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민 3977만명이 가입해 ‘제2 건강보험’으로 불리는 실손보험 보험료가 내년 또 오른다. 인상률은 평균 8.9%다. 작년 10~12%, 올해 14.2% 오른 데 이어 5년째 인상이다. 2018년엔 동결됐으나 그 직전해(2017년)에는 무려 20.9% 올랐었다. 실손보험료가 지난 7년간 2배 이상으로 오르자 가입자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보험사들은 매년 커지는 실손보험 적자 폭을 메우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주장한다. 5년 전까지만 해도 1조2004억원이던 적자는 지난해 2조8602억원까지 불었다.
실손보험을 판매하는 보험사들은 거둬들인 보험료보다 더 많은 보험금을 지급하고 있다. 가입자가 납입한 보험료 대비 보험사가 지급한 보험금의 비율을 뜻하는 손해율은 매년 130%대를 기록 중이다. 보험사들이 실손보험료로 1000원을 받아 1300원을 보험금으로 지급했다는 뜻이다.
고질적 적자의 원인은 소수의 가입자가 대부분의 보험금을 타 가는 구조 때문이다. 보험업계는 의료 이용량 상위 10%가 전체 보험금의 약 60%를 타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과다 의료 이용자들은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는 비급여 부문에서 보험금을 왕창 타간다. 비급여 의료비가 늘면 실손보험 손해율이 높아지고, 결과적으로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매년 반복된다. 백내장 수술을 비롯해 도수치료, 하지정맥류 같은 비급여 항목에서 발생하는 보험금 ‘누수’를 다수의 선량한 가입자들이 틀어막는 실정이다.
◇'생내장’에 ‘군인성형’까지…비급여 백태
서울 서초구에 있는 삼성생명 서초타워. 이곳에서 불과 대로(大路) 하나를 사이에 둔 한 대형안과는 백내장 수술로 유명하다. 이 안과를 포함해 서울 강남 일대에 집중된 14개 안과에 올해 1분기 지급된 보험금은 4개 손해보험사(삼성화재·현대해상·DB손보·KB손보) 전체 지급 보험금의 28%를 차지했다. 보험사 직원들이 “저 안과 건물을 우리가 세웠다”는 우스개를 할 정도다.
올해 1분기에 상위 10여 개 안과에 지급된 보험금은 한 곳당 평균 42억8000만원이었다. 반면 나머지 900여 개 안과에는 평균 1억7000만원이 지급됐다. 보험금을 소수의 병원들이 독식하는 것이다.
보험업계는 일부 안과에서 멀쩡한 눈을 백내장으로 둔갑시켜 보험금을 타내는 이른바 ‘생내장’ 수술을 부추기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실손보험이 있는 환자에게 노안 교정 효과가 있다며 멀쩡한 수정체를 잘라내고 다초점 인공 수정체를 넣는 수술을 통해 병원 매출의 상당 부분을 실손보험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환자 입장에서는 시력 교정 수술은 보험금이 나오지 않지만 백내장으로 꾸미면 보험금을 탈 수 있다.
올해 1분기 보험사들이 백내장으로 지급한 실손보험금만 4500억원을 넘기자, 손해·생명보험협회는 백내장 보험사기 신고·포상금 제도를 운영해 35개 안과병원에서 보험사기 60건을 접수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실손보험 손해율 악화 주범인 백내장 수술을 집중 단속하면서 하반기 백내장 청구건이 눈에 띄게 줄었다”면서도 “도수치료 등 비급여 항목의 누수가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매년 안 올리면 실손보험 사라진다?
실손보험금 누수를 유발하는 비급여 의료비 1위는 신체 교정 요법인 도수치료다. 원칙적으로 치료 효과가 없는 과잉 도수치료는 보험금 지급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하기 쉽지 않아 일부에선 체형 교정 효과를 앞세워 마사지처럼 이용하기도 한다.
손해보험사들이 한 해 지급하는 실손보험금은 10조6000억원 규모다. 이 중 약 11%인 1조1319억원이 도수치료로 샌다. 5년간 총 576회 도수치료를 받고 1억4000만원을 청구하거나, 치과에서 임플란트 치료를 받고 도수치료로 꾸며 보험금을 청구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나온다.
도수치료와 하지정맥류, 비밸브재건술, 하이푸 등 ‘4대 비급여’ 항목으로 나가는 돈만 한 해 1조4000억원이 넘는다. 진짜 치료 목적으로 진료받고 타간 보험금도 섞여있지만 보험사로선 이를 정교하게 가려내기 쉽지 않다.
비염을 고치기 위해 코 안 비밸브(공기가 통하는 코의 가장 좁은 곳)를 넓히는 비밸브재건술은 치료와 성형의 경계에 있다. 코 질환과 미용상 문제를 동시에 개선해주겠다며 성형외과에서 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때 20대 남성들이 제대 전 마지막 휴가 때 이 수술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군인 성형’으로 불리기도 했다. 자궁 근종을 제거하기 위한 초음파 시술인 하이푸도 질 성형 시술 등과 결합하는 등 과잉 진료를 의심받는 대표적 비급여 항목이다.
정작 실손보험 가입자 10명 중 6명은 실손보험으로 얻는 보험금이 없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전체 보험가입자 중 1년간 무사고자 비율은 65%이다. 가입자들은 보험료로 연평균 약 30만원을 내는데, 가입자의 83%는 자신들이 낸 보험료보다 더 적은 보험금을 받는다. 20%도 안 되는 가입자들이 자신이 낸 보험료를 훨씬 웃도는 보험금을 타가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손보험을 판매하는 13개 손보사 중 3사는 이미 신규 판매를 중단했다. 보험업계는 보험료 인상 없이 실손보험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보험연구원은 지금 같은 추세라면 올해부터 2031년까지 실손보험 누적 적자가 112조3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실손보험 손해율을 손익분기점인 100%로 낮춰 정상화하려면 연간 최소 21%는 보험료를 인상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대안으로 내놓은 4세대 실손은 가입 저조
대다수 선량한 가입자는 “보험사가 과잉 의료비를 전가한다”고 불만이다. 금융당국과 보험업계는 실손보험의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겠다고 지난해 7월 4세대 실손보험을 출시했다. 실손보험은 판매 시기에 따라 1~4세대로 구분된다.
4세대 실손은 비급여 보험금을 많이 타가면 이듬해 보험료가 최대 4배까지 뛰는 대신 보험금을 타지 않은 가입자에게는 보험료를 5% 깎아준다. 하지만 ‘보험은 오래될수록 좋다’는 인식 탓에 4세대 실손 비율은 전체 가입자의 5%에 불과하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실손보험 자체가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어 적자 해소가 쉽지 않다”며 “건강보험에서 급여 항목이 보장되는 만큼 비급여 위주인 실손은 자기부담률을 50% 이상으로 대폭 높여야 한다”고 했다.
[한 해 적발되는 보험사기 1조원 달하는데 환수율은 10%대]
6년 전 제정된 보험사기특별법… 발의된 개정안 12건, 통과 ‘0′건
지난해 보험사기로 적발된 금액 규모는 1조원에 달했다. 그러나 환수율은 10%대에 그쳐 선량한 다수 가입자가 피해 규모를 대신 메우는 형국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보험사기 적발액은 9434억원이다. 이 중 실손보험 등 장기보험 적발액이 4319억원으로 절반 가까이 된다. 브로커가 병원에 환자를 공급하고 그 대가로 수수료를 챙기는 구조다. 보험연구원과 서울대의 공동 연구에서는 보험사기로 인해 한 가구당 매년 30만원의 보험금 누수가 생기는 것으로 추정됐다.
보험사기를 적발해도 불법으로 타간 보험금을 환수하기 어렵다. 최종 사법 조치 결과가 나온 뒤에야 보험사가 별도의 민사소송을 통해 보험금을 돌려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보험금을 전부 소진하는 사례가 많아 환수율이 저조한 것이다. 또 보험사기죄 공소시효가 10년인 데 반해 보험금 반환청구권 소멸시효는 5년이라 유죄판결이 확정돼도 보험금을 환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 등은 지난달 24일 보험사기가 확정되면 별도 민사소송 없이 즉시 환수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환수 시효를 유죄판결이 확정된 날로부터 10년으로 강화하는 내용을 담은 보험사기방지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밖에 보험업 종사자가 보험사기에 가담했을 경우 가중 처벌하거나, 보험사기에 대응하는 범정부 대책기구를 상설화하는 등 제21대 국회에서만 보험사기특별법을 보완하는 법안이 12건 발의됐다. 하지만 통과된 법안은 하나도 없다.
현행 보험사기특별법은 지난 2016년 제정 이후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보험사기가 조직화·지능화하고 있고 매년 피해 규모가 늘어나는 만큼 법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