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21세기 경제·군사 인프라의 핵심이자 국가 전략 자산이다. 이를 간파한 중국이 반도체 자립을 목표로 2015년부터 2025년까지 1432억달러(1조위안·약 187조원)를 쏟아붓자, 올 7월 미국은 2027년까지 527억달러(약 69조원) 지원을 골자로 한 반도체법(CHIPS Act)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유럽연합(EU), 일본, 인도, 대만까지 반도체 굴기(崛起)에 나서면서 ‘반도체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다. 6개국 정부가 책정한 공식 지원금만 27000억달러(약 350조원)에 육박한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축(軸)이 요동치는데 지금처럼 실기(失機)하면 한국 반도체가 낙오할 수 있다”고 말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8월 9일 백악관 사우스론에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에 서명한 뒤 미소짓고 있다./조선일보DB

◇美·中의 메모리반도체 협공

각국의 세제 혜택과 보조금부터 위협적이다. 일례로 170억달러를 들여 반도체 공장을 짓는 삼성전자에게 미국 텍사스주와 테일러시는 20년간 재산세 85~90% 감면을 포함해 10억달러를 인센티브로 준다. 미국, EU, 대만 정부는 반도체 기업의 자국 내 시설투자액에 대해 25% 세금 공제율을 적용한다. 미국은 “향후 5년간 390억달러(약 51조원)의 보조금을 반도체 기업에 지급한다”고 반도체법에 명시해 놓고 있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한국에선 중앙·지방 정부의 보조금이 0원이고 세액 공제율도 6%”라며 “이런 상태에선 한국 기업도 국내에 더 이상 공장을 짓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 정부가 뿌리는 막대한 ‘보조금 효과’로 미국 안에서만 46개 반도체 신·증설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 집계). 최근 1년 새 미국 내 반도체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한 삼성전자·TSMC·인텔·마이크론 등 8개 IT 기업의 투자액만 4400억달러에 달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유일한 희망이자 버팀목인 메모리반도체도 영향을 받고 있다.

주요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들의 미국내 투자 현황. 2022년 12월 12일 기준

기술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일부 추월하고 있는 미국 마이크론은 올 10월 “앞으로 20년간 1000억달러를 들여 뉴욕주 북부 클레이에 공장을 지어 2030년까지 메모리반도체 연간 매출을 3300억달러로 늘리겠다”고 했다. 이는 자국내 수요의 상당부분을 마이크론이 직접 공급하겠다는 선언으로 한국 기업에 던지는 ‘도전장’이다.

메모리반도체 업계 세계 3위인 미국 마이크론의 사업장/마이크론 제공
미국 마이크론이 세계 최초 개발에 성공한 232단 낸드플래시 반도체 구조도/마이크론 제공

중국 국영기업인 YMTC도 경계 대상이다. 반도체 정보기업 ‘테크인사이츠’는 이달 1일 “YMTC가 2030년 이전에 메모리반도체 글로벌 선두 주자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김정호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중국 기업들의 중국제(製) 메모리반도체 대량 구매는 시간문제일 뿐”이라며 “한국의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 수성(守成) 노력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다”고 말했다.

◇석·박사 인력, 10년 전의 30% 규모

반도체 인력 쟁탈전도 치열하다. 주요국들은 자체 인력 양성과 해외 우수 인재를 빼오는 ‘양면 전략’을 가동 중이다. 미국은 ‘반도체법’에 근거해 국가반도체기술센터(NSTC)를 세워 2027년까지 110억달러를 투입해 매년 2500명의 대학원생에게 연구 장학금을 지원하고 1만명의 인재를 배출할 계획이다. 또 10억달러를 들여 50개 대학에 100명의 반도체 교수 채용과 교육 시설 업그레이드를 지원한다.

중국은 2020년 10월 난징을 시작으로 작년 한 해에만 광저우·안후이·선전·베이징 등 전국 주요 거점에 20개 넘는 반도체 대학원 또는 학과를 신설했다. 작년 4월 개교한 칭화대 반도체대학은 석·박사생을 포함해 매년 1000여명을 뽑고 있다.

중국 랴오닝성 다롄에 있는 신관기술 반도체 공장/뉴시스

박승찬 용인대 교수는 “중국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설계-제조-후(後)공정 등 기업별로 특화된 대학들을 연결해 반도체 인력을 전략적으로 키우고 있다”고 했다.

한국도 인력 확대에 나서고 있지만 수도권·지역 대학 갈등과 각종 규제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혁재 서울대 교수(전기공학부)는 “미국은 2000명의 반도체 인력 양성을 위해 1억달러(약 1300억원)를 들여 200개 대학이 협력하는데, 우리나라는 10분의 1인 100억여원을 지원하고 참여대학도 7개에 불과하다”고 했다.

2010년부터 10년 동안 정부 주도 대형 반도체 연구개발 국책 사업이 사라진 결과, 반도체를 전공하는 대학원 석·박사 인력은 10년 전의 30% 수준으로 줄었다. 더 좋은 대우와 연봉을 내건 미국, 중국으로의 인재 유출도 심각하다. 경선주 국회 입법조사관은 “향후 우리나라의 명운(命運)을 좌우하는 반도체 전문 인력에 대해서는 형평성 논리를 버리고 파격적인 지원과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기업들은 막대한 정부 보조금과 지원금을 갖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의 전현직 기술자와 임원들을 상대로 인력 빼가기 공세를 펼치고 있다./조선일보 디자인팀

◇한국 특유의 ‘속도 경영’ 사라져

SK하이닉스는 2019년 2월 120조원을 들여 경기도 용인에 메모리반도체 공장 4개를 세운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3년 10개월이 지난 이달 현재, 회사는 착공식 일정조차 못 잡고 있다. 여주시와 시민들이 작년 5월부터 공업 용수 관로 문제를 놓고 반발해 이 문제로만 사업이 1년 6개월여 동안 표류한 것도 한 원인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8년 만인 2027년 공장 가동이 목표지만 계획대로 될지 미지수”라고 했다.

반면 작년 11월 건립 계획을 발표한 삼성전자의 미국 테일러 공장은 4개월만인 올해 3월 착공했다. 마이크론은 뉴욕주 메모리반도체 공장 양산(量産) 시점을 3년 후인 2025년으로 잡고 있다. 한국 보다 5년 빠른 ‘속도전(速度戰)’이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의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예정 부지가 텅 비어 있다. 2019년 2월 사업 계획 발표후 정부 심의 통과에만 2년이 걸렸고, 2022년 1월까지만 다섯 차례 착공 시기가 연기됐다. 2022년 1월 13일 낮 촬영한 사진이다./조선일보DB

김경준 전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은 “과감한 투자와 경쟁국을 압도하는 신속한 공장 건설 같은 한국 반도체 특유의 강점이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복잡한 규제와 행정 인·허가, 이해 관계자들의 갈등이 어우러져서다.

이왕휘 아주대 교수는 “반도체는 업종 특성상 적기(適期)에 공장 신·증설과 투자가 긴요하다”며 “정치인과 지역민들의 기업 발목잡기가 계속된다면, 세계 무대에서 한국 반도체의 입지가 크게 좁아질 것”이라고 했다.

◇지원금 대폭 늘리고 콘트롤타워 세워 美와 공조해야

韓 반도체 3가지 생존책

전문가들은 반도체 전쟁에서 한국의 생존책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먼저 인력 양성을 위한 과감한 지원이다. 정부는 올 7월 ‘2031년까지 총15만명의 반도체 전문 인재 양성’ 계획을 내놓았지만 현재 직업계고와 대학·대학원을 통한 국내 배출 인력은 연간 5000여명에 그쳐 목표 달성이 요원하다.

사진 왼쪽부터 황철성 교수, 차상균 교수, 김양팽 박사/조선일보DB

‘반도체특별법’으로 추진해 온 반도체학과 신·증설은 야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황철성 서울대 석좌교수는 “연간 30조원의 정부 연구개발(R&D) 예산 가운데 대학에 지원되는 반도체 기초연구비는 500억원”이라며 “교수와 우수한 청년 연구자들을 반도체로 모으려면 관련 연구비 지원을 지금의 3~4배로 대폭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고급 인력의 해외 유출을 막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두 번째는 미국과의 결속력 강화다. 미국·일본·대만 3국간 반도체 밀월이 짙어지고 한국이 소외되는 상황에서 반도체 패권국인 미국과의 그물망 공조(共助)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장은 “대기업, 벤처캐피탈, 대학 등 3~4개 차원에서 공동 연구개발(R&D), 합작 벤처 투자 같은 방법으로 미국 업계와 네트워킹을 촘촘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미국 NSTC처럼 민간과 정부를 아우르는 반도체 콘트롤타워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세 번째는 정치권의 발상 전환이다. 반도체 산업은 수 십조원의 자금이 들어가는 대규모 장치 산업으로, 중견·중소기업들로선 글로벌 경쟁이 불가능하다. 김양팽 산업연구원(KIET) 전문연구원은 “이런 특수성을 무시하고 한국 국회의원들이 ‘대기업 특혜’라는 이유로 반도체특별법을 가로막는 것은 국가적 자해(自害) 행위”라며 “정치권이 지원을 거부하면, 우리 기업도 핀란드 노키아처럼 순식간에 몰락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 국회에 2022년 8월 상정된 '반도체 특별법'은 기업들의 요구를 대부분 배척한 '반쪽짜리 법안'이다. 그나마 4개월 넘게 표류하고 있다./조선일보 디자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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