도 없이 노숙하는 청년들이 품 안에서 작은 술병을 꺼내 든다. 얼마 남지 않은 독주가 아깝다는 듯 홀짝거리는 그들. 차가운 밤 공기에 위스키 향이 포르르 번진다.세상의 모든 줄서기, 라인업
이쯤 되면 ‘둠칫 둠칫♬’하는 힙합이 배경 음악으로 깔려야 할 것만 같지만, 사실 이 장면은 영화 속 뉴욕 맨해튼 빈민가가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포착된 광경이다. 공터, 새벽, 음주, 노숙…. 뭐 하는 사람들일까.
세상의 모든 줄서기, 라인업이 지난 4월 28일 새벽 서울 롯데마트 잠실점 ‘제타플렉스’ 앞을 찾았다. 이곳에는 서울에서 가장 큰 주류 전문점 ‘보틀 벙커’(1320㎡·약 400평)가 있다. 롯데가 오프라인 유통 위기를 타개할 승부책으로 개장한 전략 점포다.
현행법상 주류(전통주 제외)는 인터넷으로 주문·결제가 가능하지만, 배송은 불가능하다. 물건을 손에 넣으려면 오프라인 매장을 찾을 수 밖에 없다. 이커머스(전자상거래) 공습에 신음하는 대형마트 업계는 일제히 주류 라인업 강화에 사활을 걸고 있다. 롯데마트 역시 지난 연말부터 핵심 점포 1층의 70%를 온통 ‘술’로만 꾸미는 집객(集客) 실험에 나섰다.
이날 동이 트면, 요즘 국내 위스키 업계의 시선이 온통 쏠린 ‘김창수 위스키’가 시장에 풀릴 예정이었다. 스코틀랜드 양조장 100여곳을 돌면서 위스키를 연구했다는 한국인 생산자가 처음 출시한 양주다. 이 위스키는 336병만 생산됐고, ‘홈술’(가정용 술) 유통 채널로는 전국 롯데마트 보틀벙커·이마트 트레이더스 점포 11곳에 100병이 풀렸다. 이 중 규모가 제일 큰 잠실 보틀벙커에 가장 많은 물량(18병)이 배정됐다.
그러니까 이날 새벽, 마트 앞에 출몰한 ‘젊은 노숙인’들은 힙합 갱스터나 불량 서클 멤버가 아니라, 그저 위스키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청년들이었다. ‘득템’의 순간을 기다리던 이들은 현장에서 각자 소분(小分)해 온 양주로 간단한 시음회도 가졌다. 술을 입에 적시기만 하는 건지, 취객은 보이지 않았다. 고요하고 오붓한 밤이었다.
◇아재에서 엠지로…위스키 시장 세대교체?
이제 ‘아재(AZ) 술’ 위스키를 ‘엠지(MZ) 술’로 불러야 할 것 같다. 여러 위스키를 섞어 만든 ‘블렌디드 위스키’에 맥주 콸콸 부어(’양주 폭탄주’) 벌컥 벌컥 마시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 위스키 문화는 소비 주체와 음용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대형마트 양주 코너는 이런 위스키 시장의 ‘세대 교체’를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다. △유통채널(유흥주점→대형마트) △주종(블렌디드→싱글몰트 위스키) △타깃층(4050→2030)의 변화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엠지들은 독주를 어떻게 마시고, 얼마나 마실까. 잠실에서 만난 위스키 마니아들과 얘기를 나눠봤다.
[ ☞현장 영상 보기 https://youtu.be/UD0or1ub1F4 ]
①위스키 오픈런
프로그래머 김남훈(28)씨는 5년 전 아버지 술장에서 양주를 하나 둘 꺼내 마시다 위스키에 눈을 떴다. 그는 4월 28일 출시된 김창수 위스키를 구입하기 위해, 27일 저녁 마트 앞에서 캠핑을 시작했다. 대기번호 1번이었다.
당초 새벽 5~6시쯤 현장 취재를 하려고 했던 기자는 이날 오전 1시50분쯤 온라인 위스키 커뮤니티 게시글을 보고 깜짝 놀라, 곧장 잠실로 향했다. 커뮤니티에는 자정도 안 된 시간부터 이미 12명이 ‘철야 행군’을 시작했다는 인증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오전 2시 30분쯤 마트에 도착했을 때 기자의 대기 순번은 19번, ‘컷오프 탈락’이었다.
위스키 오픈런이 벌어진 건, 코로나 팬데믹 때문이다. 지금 위스키 시장은 코로나에 울고 웃는 신세. 홈술 열풍으로 소비자 수요가 크게 치솟았지만, 코로나 물류 대란·공급망 위기로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유통업계에선 “팔고 싶어도 팔 물건이 없다”며 아우성이다. 이마트 주류팀 명용진 바이어는 “위스키 공급 부족이 장기화하자, 올해 초부터 대형마트에서 오픈런족이 등장했다”며 “맥캘란·발베니 같은 인기 제품은 물건이 깔리는 당일 오픈런이 벌어지며 완판된다”고 설명했다.
②위스키 술상, 2535가 세팅한다?
잠실에서 만난 위스키 캠핑족 18인의 면면은 흥미로웠다. 1990년대생이 14명, 1980년대생이 3명, 나이 공개를 거부한 중년이 1명이었다. 성별로는 남성이 15명, 여성이 3명이었고, 최연소 캠퍼는 1999년생이었다. 밤샘을 불사하는 체력과 취미에 몰두할 금전·정신적 여유를 가진 2535 소비층이 이 문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인 1~2년 전쯤부터 위스키를 좋아하게 됐고, 유튜브와 인터넷 커뮤니티(네이버 ‘위스키 코냑 클럽’·디시인사이드 ‘위스키 갤러리’)를 통해 정보를 얻고 있다”고 했다. 애호가들이 모인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도 위스키 트렌드를 접하는 주요 창구였다.
“오픈런이나 오픈 채팅에서 알게된 애호가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시음회에 가면, 20~30mL 위스키 한 잔을 30분~1시간에 걸쳐 마셔요. 각자 느낀 맛과 경험을 세세하게 공유하고요. 과음·폭음하는 분위기는 결코 아니죠.”
공대생 김모(25)씨는 “유튜브에서 위스키 마시며 공부 하는 대학생 브이로그를 보고 위스키에 입문했다”며 “편의점에서 가장 싼 양주부터 시작해 이제는 독특한 위스키를 깊게 탐구하는 단계까지 왔다”고 했다.
나무 맛, 바닐라 맛, 체리 맛, 가죽 맛, 아몬드 맛, 매운 맛, 약품 맛…. 로컬 위스키에 맥주를 마구 섞어 마시는 ‘양폭 문화’의 몰락을 경험·목격해 온 기자로서는, 위스키에 이토록 진지하게 접근하는 청년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불콰한 얼굴을 맞대고, 현실을 잊고 싶어 취하려고 마셨던 ‘아재 술’ 위스키가 이제는 나만의 개성과 기호를 반영하는 ‘엠지 술’로 자리잡고 있다. 적어도 위스키의 세계는, 보다 나은 방향으로 진일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눈에 살펴보는, 위스키 오픈런 팩트시트(Fact Sheets)
○위스키 인기는 관세청 수출입 무역통계에서 확인된다. 2021년 위스키 수입액은 1억7534만달러(약 2100억원)로 2020년 대비 32.4% 증가했다. 위스키 수입액은 2008년 정점을 찍고, 10년째 내리막길을 걷다, 지난해 V자 곡선을 그리며 반등했다.
○국내 위스키 열풍은 싱글몰트 위스키인 ‘발베니’와 ‘맥캘란’이 이끌고 있다. 싱글몰트는 100% 보리만을 사용하고 다른 증류소 술과 섞지 않은 위스키를 말한다. 남대문 시장 주류 상가에서 2019년 7만원대였던 ‘발베니 12년’은 올 들어 12만원대로 71% 뛰었고, 25만원대였던 ‘맥캘란 18년’은 35만원대로 40% 올랐다.
○오픈런 대란이 벌어진 싱글몰트 위스키 발베니의 경우,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한국 시장 매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24% 신장했다. 발베니 관계자는 “소비자 수요가 폭발하고 있지만, 공급량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대형마트 상황도 마찬가지.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롯데마트 위스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60%, 이마트 위스키 매출은 36.4% 신장했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같은 기간 싱글몰트 위스키 매출만 따로 떼놓고 보면 240%나 증가했다”며 “2030 소비자가 시장에 진입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마트의 2030 위스키 소비자 비중은 2019년 39%에서 지난해 46.1%로 급증했다.
○유통 공룡인 롯데와 신세계는 ‘한국형 위스키’ 출시로 맞붙을 태세다. 롯데칠성음료는 최근 스코틀랜드 위스키 제조 장인의 자문을 받아 증류소 설립에 나섰고, 신세계L&B 역시 △제주위스키 △K위스키 △K싱글몰트위스키 등의 상표를 출원했다.
#STORY 조선일보 한경진 기자
#VIDEO 스튜디오광화문 이예은 PD
#유튜브 바로가기 [EP.7 MZ세대가 열광한 K-위스키 16시간 줄서서 사봄(응 못사~)] https://youtu.be/UD0or1ub1F4
이번주 라인업 유튜브에서는 유명 바텐더인 김준희 바 머스크 대표, 위스키 마니아인 대학생 김원우씨와 함께 뛴 대형마트 위스키 오픈런 현장을 보여드립니다. 이날 라인업팀은 1990년대생이 이끄는 위스키 소비 문화에 무척 놀랐는데요. 생생한 분위기는 영상으로 직접 확인해 보세요. 독자님들의 구독과 좋아요, 댓글은 라인업팀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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