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은 동서로 분단되어 있던 독일에서 재통일이 이뤄지고,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등 국제 정세가 격변하던 시기였다. 일본에선 활활 타오르던 경제가 조금씩 붕괴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첫 해이기도 했다.
닛케이평균은 바로 직전인 1989년에 종가 기준 3만8915.87을 찍으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연초부터 주가가 조금씩 흔들리더니 연말엔 2만3800선까지 급락했다. 당시 일본 최고 관청인 오쿠라쇼(大蔵省)가 집값 급등 대책으로 부동산 융자 총량 규제를 실시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역대급 거품이 꺼지는 가운데, ‘버블 경제’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
그런데 바로 올해 5월, 일본 증시가 기세등등했던 옛 영광을 되찾을 기세다. 지난 22일 일본 닛케이평균은 종가 기준 3만1000선을 돌파했다. 1990년 7월 이후 약 33년 만에 처음이다. 23일 종가는 전날보다 0.42% 하락한 3만957선에 마감했지만, 장중에는 3만1352까지 오르는 등 상승세가 이어졌다.
올해 초 2만5700선에서 시작한 닛케이평균은 이날까지 20% 올랐다. 같은 기간 한국 코스피 상승률은 15% 정도다.
예상치 못한 주가 상승세에 일본 언론들은 “드디어 일본 주식이 3D 악재를 물리쳤다”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3D 악재는 디플레이션(Deflation), 인구감소(Demography), 부채(Debt)의 영어 앞 글자에서 따온 것으로, 일본 증시의 상승을 방해하는 3가지 변수다.
✅“없으면 더 위험” 바이재팬 열기
“대만보다는 일본에 투자하는 것이 더 편하다(more comfortable with investments in Japan than Taiwan)”(워런 버핏, 5월 6일 주총에서)
올해 일본 증시를 끌어올린 주인공은 워런 버핏과 같은 해외 투자자들이다. 이런 현상은 데이터를 봐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2021~2022년 매도세를 보였던 해외 투자자들은 올해는 4조엔(약 38조원) 가까운 자금을 퍼부으며 ‘바이재팬 모드’다. 반면 최근 2년간 사자 행진을 이어왔던 일본 개인 투자자들은 올해 주식을 팔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20일 ‘일본이 다시 위용을 되찾은 비결(How Japan got its swagger back)’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FT는 “일본의 1분기(1~3월)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전 분기보다 0.4% 증가해 시장 예상치를 웃돌았다”면서 “4월 물가상승률은 3.4% 올라 중앙은행 물가 목표치(2%)를 13개월째 상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들의 실적이 전체적으로 탄탄하고 향후 전망도 밝다는 점, 또 연이은 금리 인상으로 다른 나라는 경제 감속이 우려된다는 점 등도 일본으로 머니무브가 일어나는 배경이다. 글로벌 증시에선 “일본 주식을 보유하지 않는 것이 지금은 리스크”라는 말까지 나온다.
편득현 NH WM마스터즈 전문위원은 “올해 일본 증시는 엔화 기준으로 20% 이상 급등해 세계 최고 수준의 수익률을 기록 중“이라며 “기업 호실적 같은 소재는 소진되어 추가 상승을 기대하기 어려울 만큼 급등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편 전문위원은 이어 “일본 증시가 더 상승하려면 엔화 강세가 나타나야 하는데, 하반기쯤 예상되는 YCC(일본 정부의 금리 통제) 종료가 매수 타이밍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높아지는 주주친화 기대감
“왜 주가가 이렇게 싼가. 개선 계획을 제출하라”
올해 일본에선 이례적인 증시 부양 정책이 등장했다. 바로 도쿄증권거래소가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를 밑도는 상장사들을 대상으로 개선책을 마련하라고 통지한 것이다. PBR은 주당 순자산(장부가격)으로 주가를 평가하는 것이다. PBR이 1배 미만이면 회사를 청산할 때보다 가치가 낮으므로, 주가는 싸다는 의미다.
지난달 닛케이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본의 주요 상장사 500곳 중 43%가 PBR 1배 미만이다. 미국(S&P500) 5%, 유럽(유로스톡600) 24%보다 훨씬 많다.
도쿄거래소가 칼을 빼들자, PBR 1배 미만인 저평가 기업들을 중심으로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와 같은 주주 환원책이 쏟아지고 있다.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브랜드인 시티즌시계(Citizen Watch)는 주주 환원 일환으로 자사주를 매입하고 있는데, 규모가 전체의 25.6%에 달한다. 대규모 자사주 매입에 힘입어 올해 시티즌시계 주가는 37% 상승했다. 이밖에 다이이치생명홀딩스, 미쓰비시상사, 다이닛폰인쇄 등 다수 기업들이 자사주 매입에 동참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과거에 벌어둔 게 많지만 미래 성장성이 낮은 기업은 저평가 받고 PBR도 낮아지는데 일본 증시가 바로 그런 상황”이라며 “왕년에 벌어둔 뭉칫돈을 능력 없는 기업이 갖고 있기보다는 배당 형태로 나눠주면 주주들의 소득이 되고 결국 사회에 돈이 돌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이 배울 점은 없나
그런데 한국도 일본처럼 PBR 1배 미만인 저평가 상장사들이 적지 않다. 2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달 기준 PBR 1배 미만 기업은 코스피와 코스닥 합쳐 약 900곳이다. 비율로 따지면 38%로, 결코 적지 않은 수준이다. 주식시장에 상장만 시켜 놓고 주주 가치 제고는 외면하고 저PBR 상태로 방치하는 기업들이 많다는 얘기다. 저PBR기업 증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이 되며, 투자자들을 떠나게 한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일본거래소가 PBR 1배 미만 기업에 개선책을 요구한 것은 세계적으로 사례를 찾기 힘든 이례적인 것이며 금융시장에선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이라며 “기업의 실제 가치는 시장에서 평가되는 것이 시장 경제이며, 거래소는 기업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이나 홍보를 해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