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관계가 좋았던 리드 호프먼 링크드인 창업자(오른쪽)과 피터 틸 팰런티어 회장(왼쪽)의 모습./리드 호프먼 링크드인


미국 북서부 아이다호주(州)의 아름다운 여름 휴양지 선밸리에서 매년 열리는 ‘선밸리 콘퍼런스’는 글로벌 정·재계 거물들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교류하는 억만 장자의 사교 모임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지난 9일부터 13일까지 열린 올해 행사 분위기는 달랐다. 이례적으로 참석자 간에 정치 이슈를 둘러싸고 충돌이 벌어져 분위기가 냉랭했다. 험한 말을 주고받은 이는 빅데이터 업체 팰런티어의 피터 틸 회장과 글로벌 채용 플랫폼 링크트인의 리드 호프먼 창업자였다.

지난 10일 행사 중 무대에 오른 호프먼은 틸과 관계가 어떠냐는 물음에 “틸이 트럼프를 지지하며 ‘도덕적 문제’가 생겨 최근 들어서는 더 이상 그와 얘기를 나누지 않는다”고 답했다. 청중석에 앉아 있던 틸은 이런 도발에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는 호프먼이 트럼프를 상대로 한 법적 소송에 자금을 댄 사례를 꼬집으며 “당신이 트럼프를 ‘순교자’로 만들었다. 정말 감사하다”고 비꼬았다. 이에 호프먼은 “글쎄요, 그가 진짜 순교자가 됐으면 좋았을 텐데요”라고 응수했다. 실리콘밸리를 주무르는 이른바 ‘페이팔 마피아’의 주축 멤버인 두 사람이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 여부를 두고 세계 억만 장자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싸움을 벌인 것이다. 둘은 1986년 스탠퍼드대의 한 철학 수업에서 처음 만나 40년 가깝게 우정을 이어온 사이다. 트럼프 지지 문제로 사이가 틀어지기 전까지 두 사람은 사업·투자·인생을 비롯한 모든 주제에 대해 끝없이 대화하는 절친한 사이로 유명했다.


/포천 2007년 11월 미국 포천(Fortune)지가 페이팔 창업자와 초기 멤버들을 모아 촬영한 유명한 사진. 포천지가 이 사진에 ‘페이팔 마피아’라는 제목을 달면서, 이 용어가 실리콘밸리 테크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이들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진 맨 뒤 왼쪽 둘째 옐프의 제러미 스토플먼 최고경영자(CEO), 앞줄 왼쪽 셋째부터 크래프트 벤처스의 데이비드 삭스 공동창업자, 팰런티어의 피터 틸 회장, 코슬라 벤처스의 키스 라보이스 매니징 디렉터, 링크트인의 리드 호프먼 창업자, 어펌의 맥스 레브친 CEO, 세쿼이아 캐피털의 로엘로브 보타 매니징 파트너, 옐프의 러셀 시몬스 공동 창업자 등이 보인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세가 강했던 미국 실리콘밸리의 억만 장자들이 최근 정치적으로 갈리면서, 끈끈함으로 유명한 ‘페이팔 마피아’까지 내부 분열을 겪고 있다. 페이팔 마피아는 1990년대 후반 결제 업체 페이팔을 탄생시킨 주역들을 일컫는 말로, 페이팔 매각 대금으로 실리콘밸리에서 활발하게 창업·투자에 나서며 테크 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상호 비방은 지난 13일 트럼프 암살 시도 이후 더욱 격해졌다. 페이팔 마피아의 일원인 투자자 데이비드 삭스는 X(옛 트위터)에 선밸리 콘퍼런스에서 호프먼이 한 발언을 올리고 “좌파가 이것(암살 등 폭력)을 일반화했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페이팔 마피아 주역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역시 호프먼의 발언을 두고 “호프먼과 그 부류가 가장 소망하던 일이 일어났지만, 그 순교자는 살아남았다”고 비꼬았다. 머스크와 삭스는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자다. 반면 호프먼은 블로그를 통해 삭스가 “유죄판결을 받은 범죄자를 지지한다”며 비난했다.

민주당 지지가 강했던 실리콘밸리 테크 업계의 기류가 변한 것은 조 바이든 행정부의 테크 규제에 대한 피로감 때문으로 분석된다. 머스크는 2020년 대선 때는 민주당 소속 바이든을 지지했다. 하지만 테슬라에 노조가 없다는 이유로 바이든 행정부의 주요 전기차 행사에 초청받지 못하자 불만을 키워온 것으로 알려졌다. 머스크·틸·삭스 등은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실리콘밸리 투자 업계 출신인 J D 밴스 상원의원을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적극 추천했다고도 알려졌다.


유명 투자자 로저 맥나미의 저격에 반격하는 벤 호로위츠. /벤 호로위츠 X


이런 정쟁(政爭)은 페이팔 마피아 이외의 거물들 사이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최근 글로벌 최대 벤처캐피털(VC) 앤드리슨 호로위츠의 창업자들이 트럼프 공개 지지를 표명한 후, 유명 투자자인 로저 맥나미는 X에서 그들이 “큰 거짓말을 하고 있고, 반민주주의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공격했다. 이에 벤 호로위츠는 한때 함께 투자한 친구를 향해 “로저, 진심이야?”라며 “우린 25년간 서로를 알아왔는데,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바로 트위터로 날 공격한다고?”라고 실망감을 표출했다.

뉴욕타임스는 “1~2년 전 까지만 해도 실리콘밸리엔 ‘오메르타(omertà·마피아의 침묵 규범)’가 작동했고, 테크 리더들은 사적으로 서로를 비난해도 공개적으로 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며 “정치적 적대감이 한때 나란히 일하고 서로 결혼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우정과 동맹을 흩뜨리고 있다”고 전했다.

페이팔 마피아

☞1990년대 후반 결제 업체 페이팔을 창업하거나 초기 팀에서 활동한 인물을 말한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 피터 틸 팰런티어 회장, 리드 호프먼 링크트인 창업자 등을 주로 일컫는다. 2002년 페이팔 매각으로 번 15억달러(약 2조원)를 나눠 가진 이들은 창업과 투자에 나섰다. 유튜브·페이스북·오픈AI 등의 뒤에도 페이팔 마피아의 초기 투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