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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나라 기업들의 ESG 경영은 ‘레토릭(rhetoric)’처럼 느껴진다. 이들은 정말로 착해지려는 게 아니라 착한 ‘척’만 하고 있다.”
“기업이 국력(國力)이고, 기업이 복지이다. 좋은 기업이 좋은 사회를 만든다! 진보 인사들도 시장과 기업을 이해하고 활용해야 한다.”
김경식(62) 고철연구소장 겸 ESG(환경·사회·거버넌스) 네트워크 대표의 말이다. 1989년 강원도 태백 소재 영풍광업을 첫 직장으로 택했던 그는 3년 후 강원산업으로 옮겼고 INI스틸(옛 인천제철)을 거쳐 2020년 말까지 현대제철 홍보팀장·기획실장(전무)으로 일했다.
◇60세에 퇴직...‘ESG 전문가’로 제2인생
그는 여느 전직 대기업 임원들과 다르다. 퇴임 직후 자택 인근에 ‘고철(高哲, 古鐵)연구소’를 열어 2021년 5월부터 ESG 분야 저술·강연·컨설팅을 하고 있다. 올해 5월엔 <착한 자본의 탄생>이란 전문서적을 냈고 회원 400여명을 둔 한국ESG학회 부회장도 맡고 있다.
김 소장처럼 60대의 나이에 퇴사하기 무섭게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 전문가 반열에 올라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는 매우 이례적이다. 30년 넘게 강도높은 직장생활을 한 그는 어떻게 주체적(主體的)인 제2인생을 구가(謳歌)하고 있는걸까?
지난달 30일 기자는 이런 의문을 품고 서울 혜화동에 있는 ‘고철연구소’를 찾았다. 약 16.5㎡(5평) 넓이의 연구소는 사방 벽면과 책상 위는 물론 바닥에도 책과 자료, 신문이 쌓여 있었다. 그는 “골프는 거의 끊었고 매일 오전 7시30분까지 출근해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밤 10시30분까지 공부하는 생활이 즐겁다”고 말했다.
- 16년 홍보맨이 어떻게 ESG 전문가가 됐나?
“회사에서 내가 주로 한 일들, 즉 전력(電力) 발전 및 가격, 탄소 배출권, 중대재해, 노사 문제 등이 요즘 용어로 하면 모두 ESG이다. 건성으로 않고 문제점과 해법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오랫동안 궁구(窮究)한 덕분인 것 같다. 상사의 배려로 2003년에 ‘한전(韓電) 민영화의 문제점과 대안’이란 논문을 게재한 것이 탐구 활동에 기폭제가 됐다.”
- 대기업에 일하면서 어떻게 공부했나?
“현대제철 재직 중에는 전날 밤 아무리 늦게 일이 끝나도 다음날 새벽 4시30분 기상해 오전 5시40분까지 서울 양재동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러면서 20년 넘게 매월 평균 30권 책을 구입해 읽었다. 지금은 매월 20권 사서 본다. 외부 운동을 안하는 12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대학교때 경제사(經濟史) 노트 등을 곁에 두고 집중 독서를 했다.”
◇“한국 기업들, ESG 붐을 위장막으로 사용”
- 한국 기업의 ESG 경영이 왜 ‘레토릭’과 같다고 보는가?
“2018년부터 국내에 ESG 열풍이 불고 있지만 우리나라 대표기업들의 ESG 활동은 여전히 환경(E) 홍보 중심이다. E 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가치(S)와 거버넌스(G)는 핵심 내용이 안 보인다. 그래서 ‘깨어있는 척하는 자본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의 이어지는 말이다.
“한국 대기업들 입장에선 장애인 의무 고용 같은 사회적 가치(S)와 경제력 집중, 총수의 전횡 같은 거버넌스(G)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 그런데 자본주의 역사가 긴 미국·유럽은 S와 G에서 상당한 진척을 이뤄 지금은 주로 환경(E)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한국 기업들은 세계적인 ESG 경영 붐을 위장막(僞裝幕)으로 사용하고 있다.”
- 그렇다면 ESG 경영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기업의 리더들이 ESG 경영은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자기 진화(進化)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핵심은 주주(株主)이익 증대가 아니라 이해관계자와의 진정한 상생(相生)임을 깨달아야 한다. ESG는 달리 표현하면, ‘기업(E)이 지속성장(S)하기 위한 가이드(G)이다. 이해관계자들과의 긴장된 균형, 즉 견제와 감시와 소통이 절실하다.”
그는 “한국 대표 기업들의 ESG 보고서를 보면 환경 관련 행사 홍보만 하고 있다”며 “1991년 ‘장애인고용 촉진 등에 관한 법률’ 시행 이후 상시 50인 이상 민간 기업은 종업원의 3.1% 이상을 장애인으로 고용해야 하지만 이를 지키는 기업이 거의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김경식 소장은 2013년 산업통상자원부 제2차 에너지계획 수립위원, 2020년 국가기후환경회의 전문위원 등으로 활동한 민간 에너지 전문가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체 에너지 발전에서 재생 에너지 비율은 2004년 이후 2020년까지 6% 미만에 줄곧 머물고 있다.
- 역대 정부 마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외쳤는데 재생에너지 보급이 왜 답보(踏步) 상태인가?
“가장 큰 원인은 재생에너지 정책에서 수요 창출은 외면하고 외형 확대에만 치중한 결과이다. 한전(韓電)의 철옹성 같은 에너지 판매독점이 계속되는 한, 재생 에너지 생산·공급 증대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韓電 판매 독점 깨야 재생에너지 늘어나”
- 어떤 해법이 가능한가?
“재생에너지를 사고 파는 시장(市場)을 만들어야 한다. 재생에너지 판매를 늘리려면 ESS(에너지저장장치)가 많이 보급돼야 한다. ESS 설치에는 민간 자본 투자가 효과적이다. 그러나 한국전력이 전력 도매·소매시장를 모두 독점하고 있으니, 민간 자본이 투자할 틈새조차 없다. 투자가 안 되니 ESS 등 관련 기술 발전도 멈춰 있다.”
김 소장은 이어 말했다.
“OECD 회원국 가운데 전력 판매를 독점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전력 판매 소매시장을개방하면 민간이 ESS 투자를 늘려, ESS에 재생에너지를 저장해 뒀다가 판매해 쓰면 된다. 그러면 재생에너지 전기 가격이 하락하고 관련 수요는 늘어난다.”
- 전력 판매 시장 개방으로 한국전력을 민영화하자는 말인가?
“두 사안은 완전히 무관하다. 한전이 송·배전망을 독점하는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전력 소매 시장 개방이다. 소포와 택배의 경우 한때 우체국이 독점했지만, 지금은 많은 민간 기업들이 뛰어들어 하고 있다. 그런 것처럼 전력 소매 분야도 민간에 문을 열어 여러 기업들이 전기를 구매해 다양한 경로로 팔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유럽·미국이 2030년 총 발전량 대비 재생에너지의 비중 목표를 70~80%로 설정한 배경에는 전력망 개방과 이에 따른 민간 기업간 치열한 경쟁이 있다. 한국에서도 한전의 송배전 전력망을 민간에 유료 대여해 재생에너지 판매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 그러면 민간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 간에 경쟁이 벌어지고, ESS 관련 기술도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중장기 에너지 정책 콘트롤타워 필요”
-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평가한다면?
“문재인 정부는 탈(脫)원전이란 목표를 먼저 정해놓고 숙의(熟議)나 토론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에너지 정책을 확정했다는 점에서 큰 잘못을 했다. 원전 확대 쪽으로 선회한 윤석열 정부 역시 진지한 검토·토론 없이 국민 정서에 많이 의존하는 것 같다.”
- 한전의 적자(赤字), 정치 세금이 된 전기 요금 등 에너지·전력 문제가 실타래처럼 꼬여있는데 어떤 돌파구가 있나?
“이는 책임지고 전담하는 컨트롤타워가 없는 탓이 크다. 정부의 담당 공무원은 1~2년 재임기간 중 정전(停電)과 요금 인상만 없기를 바란다. 국회 상임위원회는 2년 마다 교체되고, 출입기자는 전력산업 문제점도 모른채 바뀐다. 그래서 독점기업 한전의 논리만 횡행해 왔다. 산업부 산하 전기위원회를 독립시켜 중장기적이고 일관된 에너지정책 수립·집행을 해야 한다.”
김경식 소장은 올해 5월 발간한 저서 <착한 자본의 탄생>에서 “나는 기업 경영 최일선에 있으면서 진보적 시민단체에 자주 참여하면서 기업-NGO-정부 기관간의 교류에 힘썼다”고 밝혔다.
- 대기업에 있으면서 진보와도 소통했는데 보수·진보 양 쪽에 한마디 한다면?
“두 진영이 언젠가 화해하려면 상대방 진영에 대한 말을 줄이고 언어 사용을 순화(醇化)해야 한다. 보수는 시장과 기업을 악용(惡用)하지 말고, 진보는 시장과 기업을 이해(理解)하고 활용했으면 한다. 진보측도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된 것은 세계 시장과 진취적인 기업 덕분임을 인정해야 한다.”
김 소장은 “보수는 감세(減稅)를, 진보는 증세(增稅)를 각각 주장하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 재원과 양극화를 줄이는 정책 자금이 모두 필요하다고 본다”며 “절충 안으로 투자 세액 공제는 확대하고, 법인세는 높이는 방안을 제안하고 싶다”고 했다.
◇“노무 관리 진정성있게 하면 노조 힘 못써”
- 철강업계에서 포스코·동국제강은 노사 무(無)분규인데, 현대제철은 정반대이다. 왜 그런가?
“포스코와 동국제강은 모든 관리직원이 모든 노동자를 상대로 진정성 있는 노무관리와 소통 노력을 벌인다. 그러나 현대제철은 노동자 관리를 10여명의 노무담당 부서만의 일로 여긴다. 그러니 노조의 힘만 비정상적으로 계속 커지고 있고, 이는 회사에 이미 부담이 되고 있다.”
- 노사 문제와 관련해 정부에 건의한다면?
“2·3차 협력회사, 플랫폼 노동자, 하소연할 곳 없는 일용 노동자를 위한 노동 정책이 긴요하다. 앞으로 노동 정책의 핵심은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양극화를 해소하는 일이다. 그럴려면 대기업 정규직의 양보가 필수적이다. 이는 민주노총이 자신의 설립정신 대로 ‘동일노동 동일임금(동일회사 다른 임금)’ 법제화에 동의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는 이어 말했다.
“오너가 근로자 등 이해관계자와 공생(共生)하는 진정한 ESG 경영을 실천한다면, 노동자들 스스로 노동조합을 불필요한 존재로 여긴다. 익일(翌日) 현금 결제를 25년 넘게 실천하고 제조원가 절감분을 고객과 공유하며, 임직원에게 회사 주식(株式)을 나눠주는 풍전비철 같은 곳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30여년 설레는 마음 출근...主人의식 갖고 일해”
- 직장 생활과 퇴직 이후 모두 활기찬 모습인데,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있나?
“30여년 동안 늘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항상 ‘내 회사’, 내가 회사의 주인(主人)이라는 생각으로 일했다. 훌륭한 선배들과 일할 때에는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느낄 만큼 성취감 가득했다.”
그는 “대학 입학 후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사회적 약자(弱者)에 대한 관심과 ‘부채(負債) 의식’을 갖게 됐다. 직장 다니면서 계속 공부했던 것은 그때의 소명감과 생각을 잊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며 “매체에 글을 쓰고, 강연하고, 방송에 출연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우리 사회에 진 빚을 갚아갈 것”이라고 했다.
- 후배 직장인들에게 조직 생활 성공 노하우를 밝힌다면?
“세 가지이다. 첫째, ‘먼저 기획하고 자주 평가받으라’. 그래야 내 생각이 다듬어지고 상사가 내 편이 된다. 둘째 의사결정권자와 많은 시간을 갖고 신뢰를 형성해라. 셋째로 지위가 올라갈수록 더 많이 들어라. 그래야 후배들이 아낌없이 혜안(慧眼)과 직언(直言)을 쏟아낸다.”
- 앞으로 계획이라면?
“제대로 된 ESG 경영을 국내에 뿌리내리는데 일조하고 싶다. 지금 한국의 ESG 등급은 종합점수로 평가하는데, 앞으로 주요 기업들의 ESG 경영을 핵심 아이템 위주로 분석·평가해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 낼 작정이다. 한국 기업들의 ESG 경영은 이제 세계적 주목 대상이다. 눈가리고 아웅하며 대충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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