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17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왼쪽 둘째)이 충남 삼성전자 천안캠퍼스를 찾아 반도체 패키지 라인을 둘러보고 사업전략을 점검하고 있다. photo 삼성전자

‘칩질라(Chipzilla)’란 단어가 있었다. 반도체를 뜻하는 ‘칩(Chip)’과 거대한 괴수를 뜻하는 ‘고질라(Godzilla)’의 합성어다. 반도체 제국으로 불렸던 인텔(Intel)을 부를 때 사용하던 수식어다. 인텔의 전성기는 1980년대부터 활짝 열린다. 여기에는 팻 겔싱어라는 입지전적 ‘인텔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8살에 인텔 반도체 품질관리 엔지니어로 입사한 뒤 현재는 인텔 CEO가 된, ‘원컴퍼니맨’이다. 1989년 486 컴퓨터에 들어가는 486칩셋 개발 무렵 수석 설계엔지니어였던 겔싱어는 엔지니어로서 놀랄 만한 업적을 쌓았다. 그는 32살에 인텔 부사장이라는 직함, 그리고 인텔의 최고기술책임자(CTO)라는 직책을 얻었다.

겔싱어가 CTO로 있고 인텔의 전성기를 만든 또 다른 인물인 앤디 그로브가 최고경영자(CEO)로 있던 그 시절이 인텔이 ‘칩질라’라는 지위를 유지했던 때다. 1990년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를 ‘윈텔(윈도+인텔)’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정도로 막강했던 때다. D램 등을 개발하는 메모리반도체 기업이었던 인텔은 PC 보급률이 낮았던 시기에 CPU 시장에 베팅했고 그런 과감한 전환을 통해서 얻은 결과다. 인텔 없이는 전자제품이 돌아가지 않을 것만 같던 시대였다.

아이폰 시장 놓친 인텔의 치명적 오판

인텔은 모바일 시대가 열리던 무렵, 치명적인 오판을 한다. 2006년께 스티브 잡스 애플 CEO는 폴 오텔리니 인텔 CEO(2005~2013 재임)에게 아이폰용 반도체 칩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첫 아이폰은 2007년에 출시됐으니 세상에 그 물건이 등장하기 전이다. 내 손안의 PC를 만들겠으니 그에 어울리는 고성능 칩을 요구했는데 인텔은 이 제안을 거절한다. PC용 CPU에서 독보적인 데다가 모바일 칩 시장의 미래를 보수적으로 봐서 내린 결정이었다. 이후 잡스는 삼성전자에 같은 칩을 요구해 아이폰을 출시했고 모바일 라이벌인 삼성과의 동행을 일찍 접은 뒤 대만의 TSMC로 아이폰의 칩 제조를 몰아줬다. 지금의 반도체 산업 플레이어들의 구도가 잡힌 순간이다.

오텔리니는 2013년 인텔의 CEO를 그만두며 IT전문매체 시넷(Cnet)과 인터뷰를 가졌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 결정은 아이폰이 출시되기 전의 일이고 아이폰이 어떤 결과를 일으킬지 아무도 몰랐다는 점이다. 당시 애플이 제시한 칩 가격이 예상보다 낮아서 규모로 만회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틀렸다. 그 규모가 내 생각보다 100배 이상에 달할 줄은 몰랐다.” 일종의 해명이었다.

모바일 칩 사업에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물러난 오텔리니는 마케터 출신이다. 그의 퇴장 이후 등장한 인텔의 CEO들도 기술과 거리가 먼 마케터 혹은 재무통이 맡았다. 오텔리니 이후 CEO가 된 블라이언 크르자니크(2013~2019)는 원가절감에 목을 맸다. IT전문매체인 PC월드의 2017년 인텔 관련 기사의 한 대목은 이랬다. “인텔의 익명 관계자에 따르면 회사 내부 분위기는 재앙적 수준이라고 한다. 직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매출이나 이익은 아직 양호하지만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크르자니크 CEO는 원가절감을 이유로 엔지니어들의 재교육도 하지 않으며 만약 한 달 이내에 프로젝트의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바로 취소해 버린다.”

크르자니크의 헛발질 이후 CEO가 된 재무통 밥 스완(2019~2021)은 투자를 요청하러 온 샘 올트먼 오픈AI CEO를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올트먼은 스완에게 10억달러에 오픈AI 지분 15%를 주겠으니 투자해달라는 제안을 던졌지만 스완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생성형AI라는 생소한 시장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투자액을 회수하는 게 불분명해서였다. 이후 오픈AI는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투자를 받았고 챗GPT를 세상에 공개하며 선풍적 인기를 끈다. 오픈AI의 현재 기업가치는 1570억달러로 추정된다. 인텔의 시가총액(950억달러)을 이미 넘어섰다.

“이것저것 다 하다가는 CPU마저 무너진다”

계속된 CEO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위기에 빠진 인텔이 선택한 카드는 겔싱어의 복귀였다. 그는 2021년 위기의 인텔을 구하기 위해 CEO로 복귀한다. 언론들은 ‘인텔의 귀환(Intel is back)’이라는 제목을 내걸었고 겔싱어 역시 ‘IDM 2.0’ 프로젝트를 공개하며 초미세 공정 경쟁에 다시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3년여가 흐른 지난 9월 16일(현지시간), 그간의 선언과 달리 겔싱어가 세상에 공개한 건 인텔의 구조조정 방안이었다. 핵심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를 자회사로 분사하는 것이다. 미국 외 대형 투자도 중단하기로 했고 방대한 제품군도 정리하기로 했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결정이다. 지금처럼 이것저것 다 하다간 핵심 사업인 CPU마저 무너진다는 판단이 깔렸다. 최근에는 인텔 인수설이 곳곳에서 등장했다. 미국의 퀄컴, 영국의 ARM 등이 인텔의 전부, 혹은 일부를 인수하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칩질라는 매물로 전락해버렸다.

인텔의 답답한 현재 상황을 꺼내는 건 인텔과 삼성전자에서 느껴지는 묘한 공통점 때문이다. 인텔과 삼성전자는 설계·제조 등 반도체의 모든 생산 과정을 담당할 수 있는 종합반도체기업(IDM)이다. CPU와 D램 부문에서 각각 공룡이라 불리며 1등을 구가했지만 지금은 뭔가 시원치 않다는 시선을 받는 것까지 닮았다.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AI붐을 타고 주가가 날아오를 때 함께 날아오르지 못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지난 10월 8일 삼성전자의 부회장이자 반도체 부문의 수장인 전영현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장이 이례적으로 입장문을 내는 일이 있었다.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로 걱정을 끼쳤다. 지금의 위기를 꼭 반전시키겠다”는 내용을 담은, 일종의 반성문과 다름없었다. 이날 삼성전자는 올 3분기 잠정실적을 발표했다. 영업이익은 9조100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74%가 증가했다. 하지만 2분기보다 1조원가량 줄었고 시장 기대치인 10조원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시장에서는 이번 발표를 ‘어닝쇼크’로 받아들였다.

“AI 호황 호기를 제대로 캐치 못했다”

전 부회장의 입장문은 ‘위기’를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위기의 정확한 진단을 어느 지점에 두고 있느냐가 중요해진다. 삼성전자의 한 전직 임원은 “삼성전자의 문제가 메모리 업황의 문제라기보다는 AI로 생긴 호황의 호기를 제대로 캐치해내지 못해서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메모리는 커머디티(commodity·범용) 시장이고 누가 얼마나 대량으로 저렴하게 만들어 파느냐가 중요했다. 이 관점에서 반도체의 수익성은 넷다이(Net Die·웨이퍼당 생산 가능한 칩의 수)가 결정해왔다. 일단 대량으로 만들어두고 싸게 공급해 고객들이 알아서 사도록 하면서 점유율 1등을 먹는 구조였는데 이런 마인드를 바꾸지 못했다. 반면 SK하이닉스는 후발주자이다 보니 좀 더 커스텀(고객맞춤형) 메모리에 주안점을 둔 것 같다. 문제는 IT산업이 급변하면서 칩의 용도가 다양해지고 고객의 요구가 중요해지면서 하이닉스는 이와 궁합이 잘 맞았지만 삼성전자는 체질 개선에 둔감했다. 몇 년간의 태도 차이가 격차를 만든 거라고 나는 본다.”

IDM이 모든 섹터에 직접 대응하기에는 한정된 자원의 배분 문제가 생긴다. 설계부터 제조, 패키징에다 연구개발(R&D)까지 감당하려면 투자 범위가 넓어지고 각 부문의 전문 기업과 경쟁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미 투입되는 비용이 막대해지면서 반도체 산업계는 전문 분야를 나누는 ‘분업화’로 가는 게 대세다. 그리고 지금은 분업화를 통한 고도의 전문화가 정답이라는 흐름으로 가고 있다. 인텔이나 삼성전자와 같은 IDM의 부진과 대비되는 결과를 내는 곳이 팹리스(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엔비디아, 파운드리(위탁생산) 전문 기업인 TSMC다.

취재 중 만난 삼성전자의 직원들은 경쟁력의 부진을 집단 내부에서 찾는 쪽이 많았다. “정부가 R&D 예산을 줄였던 것과 비슷하다.” 15년차 한 직원은 자율성이 떨어진 조직문화를 원인으로 꼽는다.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 거쳐야 할 관문이 너무 많다. 평가에 대해서 모든 단계의 결정권자들이 신경 쓰다 보니 신중하다는 이유로 결정이 지지부진해지고 아웃풋이 당장 그려지지 않는 것들, 인풋이 많이 들어가는 것들은 통과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자기 검열도 많아지는 것 같고, 새로운 걸 시도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몇 년 앞을 내다보고 중장기 전략을 수립하는 사람이 있는지 의문이다.”

또 다른 부장급 직원은 “권오현 부회장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자율성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마이크로매니지먼트가 좀 과했다고 본다. 가장 높은 분이 세세하게 챙기는 게 양면이 있지 않나”라고 말했다. “개발이라는 건 잘 안될 가능성을 항상 고려해야 하는데 실무자 입장에서는 하나하나 윗선에서 다 체크하는 게 나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게 되고 이후부터는 안 하는 게 오히려 낫겠다는 생각까지 갖게 된다. TSMC는 과거에 어려울 때 오히려 R&D 인력을 대폭 늘렸다. 결과론이지만 그게 성공했다. 반면 우리의 경우 몽구스프로젝트(독자적인 모바일 AP용 CPU 개발)나 HBM(고대역폭메모리)팀 해체가 보수적 결정의 대표 사례라고 본다.”

“차별화하려면 HBM 경쟁력 입증해야”

이제는 기술력에서도 삼성전자가 1등이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전 부회장은 입장문에서 HBM과 파운드리 사업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원인으로 기술력을 언급했다. 예를 들어 10나노급 D램 공정 기술은 ‘1x-1y-1z-1a-1b-1c’ 순으로 개발돼왔다. 1x가

1세대, 1c는 6세대로 통칭된다. 현재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모두 1b를 양산하고 있다. 하지만 수율에서 차이가 나는 것으로 전해진다. 수율은 한 장의 웨이퍼에서 나올 수 있는 양품(정상 제품) 칩의 비율을 나타내는데 수율이 100%라면 한 장의 웨이퍼에서 양산된 모든 칩이 정상 제품이라는 뜻이다. 수율이 높을수록 생산성이 높다는 점에서 이는 반도체 기업의 핵심 경쟁력이다. 업계에서는 하이닉스의 1b 수율이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갈수록 중요해지는 후공정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HBM의 경우 칩을 적층해 쌓으면서 발열을 억제시켜야 하는 후공정이 중요하다. SK하이닉스는 권재순 수율 담당 부사장이 직접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인 HBM3E 수율이 80%”라고 밝힌 바 있다. 기술 난도가 높은 HBM의 경우 수율이 일반 D램보다 나오기 더 힘들다. 현재 SK하이닉스는 HBM3E 8단 제품을 엔비디아 등에 공급하고 있고 최근에는 엔비디아의 최신 AI가속기인 ‘블랙웰’에 들어갈 12단 제품 양산에 들어갔다.

반면 삼성전자는 주주들이 고대하며 기다리는 HBM3E 8단의 엔비디아 공급이 여전히 확정되지 못한 상태다. AI가 반도체 시장을 떠받치고 있는 이때, HBM 시장에서 드러내는 차이점은 삼성전자 입장에서 뼈아프다. D램과 달리 가격이 최우선 요소가 아니라서다. 김록호 하나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의 실적과 주가가 동종업체 대비 차별화되려면 HBM의 경쟁력 입증이 필요할 것이다. 메모리 1위 업체에 대한 작금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 지적했다. 과거에는 대규모로 만들어 저렴하게 공급하는 방식이 메모리 시장에서 유리했다면 이제는 품질이 가격만큼이나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됐다는 얘기다.

위기를 맞았다는 점에서는 닮았지만 인텔과 삼성이 처한 상황은 다르다. 인텔은 지정학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라자드(Lazard)의 피터 오르작 CEO는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 외교 정책에서 많은 부분이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여기에 딱 들어맞는 사례가 인텔이다. 반도체는 중국과 대립하는 미국 입장에서 전략자산이다. 2022년 미 의회가 여야 가릴 것 없이 미국 내 새로운 반도체 공장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미국 반도체법(CHIPS and Science Act)을 통과시킨 까닭이다.

미 전략자산의 핵심인 인텔은 약 200억달러의 지원금을 받아 미국 내 새로운 공장 짓기를 시작했고 최근에도 국방부와의 프로젝트를 이유로 30억달러를 지원받았다. 이런 국가 단위의 지원 속에서도 겔싱어 인텔 CEO는 “인텔의 재정 회복이 2030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산업에서 반등이란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아직 메모리는 독과점, 기회 열려 있다

삼성전자는 D램·파운드리·시스템LSI(팹리스) 등에서 전문 경쟁자와 대적하기 위해 투자 자원을 분산하면서 여러 사업이 어려움을 겪는 모양새다. 인텔이 파운드리 분사 방안을 발표한 뒤 “삼성전자도 적자 부문인 파운드리를 분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던 이유다. 게다가 미국과 달리 한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기대하는 것도 쉽지 않다. “같은 IDM이지만 인텔보다 삼성이 더 가혹한 상황에 있다”는 평가도 있다.

반면 인텔은 주력인 CPU 자체가 모바일 칩셋(AP)과 그래픽처리장치(GPU)에 밀려 크게 쇠퇴했지만 삼성전자는 주력인 메모리 시장이 여전히 성장 중이라는 점이 다르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내년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 매출액은 각각 2176억달러, 1639억달러로 올해보다 각각 41%, 20% 증가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수요와 전망 자체가 밝은 시장이란 얘기다. 게다가 메모리 비즈니스는 사실상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의 독과점 시장이란 점에서 아직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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