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장금융투자운용(한국성장금융)은 지난 6월 400억원 규모의 ‘LP(기관투자자) 세컨더리 전문 펀드’를 조성했다. 세컨더리(secondary) 펀드란 사모펀드(PEF)나 벤처캐피털(VC) 등이 보유하고 있는 기업 주식을 다시 인수하는 펀드를 말한다. 사모펀드나 벤처캐피털이 기업 주식에 투자하는 펀드를 프라이머리(primary) 펀드라고 하는데, 이 펀드들이 투자했던 기업이나 지분을 다시 사들인다고 해서 세컨더리란 이름이 붙었다.
원래 한국성장금융은 모펀드를 조성해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에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는데, 올해 처음으로 세컨더리 분야에 직접 투자를 시작했다. 투자 업계 관계자는 “투자자들이 약세장에서 좋은 매물을 살 기회로 보고 세컨더리 펀드 투자를 확대하는 추세”라고 했다.
가파른 금리 인상, 경기 둔화 등으로 자금 시장이 얼어붙은 가운데 세컨더리 펀드가 주목받고 있다. 세컨더리 펀드는 프라이머리 펀드보다 안정적이고 통상 할인된 가격에 자산을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꼽힌다.
◇약세장이 투자 기회… 기관 관심 증대
1일 투자 업계에 따르면 공무원연금 등 국내 주요 LP들이 세컨더리 펀드 투자를 타진하고 있다. 이미 올 초 우정사업본부가 2억달러(약 2800억원), 공무원연금이 2700억원을 세컨더리 펀드에 투자했다. 두 기관은 각각 2년, 3년 만에 세컨더리 펀드에 투자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제 막 움트는 단계지만 글로벌 세컨더리 펀드 시장은 꾸준히 성장해왔다. 신한투자증권에 따르면 지난 2021년 말 기준 전체 글로벌 대체 투자펀드 중 세컨더리 펀드가 약 6%를 차지했다. 펀드 모집액은 30억달러(약 4조 2500억원) 수준으로 20년간 6배 이상 커진 것으로 추산된다.
세컨더리 펀드는 프라이머리 펀드가 이미 초기 투자 비용을 들여 성장시킨 회사의 지분을 인수하기 때문에 펀드 운용 초기에 일정 기간 마이너스(-) 수익률이 나는 구간을 피할 수 있다. 또 펀드 만기 기간 안에 매각하기 어려운 회사가 거래되는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할인되는데, 특히 요즘 같은 약세장에서는 저평가된 기업의 지분을 싼값에 살 가능성이 높다.
올해 약세장이 이어지며 글로벌 세컨더리 펀드 시장에서는 미국계 PEF가 들고 있던 유니콘 기업 주식이 시장 가치보다 10~20% 할인된 가격에 거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올해 상반기 VC가 가지고 있던 당근마켓, 직방 지분 일부가 세컨더리 펀드에 팔렸다. 또 최근에는 마켓컬리 등 상장을 앞둔 대형 벤처기업과 중견 상장기업의 LP 지분 등이 세컨더리 펀드의 투자 검토 대상이 되고 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올해는 경기가 좋지 않아 매물이 넘치는 매수자 우위 시장”이라며 “옥석을 가려서 좋은 기업의 주식을 사들이면 낮은 가격에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 ‘돈맥경화’ 해소 기회 되기도
PEF와 VC 입장에서는 세컨더리 펀드가 점점 더 심해지는 ‘돈맥경화’ 현상을 완화할 수 있는 구원투수가 되고 있다. 2020년 이후 넘치는 유동성을 기반으로 몸집을 키워온 국내 PEF와 VC들은 올 들어 시장이 경직되자 자금 회수를 못 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투자한 기업을 매각하거나 상장해야 펀드를 청산하고 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데 국내 인수합병(M&A) 시장도, 기업공개(IPO) 시장도 얼어붙으면서 출구가 없어진 것이다. 한 PEF 관계자는 “금리가 치솟자 기존 LP들 가운데 빠른 현금화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당장 M&A나 IPO를 하자니 기업 가치가 너무 떨어져 있는 상황”이라며 “세컨더리 펀드에 일부 지분을 판매하면 어느 정도 현금을 확보하면서 펀드 운용을 계속할 수 있다”고 했다.
◇개인 투자 가능해질까
해외에서는 최근 자산가들의 대체 투자 진입 창구로 세컨더리 펀드가 활용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국내 투자자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한세원 신한투자증권 자산전략파트장은 “세컨더리 펀드 시장의 역사가 짧아 아직 1차적인 모집 대상은 대부분 대형 기관투자자들”이라며 “세컨더리 펀드를 개인 및 고액 자산가 대상 맞춤형 투자상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펀드 지분 매입 당시부터 잔존 만기와 규모를 고려해 편입 자산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